[미술관 탐방] 빛과 색의 향연, 이상주의적인 자연주의: 화순 오지호기념관 & 화가 오지호
[미술관 탐방] 빛과 색의 향연, 이상주의적인 자연주의: 화순 오지호기념관 & 화가 오지호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2.03.0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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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처의 상〉, 1936, 캔버스에 유채, 72 X 52.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처의 상〉, 1936, 캔버스에 유채, 72 X 52.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늘 아래 같은 땅이지만 호남의 자연풍광은 영남출신인 필자에겐 늘 색다르게 보인다. 야트막한 산세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군락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작은 길, 광활하게 펼쳐진 붉은 황토 땅 위에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 물결,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이름 모를 작은 섬들의 행렬, 무엇보다 순박하고 친절했던 남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1995년 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펼쳐들고 유적지와 명승지를 찾아 전라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다. 투박한 불상이나 고인돌, 절집, 정자 등 경계석도 없이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꾸밈없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여서 풍경사진도 많이 찍었다. 그래서인지 전라도를 여행할 때는 늘 편안하고, 좋은 기억과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하다.

전라도에는 ‘호남근대회화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예술인이 있다. 바로 동양화가 의재 허백련(1891~1977)과 서양화가 오지호(1905-1982)다.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차이는 있지만 두 화가는 호남의 자연 풍광과 한국 자연의 전형성을 화폭에 구현해 온 개척자이다. 위대한 두 화가를 기념하기 위해 광주광역시에는 “의재미술관”이, 화순에는 “오지호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오지호기념관 ⓒ쿨투라
오지호기념관ⓒ쿨투라
오지호기념관 전시실 내부 ⓒ오지호기념관
오지호기념관 전시실 내부ⓒ오지호기념관
오지호기념관 전시관ⓒ오지호기념관

“의재미술관”이 현재 동절기 휴관이라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오지호 화가의 업적을 취재하기 위해 화순 “오지호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기념관 문이 닫혀 있다. 화순군청 사이트에서 ‘주말 개관’을 확인하고 갔었는데, 정말 황당했다. 토요일이라 전화도 받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기념관 밖을 서성이다 사진만 찍고, 근처 “오지호 생가”로 발길을 돌렸다. 내부 전시실을 관람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오지호 화가의 생애와 대표작품 위주로 탐방기를 서술해 보려 한다.

오지호기념관은 근대 서양화단의 거목인 오지호 화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탄생 100주년에 맞춰 2005년, 그의 고향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 지어진 화순군립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지상·지하 각 1층 규모로 100여 평의 1층 전시실에는 오지호 화가의 유작 42점과 연보, 유품, 저술집, 도록 등이 전시되어 있고, 지하층은 오지호 화가의 후손(아들 오승우·오승윤, 손자 오상욱·오병욱)과 국내 유명화가들의 기증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관람객에게 오지호 화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게 구성되어 있지만, 한국적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원작 대부분이 국립현대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되어 있어 사진자료로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오지호 화가는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인상파 화풍을 배웠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작품 활동을 했던 이인성(1912-1950) 화가가 대구에서 향토적이고 서정적 색채로 한국의 풍광을 강렬한 원색의 조형언어로 발전시킨데 비해, 오지호 화가는 광주에서 한국의 자연과 민족혼을 우리 고유의 감성과 표현성을 바탕으로 ‘한국적 인상주의’를 개척한 화가로서 뚜렷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조선 사람은 예로부터 명랑하고 선명한 색채를 좋아하고 요구한다… 새로운 미술은 이와 같은 조선인의 생리적 감각과 감정적 요구에 적응할 것을 제일 요건으로 해야 할 것이다… 민족미술이란 본질상 국민예술인 것이다. 국민의 생활감정을 반영하고 그들의 생활의욕을 앙양하는 예술, 즉 국민의 벗이라야 할 것이다.
  - 오지호, 「해방이후 미술 총평」, 《경향신문》(1946. 12. 05.)

오지호 화가는 명랑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질로 청정한 대기와 생명력 넘치는 우리나라의 자연 모습을 표현하는 독자적 회화기법을 구축하고자 했으며, 특히 그는 생명력이 절정에 이른 시점의 자연을 화폭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인상파의 감각에 최대한 충실하면서도 자연을 단지 외부에 자리한 객관적 대상이나 물질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생명체로 보았다.

1930-40년 당시의 초기 대표작인 〈처의 상〉(1936), 〈사과밭〉(1937), 〈남향집〉(1939) 등에서부터 ‘한국적 인상주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 대표작들은 오지호 화가가 1935년부터 1944년까지 개성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그곳의 풍경과 주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 중 〈처의 상〉은 그의 젊은 아내(지양진 여사)를 모델로 하여 순박하면서도 청순한 시골 새색시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단정하게 쪽 진 머리, 붉은 옷고름이 포인트가 되는 흰 저고리, 옥색 치마 위에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온아한 자세의 인물은 한국 여인이 지닌 기품과 정갈한 분위기를 보여주며 생기 있는 표정과 화사한 색감, 치마·저고리 곳곳에 표현된 붓 자국은 인상파 화풍의 세련미를 보여준다.

또한 꽃이 만개한 사과나무들이 겹겹이 서 있는 과수원 풍경을 그린 〈사과밭〉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흰 꽃송이가 점점 흩어지는 모습을 짧은 터치로 화사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5월 8일 토요일은 그리기에 꽃이 좀 부족한 듯하더니, 일요일에는 만개滿開가 되고, 월요일에는 벌써 지기 시작했다… 이 곳을 지날 적마다 꽃봉오리의 변화에 주의를 해오다가,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나도 곧 그리기 시작했다. 오월의 햇볕은 상당히 강렬하고 그리는 도중에 꽃은 자꾸 피었다. 왱왱거리는 벌들과 한가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임금원林檎園에서 사흘을 지냈다. 그리고 이 그림이 거의 완성되면서 꽃도 지기 시작했다.
  - 『한국근대회화선집 양화판3 오지호』, 금성출판사(1990)

색채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그는 “회화는 색채의 세계다”라고 주장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처럼 야외에서 자연을 관찰하여 그리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생동하는 자연의 분위기와 밝고 선명한 색채를 전달하려 했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요,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태양의 광과 열에 의하여 길러진다… 회화는 인류가 태양에게 보내는 찬가다.…회화는 환희의 예술이다.
- 오지호,「순수회화론」,『오지호 김주경 二人화집』(1938)

오지호, 〈열대어〉, 1964, 캔버스에 유채, 90.5×7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열대어〉, 1964, 캔버스에 유채, 90.5×7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가 한국적 빛 속에서 드러나는 자연 풍경을 화폭에 담은 〈남향집〉은 당시 화가가 살았던 개성 송악산 기슭의 초가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따뜻한 태양이 빛을 발하는 한낮에 남향집 앞 늙은 대추나무가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그늘은 빛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된 것’이라고 생각한 화가는 그림자를 청보라색으로 표현하였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부엌 문지방을 넘으려 하고 담장 아래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 삽살개가 정겨운 감흥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한국적인 정서와 색채가 물씬 풍기는 인상파화풍의 대표작이다. 과감한 화면 구성과 햇볕을 받고 있는 담벼락의 따뜻한 색감과 대비되는 나무 그림자의 배치, 밝고 선명한 채도의 색상 표현은 그의 인상주의 미학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부터 작고(1982)하기 전까지 화가는 고향인 화순과 광주에 정착하게 되고, 이때부터 호남의 자연에서 받은 인상과 느낌을 묘사하였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추광〉, 〈열대어〉, 〈항구〉, 〈춘경〉, 〈과수원 풍경〉, 〈설경〉, 〈추경〉 등의 제목으로 많은 작품이 남아있다. 바다가 보이는 항구나 눈 덮인 겨울 풍경에서 보이듯,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색채의 어우러짐만으로 표현하여 주관적인 감성과 감흥이 강조된 표현주의적 추상에 근접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오지호 화가는 한평생 자연의 본질을 회화세계에 담아내려고 했다. 신선한 색채감각으로 한국의 자연을 그대로 반영한 한국적 인상주의를 추구했고, 이후에 인상주의 화풍에서 더 나아가 전통 한국화의 필획을 연상시키는 생동감 있는 터치와 생생한 색감을 강조한 추상표현주의적 화풍을 보여주었다. 

화순 동복에는 오지호 화가가 태어나고 유년기와 신혼생활을 했던 생가가 있다. 1800년대에 지어진 고즈넉한 고택(지방문화재 제274호)은 화실이 있는 사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또 광주 지산동에는 살림집인 초가(광주시 기념물 제6호)와 1955년에 지어 마지막까지 예술혼을 꽃피운 작업실이 있다. 개성 시기의 남향집과 마찬가지로 이 집들은 오지호 화가의 생과 예술이 집약된 공간이자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 집들은 ‘빛’이 들이치는 생명의 공간으로 모두 투명한 창이 있다. 자신이 손수 만든 투명한 창을 통해 맑은 공기와 빛을 맞이했고, 빛과 함께 들어온 남도의 자연은 화가의 손을 거쳐 화폭에서 따뜻한 온기로 되살아났다. 평생 자연주의적 삶의 철학과 정신으로 일관하고, 우리 문화와 전통을 사랑한 사상가로 격동의 20세기를 뜨겁게 살다간 빛의 화가는 떠났지만, 그의 예술혼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오지호기념관”까지 가서 전시실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아쉬운 점도 있지만, 기념관 주변 환경이 열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울타리도 없는 기념관 주위는 농가와 밭, 마을길과 주차장이 뒤섞여 있고, 기념관 바로 옆에 붙어 서있는 전봇대들도 눈에 거슬렸다. 그 와중에 방문객도 많지 않고, 예고 없이 문은 닫혀있고, 전시되어 있는 그림도 원본이 아니고….

화가의 생가, 살림집(초가), 작업실, 기념관은 있지만 유명화가의 대표작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한 평이 조금 넘을 것 작은 같은 공간에서 사색을 하며 직접 만든 나지막한 창문너머로 보이는 자연 풍경과 계절의 변화를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는 유족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광주시나 화순군 지자체에서 이런 사정을 고려하여 개선해 주길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전남 화순군청 문화관광 http://www.hwasun.go.kr/culture
광주미술문화연구소 http://gwangjuart.com
『한국현대미술의 지형도』 박영택, 2014, (주)휴머니스트
『한국근현대미술의 미의식에 대하여』 이주영, 2020, 미술문화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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