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1] 쇠백로, 중대백로, 왜가리, 그리고 갈매기
[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1] 쇠백로, 중대백로, 왜가리, 그리고 갈매기
  • 강형철(시인, 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
  • 승인 2021.01.2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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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물 때인 지금 내가 서성거리고 있는 곳은 장항의 옛 제련소 굴뚝이 보이는 해변 한 모퉁이이다. 정확하게는 ‘소룡동 시민체육공원’ 해변쪽이고 이어진 길에는 시민들이 편하게 산책하면서 바다를 조망하다가 쉬기 좋게 열두 개의 그네의자가 놓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허리 부근의 높이까지 쳐놓은 안전 철망이 기역자로 꺾인 곳에서는 군산 일반산업단지의 공장과 건물들이 보인다. 해변과 맞닿아있는 ‘삼원중공업’의 도크에는 해경정이 올라 수리중이고 개펄 위로 도크의 레일 일곱 조(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레일의 끝이 펄에 덮여있는 해안에는 누군가 휴지를 조각조각 찢어서 날린 것 같은 모습으로 갈매기들이 한데 어울려 있다. 가끔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하고 날아와 무리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갈매기들이 어지럽게 몰려있다. 그 사이에 키가 껑충한 왜가리가 천천히 움직이기도 하고 물가에는 노랑부리저어새가 부리질을 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
  노랑부리저어새는 얼핏 백로로 보였지만 바닷물이 덜 빠졌을 때 보니 부리가 넓었고 다른 새들과 달리 먹이를 먹고 찾는 모습이 달랐다. 바닷물을 좌우로 저어가며 부리질을 하는 모습이 특별하였다. 물을 휘젓는 모습에 착안하여 ‘저어새’로 이름을 부쳤을 것이란 생각에 혼자 웃었다. 물을 휘저을 때 어쩌다 걸리는 먹이를 잡기 쉽게 주둥이가 오리입처럼 넓은 모습이리라.
  갈매기들 사이에 있는 새들 중에 쇠백로와 중대백로도 있다. 하얀색이니 백로로 이름을 붙였을 텐데 작은 백로는 소백로가 아닌 쇠백로로 불린다. 몸집이 큰 백로 중에 아주 큰 것은 아니니 중백로이거나 큰 백로 즉 대백로가 있었을 것인데 그 크기를 얼마로 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복잡하니 대충 쇠백로보다 큰 것들을 싸잡아 중대백로로 두루뭉술 이름을 부쳤을 것 같다고 혼자 가늠해보면서 다시 웃는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렵다. 한 번 이름이 정해지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자신의 밖에 있는 사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서 고정시키고자 한다. 그래야 그 대상을 고정시킬 수 있고 그래야 또 다른 사물들이나 생명체를 구분하여 알 수 있으며 이른바 세계를 추상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리라.
  문득 시(詩)의 효용에 대한 설명 중에 논어 양화편의 한 귀절이 떠오른다. “시는 감흥를 일으키며 세계를 볼 수 있게도 하고 무리짓게도 하고 비정을 원망하게도 할 수 있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할 수 있으며 조수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도 한다”( 詩 可以興 可以觀 加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論語』, 陽貨)
  시가 새나 동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알게 한다는 말은 지금 보이는 저 새들을 내가 갈매기 쇠백로 중대백로 왜가리 등등으로 분류해서 알게 만든 힘이었다고 새기게 한다.

  ‘사리’때여서인지 해변이 쑤욱 늘어났다. 그만큼 개펄이 많이 드러난다. ‘조금’때 보이지 않던 도크로 이어지는 레일을 선명하게 볼 수 있어서 좋다. 바로 옆으로 이어지는 산업단지 안의 제지공장 굴뚝에선 연기가 나오며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이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서해공업전문대학이 있었고 그 대학은 산업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임피면 쪽으로 이전하면서 종합대학교인 호원대학교로 이름도 바뀌었다.
  학교가 이전한 빈 터에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지금은 군산일반산업단지, 국가산업단지로 이어지는 길목에 970여 호의 아파트 주민들의 삶의 터가 되었고 또 체육시설의 한 부분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그때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적엔 모두 바다였다. 1930년대 초 이 땅이 일본 식민지였던 때 간척사업이 이루어졌고 그때부터 ‘장뚝 너머’로 불리워진 이 바다에는 ‘아사리’(아사리는 일본어로 조개라는 말인데 그게 어떻게 이곳에서 채취할 수 있었던 조개의 고유명사가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라는 조개가 뻘 속에 있었다.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개펄을 소쿠리에 담아 바닷물 속에서 흔들면 아사리가 자갈거리며 나타났다. 그 조개를 ‘바께쓰’(양동이)에 담아 집으로 가면 어머니는 양은솥에 넣고 삶았다. 삶아지면 바가지로 퍼서 그 조개들의 속살을 먹었는데 그 허연 국물도 맛이 슴슴하여 좋았다.

  또 그 개펄에서 우리는 농발게나 칠게를 잡아 반찬으로 먹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엄지발이 크고 빨갛던 그 게의 발에 물리면 손가락이 찢어지기도 했지만 그 발을 실로 묶어 돌아오는 길에 길동무를 삼기도 했다. ‘이랴 이랴’ 소리를 내며 마치 소처럼 부려보기도 했고.
  어린 시절 이후에는 그 바다는 인근의 청구목재라는 합판공장에서 원목을 수입하여 가공할 때까지 보관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나왕나무 등걸을 뛰어다니며 술래잡이도 했다. 일테면 우리들의 놀이터이기도 했고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문득 생각난다. 친구들이 굵은 마닐라 로프로 묶여져 있던 원목 위에서 뛰어놀고 있을 때, 나는 뚝 바로 아래에 혼자 떨어져 앉아 떨어지는 해를 청승맞게 바라보던 때가. 멀리 떠난 누나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으리라. 걸핏하면 아버지 농삿일에 누나가 ‘샛거리’ 내다주어야 한다며 결석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서울에 사는 이모집으로 떠났었고 또 그 뒤에는 미국으로 갔었던 누나! 그 바다 저쪽으로 해가 질 때 해지는 저쪽으로 멀리 가면 누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혼자 가늠해보기도 했다.

  그런 추억들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지금의 내가 자전거를 세워두고 서성거리고 있다. 나는 2020년 8월 말에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직을 정년으로 마친 꼰대 겸 늙은이가 되었다. 이 해변에서 조금 떨어져 살면서 하루에 한 번씩은 이곳에 와서 자전거와 함께 서성거린다. 그리고 해변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강형철
1955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숭실대 철학과. 동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5년 『민중시』 2집에 『해망동 일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해망동 일기』『야트막한 사랑』『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환생』과 평론집으로 『시인의 길 사람의 길』『발효의 시학』 등이 있다.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숭의여대 미디어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다 정년하였으며, 현재 고향 군산에서 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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