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2] 시나리오의 영감
[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2] 시나리오의 영감
  • 이무영(영화감독)
  • 승인 2020.03.10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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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어디서 찾는가?

  극작의 영감은 다양한 소재를 통해 작가의 감성이나 이성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소재는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말한다면 글의 재료일 것이다.

  요리사에게 재료는 필수다. 하다못해 라면 하나를 끓이는 경우에도 면과 물, 수프, , 계란 등이 필요하다

  작가에게 소재는 시나리오의 원동력이다. 마치 자동차에 연료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듯 시나리오 작가에게 아무 소재도 없다면 글을 시작할 수 없다. 요즘 전기자동차도 많이 굴러다닌다고 시비 걸지 마라! 그럼 이 경우 전기는 무엇인가? 소재다.

  음식을 위해 필요한 소재는 대부분 구매해야 하지만 시나리오의 영감을 위해 필요한 소재는 물과 공기처럼 대부분 무료다. 그리고 주변에 널려있다.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와 매일의 뉴스거리, 위대한 문학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품들, 타인에 대한 관찰, 작가의 아이디어나 세계관 등은 훌륭한 영화의 소재로 활용될 수 있다. 심지어 흐르는 강물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등 자연이나 꿈을 통해서도 영화적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참여했던 시나리오들을 탄생케 한 소재를 살펴보자.

1) 〈삼인조〉(1997, 박찬욱 감독)는 지난 1970년대 말 문종석과 이종대 카빈총 강도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장호 감독의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도 동일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장호는 진지한 드라마로, 박찬욱과 나는 코미디와 비극을 버무리는 형식으로 풀었다.

2) 〈공동경비구역 JSA〉(2000, 박찬욱) - 판문점 내 남북 병사의 비밀스런 내통.

3) 〈휴머니스트〉(2001, 이무영) - 부잣집 부모를 불태워 죽인 패륜아 박한상.

4)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찬욱) -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

5) 〈아나키스트〉(2000, 유영식) - 일제강점기 무정부주의 혁명가 ‘의열단’의 투쟁사.

6) 〈간첩 리철진〉(1999, 장진) - 북한의 식량난,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전자조작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슈퍼 돼지의 아이디어.

7) 〈아버지와 마리와 나〉(2008, 이무영) - 불법이라 손가락질 당하는 마리화나를 위한 변명.

8) 〈한강블루스〉(2016, 이무영) -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약자,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

다른 작품들에 영감을 준 소재도 아울러 살펴보자.

1) 〈명량〉(2014, 김한민)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사.

2) 〈국제시장〉(2014, 윤제균) – 대한민국의 현대사.

3) 〈변호인〉(2013, 양우석)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삶.

4) 〈택시운전사〉(2017, 장훈) -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까지 간 무명의 택시 운전사.

5) 〈밀양〉(2017, 이창동) - 이청준 작가의 단편 <벌레>, 그리고 용서에 관한 성찰.

6) 〈베테랑〉(2015, 류승완) - 부패한 재벌과 이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형사.

7) 〈기생충〉(2019, 봉준호) - 빈부격차와 물질만능주의, 교육열 등 여러 대한민국 천민자본주의의 여러 요소들.

  직접 경험 대 간접 경험

  시나리오 작가가 직접 경험을 통해 영화적 소재를 찾는 건 길을 가다 보석을 발견하는 것처럼 매우 귀한 일이다.

  유하 감독은 유신이 몰락하던 시절 직접 겪었던 학창시절을 바탕으로 〈말죽거리 잔혹사〉(2004)를 만들었다. 부도덕한 교육 시스템 속에 난무하는 패싸움과 체벌 등의 부조리, 이소룡이 되고 싶은 욕망, 첫사랑의 쓰라린 경험 등을 영화 속에 버무렸다.

  최근 개봉한 〈벌새〉(2019)도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건 즈음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간접 경험 중 가장 좋은 건 다른 사람의 애기를 훔치는 거다. 이 경우 작가가 나중에 자신의 ‘절도 행위’를 고백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이런 작가들에게 조언한다. 

  “법적으로 문제될 리 없겠으나 양심의 자유를 얻으려면 피해자에게 고백하고 감사하도록 하라!”

  나는 이야기 도둑질의 선수다. KBS 아나운서 출신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전두환 정권의 방송검열과 탄압을 소재로 소설 『각하는 로맨티스트』(2013년)를 썼다. 산후우울증으로 빚어진 유아 살해의 비극을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 「겨울 방랑자」(미발표) 역시 장물이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훔쳐야 한다. 술자리 등에서 되도록이면 떠들지 말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래야 이야기를 도둑질당하지 않고, 역으로 훔칠 수 있다.

  면밀한 주변관찰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영화적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마닐라에서 봤던 십대 미혼모와 코 흘리던 아기, 초점 잃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뉴욕 타임스퀘어 노숙자, 심지어 해고당한 친구의 수심 깊은 얼굴도 나의 영화 소재창고에 소중히 보관돼 있다. 그것들은 언젠가 새로운 시나리오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직접 경험이나 이야기 도둑질을 통해 모든 영화의 소재를 얻기에는 인간의 삶이 너무 짧고 편협하다. 그래서 작가는 세상 돌아가는 일과 타인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일단 뉴스나 문학, 미술, 음악, 역사 등이 모든 작가에게 무궁무진한 소재거리를 제공한다. 

  뉴스의 경우다. 〈효자동 이발사〉(2004, 임찬상)는 박정희 전 대통령 담당이발사의 잡지인터뷰에서 시작된 영화다. 〈홀리데이〉(2005, 양윤호)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1988년 지강헌의 탈주극에서, 〈도가니〉(2011, 황동혁)는 광주 인화장애아학교 장애아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도가니〉는 공지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니, 문학이 소재가 된 셈이기도 하다. 다른 영화로는 조정래 작가의 동명소설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용의자 X의 헌신〉을 바탕으로 한 〈태백산맥〉(1994, 임권택)과 〈용의자 X〉(방은진, 2012)가 있다. 이외에도 문학을 바탕으로 한 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있다.

  음악과 미술을 소재로 삼은 영화도 수없이 많다. 〈하모니〉(2010, 강대규)는 여자교도소 합창단, 〈고고 70〉(2008, 최호)은 1970년대 인기밴드 데블스, 〈세시봉〉(2015, 김현석)은 동시대 트윈폴리오와 이장희, 조영남 등의 음악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아임 낫 데어〉(2008, 토드 헤인즈)는 밥 딜런의 음악과 기행, 〈인사이드 르윈〉(2013, 조엘과 에단 코엔 형제)은 1960년대 초반 뉴욕 그린위치 빌리지의 포크 씬, 〈도어즈〉(1993, 올리버 스톤)는 록밴드 도어즈의 리드싱어 짐 모리슨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폴락〉(2000, 에드 해리스)은 1940년대 추상화가 잭슨 폴락, 〈프리다〉(2002, 줄리 테이머)는 멕시코의 사회주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 〈나의 외발〉(1989, 짐 쉐리단)은 왼발만을 쓰는 장애화가 크리스티 브라운의 삶과 예술을 영감으로 삼았다. 밴 고흐를 다룬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1990)과 〈밴 고흐〉(1991, 모리스 피알라), 그의 마지막 날을 다룬 〈고흐, 영원의 문에서〉(2018, 줄리안 슈나벨) 등 거의 열 작품 가까이 된다.

  한 편의 그림 자체가 영화의 소재가 된 경우도 있다. 〈사이코〉(1960, 알프레드 히치콕)의 모티브가 된 미국 리얼리즘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철길 옆의 집〉(House by the Railroad)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나리오 작가는절대로 역사의 문외한이 되면 안 된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이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의 소재로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

  백제 패망 직전 계백과 김유신 장군의 대결을 다룬 〈황산벌〉(2003, 이준익)과 〈국제시장〉,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1960년대 흑인인권운동 당시 인권운동가들의 죽음을 파헤친 〈닉슨〉(1995, 올리버 스톤)과 〈미시시피 버닝〉(1988, 알란 파커) 등이 역사적 이벤트를 주요 소재로 삼은 케이스다. 지난 200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켄 로치)은 아일랜드 독립투쟁사를 다룬 걸작이다.

  당신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주제가 뭔지 사전을 찾아보면 ‘중심이 되는 문제’, 또는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기본적 사상’이라 쓰여 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영화를 통해 작가가 표현하려는 생각이나 세계관, 또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작가가 나열하는 줄거리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주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줄거리의 전개를 통해 영화를 보지만, 결국 마지막에 관객의 가슴에 남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자본주의의 악독한 폐해를 거침없이 비판한다. 자본주의가 견고해지면 견고해질수록 패자의 수자는 더 많아질 거라고 경고한다. 마지막에는 아예 대놓고 혁명폭도를 등장시켜 이 체재를 무너뜨리고픈 욕망마저 드러낸다.

  〈밀양〉은 용서할 능력도 용서받을 가치도 없는 한심한 인간 존재를 깨우치게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서로 용서하며, 또 누구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가.

  〈1987〉(2017, 장준환)은 과거 군사정권의 죄악을 고발함과 동시에 수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독재체제가 붕괴될 수 있었음을 알린다.

  문학과 달리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물론 그건 당연히 영화가 갖는 시각적 힘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영화는 체제의 선전도구로 사용되는 치욕적 역사를 경험키도 했다. 여류감독 레니 리펜슈탈의 1934년 나치 전당대회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 등 여러 히틀러 홍보영화, 그리고 대한민국 유신체제의 선전도구가 됐던 몇몇 영화가 떠오른다. 아직 살아있는 필름메이커들이 있어 제목은 거명 않겠다.

  주제는 감성일 수도, 신념일 수도 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사랑과 야망, 죄책감, 명예, 책임감, 그 외 모든 것들이 주제가 될 수 있다. 단 관객이 작가가 주장하려는 바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스릴이나 웃음이 풍부하다 해도 영화에 주제가 결여돼 있다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이 경우 관객은 극장 문을 나서는 즉시 무의식적으로 뇌리에서 봤던 영화를 지워버릴 것이다.

  물론 주제에 대한 무거운 마음을 지닌 채 시나리오를 시작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주제라는 옷에 몸을 끼워 맞추듯 스토리라인을 억지로 생각해 끼워 넣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건 정신적 고문이다.

  훌륭한 시나리오 작업은 이와 반대로 진행돼야 한다. 먼저 삼빡한 아이러니가 동반된 얘깃거리에서 시작, 점차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을 형성해나가고, 궁극적으로 그 위에 자연스럽게 주제의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줄거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초반에 주제가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아예 어떤 주제로 써야할지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점차 줄거리를 쌓아나가면서 서서히 자신이 쓰는 작품이 어떤 주제를 말하는지 깨우치면 된다. 쓰고 수정하는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시나리오가 마무리될 즈음에서 명확히 주제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비록 초반에 정확한 주제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작가는 진정성을 갖고 계속 시나리오를 써나가야 한다. 작가는 결국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의 진실한 생각이나 사상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 안 그러면 억지가 된다.

  만약 수구적 태도의 작가가 세상을 뒤엎으려는 진보혁명가의 얘기를 쓴다고 하자. 이 경우 정녕 진정성 가득한 시나리오가 나오겠는가! 작가 스스로가 설득되지 않는 시나리오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가! 이렇게 거짓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설 땅이 있으면 되겠는가!

  완성된 시나리오 속 주제는 선명해야 한다. 올바른 시나리오라면 작가가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가 정확히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가장 올바른 것은 작가의 감성이나 경험,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이 주제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시나리오를 써나가면서 주제의 명확성에 대해 의심이 든다면 작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1) 이 이야기는 내게 뭘 말하고 있는가?
2) 이것이 진정 내 이야기인가? 내 직접 경험이 아니더라도 내 세계관이나 감성과 일치하는 얘기인가?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면 아날로그 시절 필름을 사진으로 인화할 때처럼 결국 주제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무영은 대중음악평론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방송인, 대학 교수 등 각기 다른 분야의 어떤 타이틀을 붙여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아티스트다. 어느 시점부터 영화인으로서의 존재감이 더 부각되기 시작한 이무영은, 시나리오 작가로 〈본투킬〉,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소년, 천국에 가다〉 등의 시나리오를 썼고, 연극 〈선데이 서울〉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영화감독으로 〈휴머니스트〉,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아버지와 마리와 나〉, 〈저스트 키딩〉, 〈한강블루스〉를 만들었다. 영화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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