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찰나의 진실을 붙잡기: 유희란 『사진을 남기는 사람』
[문학 월평] 찰나의 진실을 붙잡기: 유희란 『사진을 남기는 사람』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1.08.08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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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투라》 지면에 좋은 책을 소개하겠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 글을 쓴다. 이번 호에 조명할 작품은 작가 유희란의 첫 소설집 『사진을 남기는 사람』이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에둘렀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책에 발문(책 끝에 본문 내용을 대략적으로 밝힌 글)을 실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남기는 사람』과 나는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나쁜 책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좋은 책이라고 홍보하려는 게 아니라서 떳떳하다. 출판사에서 유희란의 첫 소설집 원고를 건네며 발문을 부탁한 뒤, 여덟 편의 단편을 다 읽고 발문을 쓰겠다고 결정했을 때, 이 소설집이 출간되면 《쿨투라》 지면에 소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좋은 책이니까. 어떤 면에서 자꾸 좋다는 건가. 나에게 어떤 작품이 좋다는 기준은 세 가지다. 인식론·미학론·윤리론. 첫 번째 인식적 기준은 이 작품이 나로 하여금 몰랐던 사실을 알게 했다거나, 혹은 거기에서 새로운 진실을 일깨워주었는가 하는 점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 미학적 기준은 이 작품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게 했느냐와 연관된다. 단 이때 아름다움은 미(美) 뿐만 아니라 추(醜)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감각을 가리킨다. 세 번째 윤리적 기준은 이 작품이 평소 내가 갖고 있던 도덕적 고정관념을 의심하도록 했는가와 결부된다. 신분제 시대에 쓰인 반(反)신분제 소설이 그러할 것이다. 세 가지로 나누었지만, 개개의 기준은 다 연결돼 있다.

  사진이 “섬세하게 묘사하는 까닭에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그러니 진실하다고 믿겠지만 찰나의 진실일 뿐 영원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찰나의 진실’이다. 이것은 진실이 없다는 견해와는 다르다. 진실은 있되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원래 자리에 놔두고 바라보”다, 섬광처럼 반짝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대상을 붙잡기 위해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B컷은 많고 A컷은 적다. 때로는 양자의 구별이 뒤집힌다.

  이를 종합적으로 만족시키는 책이 고전이다.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고,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읽히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세 가지 기준을 전부 충족하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겠지만, 그중 하나만 특화되어도 좋은 책으로 평가받는 데 무리가 없다. 『사진을 남기는 사람』 의 경우는 인식적 기준에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미학적 기준과 윤리적 기준에 미달한다는 뜻이 아니니까 오해 말기를!) 이것은 「유품」으로 2013년 신춘문예 당선 뒤 유희란이 적은 소감과도 결부된다. “세상을 살아가며 진실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일까. 시간의 흐름을 겪은 후 어느 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유희란에 따르면, 우리가 뭔가에 진실할 수 있는 순간은 사건을 통과하는 지금이 아니다. 사건을 통과하여 그것이 지난날로 변한 다음, 현재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과정 가운데 진실할 수 있는 순간이 생겨난다. 이런 작업을 누군가는 역사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의 유명한 정의(E.H.카) 에 비추어본다면 합당한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소설은 역사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유희란은 ‘사진’을 제재로 삼아 그렇게 만든다. 「사진을 남기는 사람」이 소설집을 통어하는 표제작이 된 까닭도 여기 있다. 이 작품에는 사진에 관한 다양한 명제가 언급 된다.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 “사진을 찍는 일은 한없는 빛 속에 나타나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것” 등의 문장이다.

  여러 사진론이 소설의 핵심을 구성하는 만큼 더 거론하고 싶다. “아름다운 이미지는 가슴을 통해 만들어지는 기하학이다”, “사진은 시각 매체이지만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글과 무관하지 않다”, “사진은 이해가 아니라 감정의 동요”,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다”, “자신을 가장 신뢰하는 순간, 셔터를 누르는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 외에도 많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 당신이 공감할 만한 문구가 최소 한두 개는 있겠지. 가령 나는 다음 구절을 오래 붙들었다. “내 눈으로 찍으면 장면이 있는데 가끔은 그 사진을 잊고 싶은 순간이 있다고” 하면 어떡해야 할까. 그런 ‘나’의 질문에 사진 강사가 한 답변이다.

출처_아시아 출판사

  “모든 것을 원래 자리에 놔두고 바라보면 무수한 빛이 실어나르는 기억이 있겠지요. 또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다 언제 셔터를 누를지는 당신이 결정하는 겁니다. 다시.” 부연하면, 「사진을 남기는 사람」의 시작과 끝은 1인칭 주인공 ‘내’가 뉴욕에서 사진 강의를 듣는 장면으로 연동한다. 사진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친구 결이와 얽힌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십 년 만에 열린 사진학과 동창회에서 그와 재회했다. 그곳에서 본 결이의 모습은 밝아 보인다. 한데 알고 보니 그는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다. 이후 ‘나’는 결이의 메신저 배경 화면이 매일 아내의 새로운 사진으로 바뀌는 걸 유심히 지켜본다. 그러다 ‘나’는 물어볼 게 있다고 그와 만날 약속을 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결이에게 묻지 않는다. “결이에게 너는 어떤 마음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사진을 남기려 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두고두고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일이 아니겠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지금 보니 네 사진을, 매일 업그레이드되던 사진들을 내가 너무 미화한 것 같다는 말도 그만두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네 곁에 있는 사진 속에는 죽음의 징후도 간절한 바람도 보이지 않았는데 사진이 어떻게 진실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고 털어놓지 않았다.” 덧붙이면 두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고, 서로 내밀한 성경험을 공유한 사이이기도 했다. 더불어 ‘나’의 유년 시절에는 가정 내 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한 언니 이야기도 녹아있어, 역사—사진에 대한 서술을 한층 더 입체적으로 빚어낸다.

  오늘날은 휴대폰 카메라로 무수한 사진을 찍어, B컷을 삭제하고 A컷을 수정하여 SNS에 업로드한다. 요즘 세상에 진지한 사진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떤가 하면 사진의 이 같은 속성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사진 강사도 말한다. 사진이 “섬세하게 묘사하는 까닭에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그러니 진실하다고 믿겠지만 찰나의 진실일 뿐 영원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찰나의 진실’이다. 이것은 진실이 없다는 견해와는 다르다. 진실은 있되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원래 자리에 놔두고 바라보”다, 섬광처럼 반짝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대상을 붙잡기 위해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B컷은 많고 A컷은 적다. 때로는 양자의 구별이 뒤집힌다. 그것이 삶에 대한 유희란 소설의 인식론이다.

 

 


허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1년 8월호(통권 8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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