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월평] 호세 마르티 대표시와 시평: 문학과 소명 그리고 호세 마르티
[문학월평] 호세 마르티 대표시와 시평: 문학과 소명 그리고 호세 마르티
  • 김수우(시인)
  • 승인 2022.09.01 0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53년 쿠바 아바나 출생. 16살에 독립운동의 참여를 유도하는 『자유 조국La Patria Libre』(1869)과 『압달라Abdala』(1869)를 쓰고, 제1차 쿠바독립전쟁에 참가한 이후 에스파냐, 미국, 과테말라, 멕시코 등지로 추방과 망명생활을 반복했다. 에세이 『우리의 아메리카Nuestra America』(1891)에서는 혈통과 언어가 동일한 라틴아메리카인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그의 저작물은 19세기 당대의 역사를 반영한다. 1892년 쿠바혁명당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중 1895년에스파냐군의 기습으로 사망했다.

대표적인 시집 『소박한 시Versos Sencillos』(1891) 외에 산문, 번역서, 개인노트, 연설문 등이 다수 있다.

Orgullo. 자긍심이라는 단어이다. 쿠바인의 특성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자긍심’이라고 모두 말한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기에는 현실은 물자가 부족하고 불편한 것투성이였다. 모순으로 보였지만, 네 번의 쿠바 방문을 통해 이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은 바로 ‘주눅 들지 않는’ 문화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주눅 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살아온 내게 참 낯선 것이었다. 험난한 역사를 관통하면서 함께 사는 법을 몸에 익힌, 당당한 공존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쿠바에는 이 모든 모순을 꿰는 두 가지의 축이 있다. 하나는 ‘아프로쿠반’이라고 불리는 혼종문화였고, 다른 하나는 호세 마르티의 문학과 사상이었다. 두 개의 축 가운데에서 ‘평등’이라는 깃발이 펄럭인다. 1492년 콜럼부스가 잠시 머물렀던 이 섬은 그후 스페인 식민지가 시작되었다. 혹사당하던 원주민들은 토벌당하거나 전염병으로 거의 전멸했고, 노동력으로 들여온 아프리카 흑인들이 쿠바의 인종구성을 바꾸었다. 제국의 탄압에 대해 종종 일어나던 흑인반란은 노예제도 폐지와 자유를 요구하면서 1868년 1차 독립전쟁으로, 다시 1895년 제2차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는 1959년 전대미문의 쿠바 혁명까지 도달했다.

문학의 책무는 무엇일까. 공동체의 더듬이 역할을 하면서 역사를 간파하고 미래를 측정하는 것, 동시에 공동체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위한 자율적·미적 가치를 가꾸는 것이라면 호세 마르티는 문학의 가장 지고한 정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티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쿠바의 독립영웅이다. 16세에 정치범 감옥에 수용되어 강제노동을 하다 17세에 추방당해 끊임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제2차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 42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매우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며 극도의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던 호세 마르티의 사상은 ‘궁극의 평등’이다. 조국 독립에 일생을 던진 그의 이념은 후세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쿠바 혁명의 진수가 되었고 피델을 비롯한 쿠바국민의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한 국가의 정신적 지주가 시인이라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의 영혼이다. 쿠바의 아이들은 그의 시와 문장을 외우면서 성장한다. 그의 문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소명의식’이다. 읽고 쓰기를 좋아했던 소년은 문학이 가진 속성 중에서 ‘소명’을 먼저 선택했다고 할까. 이는 문학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인간의 소외와 고통에 어떻게 관여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를 말한다. 동시에 그는 문학의 본질인 미적 창조, 곧 무엇을 어떻게 새로워야 하는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중남미의 ‘모데르니스모’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학은 언어를 새롭게 재창조할 뿐 아니라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뿌리, 특히 아메리카의 문화를 끌어내어 작품으로 승화하였다. 19세기 말, 신제국주의와 중남미 사회의 불안정성을 날카롭게 통찰했으며, 미적 가치와 함께 행동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현대성의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었다. 시집으로는 『어린 이스마엘』(1882), 『소박한 시』(1891), 유고시집 『자유로운 시』(1913)가 있으며, 신문 《우리 아메리카》는 라틴아메리카 사상사의 한 획을 그었다. 2005년 그의 작품들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다음 시는 어떤가.

네 비수가 내 심장부를
찌르는 게 뭐가 중요한가?
난 내 시들을 가지고 있으니,
너의 비수보다 더 강렬한! //

바다와 하늘의 구름을 마르게 하는
이 고통이 뭐가 중요한가?
부드러운 위로, 시는
고통의 날개로 태어났으니.

「소박한 시 XXXV」라는 시편인데, 모든 역사적·현실적 고통에 대응하는 마르티의 강인한 힘이 담겨 있다. 시는 고통의 날개로 태어난다는 고백이 그의 문학적 일생을 그대로 담보한다. 마르티는 빈곤한 환경에서 매우 섬약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아홉 살 때 그의 삶 전체에 결정적인 두 가지 뿌리가 내리게 된다. 자연주의와 평등주의. 시골에 산림감시원직을 얻은 아버지를 따라 마탄사스 지역의 산골 마을 아나바나에서였다. 짧게 머물렀지만 그는 쿠바의 대자연과 우주적인 존재의 신비를 이해했다. 동시에 밀매되는 흑인노예의 비참함을 보면서 이 땅에 필요한 자유와 정의를 깨달았다. 유년시절의 이 두 발견은 평생에 그를 자연주의자로, 평등주의자로 실천적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러한 순수는 스승 멘디베를 만나면서 보다 새로운 세계로 열렸다. 스승 멘디브는 가족 생계를 돌보아야 했던 어린 마르티가 총명한 기질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우며 뜨거운 애국심으로 제자의 사기를 북돋았다.

스승의 서재에서 만난 자유주의 사상과 문학은 나중에 마르티에게 ‘별’의 이상으로 자리 잡았다. 스스로 산화하며 빛나는 가치 말이다. 그 무렵 마누엘 세스페데스가 노예해방선언과 함께 일으킨 제1차 독립전쟁은 마르티에게 다윗의 물맷돌 같은 감명을 일으켰다. 이렇게 조국 독립과 자유의 열망으로 성장한 청소년 마르티의 심장에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에 방향이 되어준 사상의 동기가 맺히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의 첫 번째 의무는 그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론을 적용하지 않고, 그 자신 고유의 것을 발견합니다. (…) 내 임무는, 친구여, 모든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는 것이고, 모든 고상한 것들을 위해 환희로 불을 켜는 것이고, 모든 위대한 것들을 존경하고, 존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매일 내가 본 것들에 대하여 매일 씁니다. // (…) 거대한 우주적인 정치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내 정치이며, 나는 그런 정치를 할 것입니다: 새로운 학설들로 된 정치입니다.

호세 마르티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의 뿌리는 마르티를 언행일치한 진정한 인간으로, 온국민이 흠모하는 사랑의 영웅으로 빛나게 한다. 쿠바 국민들은 그를 사도로 칭한다.

쿠바에선 모든 것이 혼재해 자신 있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 유쾌한 공존은 인간 또는 생명의 존재 방식이라는 문학적 고뇌에 대한 답으로 다가왔다. 우선 인종도 그렇거니와 낡은 차들과 새로운 유행, 가난과 여유, 지독한 매연과 별빛들까지 유쾌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깨 겯고 노래하며 지나는 것을 수시로 본다. 교육과 의료가 평등하니 자랄 때부터 구김살이 없다. 일단 절대적인 불안은 없는 셈이다.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하는 데는 그 사회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작동한다. 그들은 문화를 인식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미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단한 역사 속에서도 자연의 리듬으로 몸에 익힌 결과 그들은 자긍심이라는 유산을 그렇게 받은 게 아닐까.

아바나 중앙공원의 호세 마르티

“하지만 이상하게 다행이었던 점은 어떠한 때에라도 국민들 사이에 웃음만큼은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예요. 어느 날에는 어째 음악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면서 암흑 속에서 모두 합창을 부른 적도 있어요. 이웃 사람이 노래를 부르자, 다른 이웃이 이어 부르고 우리들도 손에 들 수 있는 여러 도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어요.”1

그들의 공존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경제적인 한계로 그들도 현실에 불만이 많다. 그러나 악화된 주택과 식량 부족, 정치참여의 결여 등 현실적 불만이 자신의 영혼을 잠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돈을 벌고자 애쓰지만 실제로 물질이 그들을 지배하진 않는다. 신기할 지경으로 그 불만과 한계들이 그들을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그들은 어디서든 춤을 추고 노래한다. 역사가 가혹할수록 운명은 파란만장할수록 그들은 평등, 연대, 인간의 존엄을 꿈꾸었던가.

그 모든 바탕에 궁극의 평등을 위해 투쟁했던 호세 마르티의 문학이 있었다. 상상력과 감수성을 책임진 그의 문학은 오늘날도 쿠바에서 공존의 능력, 주눅 들지 않는 존재감으로 작동한다. 이 안목이 모순을 넘어서는 자긍심을, 자기의 영혼을 다치지 않게 하는 파동을 만들었으리라. 아름답지만 용감하고, 강철 같은 힘으로 검으로 주조되어야 하는 시의 혁명성을 이미 그는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 시편처럼 말이다.

나의 시는 온화한 초록색이며
불타는 연지빛이니,
나의 시는 피난처 숲을 찾는
다친 사슴이라네. //

나의 시는 용감한 자를 좋아하며
간결하고 신실하며,
강철 같은 힘으로 되어 있어
그리하여 검으로 주조되나니.
- 「소박한 시Ⅴ」에서

 


1  『작은 나라 큰 기적』, 요시다 사유리, 검둥소, 2011, p.123쪽


김수우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뿌리주의자』 외 다수, 『호세 마르티 평전』을 비롯한 산문집 다수, 번역시집 『호세 마르티 시선집』 상재. 부산작가상, 최계락문학상 수상.

 

 

*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