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호남 남종화계의 맥을 잇다: 진도 운림산방과 소치기념관
[미술관 탐방] 호남 남종화계의 맥을 잇다: 진도 운림산방과 소치기념관
  • 김명해 (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07.0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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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기념관

  비 갠 후 드러나는 하늘은 깨끗하고, 빗물에 씻겨 내려간 세상 풍경은 온통 푸름 그 자체이다.

  대구에서 광주를 거쳐 목포에 도착하니 오랜만에 그리웠던 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구름은 햇살에 움찔거리며 비껴가고 고요한 하늘과 바다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청명한 파란색 그 자체이다. 목포대교를 지나 해남, 진도대교를 거치니 반가운 섬 진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도로가 많이 생겨 예전보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지만, 그래도 반나절이나 걸렸다.

  흔히 ‘진도’ 하면 진돗개, 진도아리랑, 신비의 바닷길, 명량대첩, 진도(팽목)항, 미스트롯 출신 가수 송가인이 떠오른다. 궁금한 마음에 진도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주요 화면에는 아름다운 진도의 자연 풍경 사진과 함께 ‘보배섬 진도, 으뜸시·서·화·창이 넘실∼대지라’라는 유쾌한 홍보문구가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진도에 가면 네 가지(시, 글씨, 그림, 노래)를 자랑 말라고 하는데, 그중 글씨와 그림은 오늘의 목적지인 운림산방의 주인이자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1808-1892)의 집안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한국회화사를 보면,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중국으로부터 수묵산수화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인 수묵 시대를 맞이하였다. 특히 17세기에 청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청에서 발간된 다양한 화보(畵報)와 중국 화가들의 산수·인물·문인화 작품이 직접 유입되어 18세기에는 진경산수, 풍속화, 문인화 등 한국회화의 번성기를 이루었다. 19세기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그를 추종하는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남종화풍(南宗畵風)이 전개되는데, 남종화는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수묵과 옅은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고 시정적(詩情的)이며 사의적(寫意的)인 측면을 중시해서 그린 품격 높은 그림을 일컫는다. 조선 말기에 확립된 남종화는 본연의 취지나 정신에서는 멀어지고 하나의 양식으로서 간주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화가 집안이 바로 추사의 제자이자 호남 남종화의 맥을 잇고 있는 소치 허련 선생과 그 후손들이다.

운림산방과 소치기념관

  2011년 8월에 국가지정명승 제80호로 지정된 ‘운림산방’은 “구름 숲”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허련이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남종문인화를 대표하는 호남화단의 성지이며 세계에서 유일한 일가직계(一家直系) 오대(五代)의 화맥(畵脈)이 200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진도대교를 지나 30분쯤 남쪽으로 내려오면 첨찰산 서쪽에 “ㄷ”자 모양의 기와집인 화실과 그 뒤편의 초가로 된 살림채가 보이는데, 바로 이곳이 운림산방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재보수공사로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가까이 가서 볼 수도 사진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멀리서나마 눈도장을 찍고주변을 서성거렸다. 운림산방 앞에 만들어진 연못은 480평 규모의 방지원도(方池圓島) 형태로, 연못 가운데 직경 6미터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에는 백일홍이 홍일점인양 우아하게 서 있다. 연못에는 초록 수련 잎이 하얀 꽃과 함께 피어 이곳의 운치를 더해 주며, 수십 마리의 잉어들은 먹이를 던져줄 때마다 치열하게 달려들어 아이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연못은 첨찰산 자락에서 흘러들어와 밖으로 빠져나가는 물길과 이어져 있어 깨끗했다. 주변의 동식물들이 거기서 맑음과 고요함을 누리고 살아왔을 것이다. 운림산방 왼편에는 백일홍, 매화, 동백과 오죽 등 갖가지 나무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으며 오른편 넓은 잔디밭은 조경석과 조경수로 잘 꾸며져 있었다. 초가 형태의 살림채를 둘러싼 돌담과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작약이 시골 동네 누군가의 집처럼 소박하기 그지없고, 살림채 바로 뒤에는 소치 허련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그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운림사가 있다.

운림산방앞

  허련에서 시작되어 54년을 이어오던 운림산방은 1911년부터 잠시 외부인의 소유물이 되어 있었다. 허련의 아들 허형이 50세 되던 때에 운림산방을 다른 사람에게 팔고 강진으로 이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82년 허련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운림산방을 다시 사들여 쇠락한 화실을 복원하였고, 진도군에 기증되어 현재는 지자체에서 일괄 관리하고 있다. 또한 운림산방내에는 2003년에 건립된 소치기념관이 있다. 산방처럼 ‘ㄷ’자형의 구도로 지어진 기념관은 초대인 소치 허련부터 소치의 아들인 미산 허형, 미산의 두 아들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 남농의 손자인 허진, 허재, 허준 등 5대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또한 입구에 들어서면 운림산방 화맥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사진으로 잘 구성되어 있으며 허씨 일가의 서화 자료 및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치기념관

  소치 허련은 조선 말기의 문관이며 서화가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나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의 자서전 『몽연록夢緣綠』(일명 소치실록)에 의하면, 28세 때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1786~1866)로부터 학문과 인격을 수양하고 윤두서(1668~1715)의 『공재화첩』의 그림을 접하면서 회화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처럼 홀로 담담하고 고요하게 살았겠는가. 선사와 수년을 왕래하다 보니 기질과 취미가 서로 같아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 소치 허련의 『몽연록』 중에서

  31세 때 소치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익혔으며, 추사로부터 중국 북송 미불, 원나라 황공망과 예찬, 청나라 석도의 화법을 배우고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소치는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여 남종문인화풍을 토착화시켰다. 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두고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 “소치 그림이 나보다 낫다”고 극찬하였으며 또한 원말(元末) 4대가의 한 명인 대치(大癡) 황공망에 견주어 허련에게 ‘소치(小癡)’라는 호를 내렸다.

  소치는 산수, 인물, 노송, 모란, 사군자 및 괴석 등을 모두 잘그렸으며, 특히 산수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는 황공망과 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독필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담채의 독특한 색감에서 개성을 보인다. 특히 오늘날 남아 있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선면산수(扇面山水)인 〈운림각도(雲林閣圖)〉는 그의 거처인 운림산방을 선면에 담은 작품으로,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주산을 배경으로 중앙 하단에 조촐한 규모의 별서가 등장한다. 선면에 꽉 찬 구도로 그림 그리고 산 위여백에도 거의 빈틈을 남기지 않고 빼곡하게 쓴 제(題)가 있다.

소치기념관
소치기념관

  내 집은 깊은 산중에 있어 매번 봄·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푸른 이끼는 들에 깔리고 떨어진 꽃은 길바닥에 가득하다. 사립문에는 찾아오는 이 없고 소나무 그림자만 드리워 있으며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청한다. (중략) 창가에 앉아 크고 작은 글씨 수십 자를 쓰고 집에 간직한 법첩, 필적, 화권을 펴놓고 실컷 감상하고 집 밖으로 걸어나가 농원 노인과 벗들을 만나 뽕나무와 삼베 농사를 묻고 벼 작황을 얘기한다. (중략)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 지팡이에 기댄 채 서 있으면 석양이 산등성이에 걸치며 자줏빛 푸른빛 온갖 형상들이 순간 변화를 보이며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고, 소잔등에 피리를 불며 짝지어 돌아오는 아이들 뒤로 달빛이 시냇물에 내려 앉아 있다.
  - 병인년(1866) 여름 비 오는 날, 소치 그리다.

  작품에 등장하는 운림산방은 초가와 싸리나무 울타리가 그려져 있고 조그마한 둥근 돌다리 위엔 지팡이 짚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155년 전의 소박하고 정겨운 운림의 모습을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필치로 그렸으며 화가 자신의 글씨로 쓰인 글을 통해 소치의 유유자적한 삶의 편린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감상하였다.

  그 외, 기념관에는 소치 작품으로 괴석에 모란과 대나무를 그린 〈괴석모란도〉, 〈괴석묵죽도〉, 오랜 소나무를 그린 〈노송도〉, 산수풍경인 〈운무산수도〉, 〈강상선유도〉 등의 작품과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와 명언을 뽑아 기록한 『운림수록(雲林隨錄)』, 중국 유명화가들의 화풍을 연구하여 품평한 『제화잡록(題畵雜錄)』, 자작시집인 『치옹만고(痴翁漫稿)』, 그림에 관한 실기와 이론을 모아 놓은 책인 『운림묵연첩(雲林黙緣帖)』 등의 저술서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소치 작품의 특징은 짙은 먹 위주에 마른 붓이 구사된 거친 필치와 다소 성근 화면 구성, 옅은 황색과 청색을 첨가한 색채이다. 소치에 대한 회화사적 의의와 평가는 남종화풍의 토착화와 이를 통한 호남 화단의 형성을 들 수 있으며, 소치의 화맥은 가전(家傳)되어 막내아들 미산 허형(1861~1938)이 대를 이었다.

  미산은 아버지 소치의 재주를 그대로 이어받아 특별히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능숙한 필치를 구사하였고 〈묵모란〉과 〈묵매〉 작품처럼 사군자에서 두드러진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가문의 화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미산은 두 아들 남농 허건(1908~1987)과 임인 허림(1917~1942) 형제에게 자신의 예술혼을 꽃피우게 하였다.

  운림산방 삼대인 남농 허건은 남종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승화시켜 ‘신남화(新南畵)’라는 새로운 화풍을 일구어낸 화가이다. 고향의 산야, 해촌, 산사 등의 향토적인 풍경들을 가문의 필법인 갈필법을 사용하여 많은 걸작들을 남겼으며 특히 거친 선으로 빚어낸 소나무의 독특한 구성과 생동감 있는 강력한 필선으로 그린 ‘남농식 송수법’이 역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남농은 의재 허백련과 더불어 현대 호남 화단의 양대 화맥을 이룬 업적으로 유명하며, 1982년 운림산방을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여 국가에 헌납한 공헌이 크다. 그의 주요 작품인 〈금강산보덕굴〉, 〈목포일우〉, 〈추강조어〉, 〈조춘고동〉, 〈삼송도〉 등의 많은 작품은 1985년 목포에 개관한 남농기념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미산의 막내아들 임인(林人) 허림은 모든 물상을 흙으로 점을 찍어 표현하는 ‘토점화(土點畵)’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한 천재 화가로 일본 화단에 알려졌지만, 안타깝게도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화풍은 부드러운 붓놀림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 구성과 수많은 미점으로 명암과 양감을 살려 포근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기념관에 전시된 그의 그림은 몇 작품 되지 않지만 향토적 분위기의 시골 동네 풍경과 과장되지 않은 산수풍경을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어 화계 사대(四代)인 아들 임전 허문(1941∼ )에게 그 기질이 고스란히 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운연비폭(임전 허문)

  허문은 요절한 허림의 외아들로 생후 11개월에 부친을 잃고 7세 때부터 백부인 남농 슬하에서 자랐다. 꾸준한 노력과 집념으로 가문의 갈필(渴筆)을 연구하면서 허문 특유의 이론을 접목시켜 수묵의 농담을 이용하여 화면 전체를 동적으로 전개시키는 ‘운무산수화(雲霧山水畵)’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일궈냈다. 운무산수는 구름과 안개를 주제로 한 산수화로, 보이는 형상은 단순화하고 여백 부분을 운무로 표현하여 내면세계를 완성시키는 원천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전시되어 있는 〈운연비폭(雲煙飛瀑)〉은 소나무의 수법과 산의 준법이 실경과 흡사하게 묘사하고 폭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운무의 느낌을 몽환적으로 표현한 사실적 작품이다. 현재에도 한국화단의 원로화가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 허문은 가문의 화맥을 지키는 4대 주인으로서 그 역할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소치의 고손자이자 남농의 손자인 운림산방 5대 화맥을 잇고 있는 허진(1962∼ ), 허재(1973∼ ), 허준(1976∼ )은 국내 미술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윗대 화가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한국화에 걸맞은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화맥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미술사에는 이름난 화가 가문이 조선 시대부터 등장한 여러 경우가 있다. 15세기 이상좌(1465∼?)가 아들 이숭효와 이흥효, 손자 이정(1578∼1607)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7세기 공재 윤두서(1668~1715)와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 등 선비화가 가문이 있고, 18세기 화원 집안끼리의 혼인으로 두 세기동안 많은 화원을 배출한 김응환(1742∼1789) 가문은 가문은 명화 가문의 절정을 이룬 화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중앙 예술원을 중심으로 오경석(1831∼1879)이 아들 오세창(1864∼1953)과 손자 오일영(1896∼1960)으로 연결된 가문이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화맥을 잇고 있는 가문은 진도 소치 허련 일가뿐이다.

  20세기에 와서 화계 집안은 부부, 형제·자매, 손자·손녀, 사촌, 사돈까지 혈연으로 맺어진 예술가들로 많이 형성되어있다. 가문의 기법이 대물림되기도 하지만 윗대와는 전혀 다른 미술 분야와 작품세계로 전환하는 집안도 많다. 대대손손 가업으로 이어지는 한국미술의 화계는 운림산방 화맥처럼 세대와 시대정신을 넘나들며 새로운 의미의 일가를 형성하고 이것이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대를 이을수록 ‘특출나야 한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년의 역사 동안 한국 남화의 전통과 계승 발전에 힘을 쏟아 온 운림산방 집안. 이러한 화가 가문이 있음으로 우리 미술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다.

 

 


출처
진도군 관광문화 https://www.jindo.go.kr/tour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http://jindo.grandculture.ne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한국회화사』 안휘준 지음, 일지사, 1995
『월간미술』 「미술인 가족의 초상」 중에서 2004년 5월호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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