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4] 백릉 채만식, 우리 시대의 큰 거울
[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4] 백릉 채만식, 우리 시대의 큰 거울
  • 강형철(시인)
  • 승인 2021.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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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역사의 채만식 작품 안내 열차
ⓒ임피역사의 채만식 작품 안내 열차

  『탁류』의 작가 채만식은 문학작품의 저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호 백릉(白菱)은 군산시의 주소가 되어 있다. 롯데시네마가 있는 지점의 길을 시작점으로 제일고가 사거리를 거쳐 잠두 삼거리, 구암로에 이르는 길의 이름이다. 예전 조촌동 몇 번지로 표기되던 길이 백릉로 몇 번지로 사용되고 있다. 내흥동에 있는 채만식 문학관은 군산-장항 간 하구둑이 시작되는 군산시 내흥동 해변가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광코스로 이용하던 ‘탁류 길’의 안내문은 ‘백릉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지인 군산 원도심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남겨진 역 사의 흔적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애환을 경험하며 과거를 되돌아보는 길이다’라고 되어 있다. 소개 글 아래에는 1800년대 건물인 유럽풍 건물인 (구) 군산세관, 신흥동 일본식 가옥, 동국사, 군산내항 부잔교(뜬다리), 채만식문학관, 임피역사 등등을 살펴보는 코스가 제시되어 있다.

  ‘역사의 흔적을 통해 선조들의 삶의 애환을 경험’ 한다는 말은 그러한 곳에 있는 건물들(어떤 건물은 그대로 잔존해 있기도 하고 어떤 건물은 새롭게 개수, 복원한 곳도 있다)의 실체를 보고 그와 더불어 그 건물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현재에 이른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새긴다는 의미가 가장 큰 것이겠다. 그럴 때 같이 동참한 사람들이 느끼는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삶의 빛이 될 것이고 의미가 될 것이다. 이를 우리는 관광이란 한자어의 의미로 새긴다(볼觀·빛光).

  그러나 이런 의미의 관광이 이루어지고 일상적 풍경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얼마간의 긴 우회로를 거쳐야 했다. 80년대 이전에 내 고향 군산은 말 그대로 지방의 한 소도시였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특히 광주에서 비극적 사태(당시는 5·18 폭동, 광주사태, 광주 민중항쟁 등등의 임시 명칭이 있었다)가 벌어진 이후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의 민주화운동으로 꾸준히 확산·심화되었고 특히 중요한 것은 중앙 중심의 여러 운동이 지역 운동으로 확산·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군산 또한 그 예외가 아니었다.

  그중 오늘 백릉 채만식 선생과 관련해서 깊이 있게 말할 수 있는 구체적 운동의 자세한 전개에 필자는 이곳 군산에 있지 않았다는 물리적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떤 말을 할 처지가 못 된다. 그 한계를 전제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채만식에 대한 재평가 운동은 전체 운동의 일환으로 역사 바로 알기 운동, 특히 내 지역 바로 알기의 운동선상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낙후된 군산의 현실이 어디에서 연원하며 그 구체적 실상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그런 문제를 심화·확산시켜 나갈 바를 모색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한 거점의 역할을 한 것이 작가 채만식이라는 점이다. 그의 소설 『탁류』는 식민지 시대 구체적 삶의 실상을 볼 수 있는 한 상징이다.

ⓒ채만식 묘소
ⓒ채만식 묘소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탁류는 물이 아니라 군산 사람의 얼굴이다」(《대산문화》 66호, 2017년 겨울)라는 글에서 “소설 『탁류』는 그 시대(일제시대)의 군산을 배경으로 곤혹스런 민중의 삶이 지닌 치욕과 굴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대비하여 이른바 주류세계의 흉악함과 난폭함을 정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아버지 정주사는 물론 은행원 고태수, 약국 주인 박제호, 어음 할인꾼 장형보로 상징되는 지배세계의 온갖 협잡과 탐욕 속에서 만신창이로 부서지다가(…) 장형보를 살해하는 행위를 통해 슬픔의 저 극단, 절망의 끝에서 간신히 새 삶을 열어가는 초봉의 한 많은 삶이야말로 식민지 조선 민중의 맨얼굴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흙탕물 속 사람들의 얼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역사 바로 알기의 여러 운동 중 하나인 ‘친일문학론’ ‘친일문학논쟁’은 일제시대를 통과하면서 씌어진 문학작품 중에서 채만식의 친일작품이 문제가 되었다. 2002년 8월 14일 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학작가회의·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국회의원모임 등에서 문학인 42명을 친일문학인으로 공표한 것이다. 시 분야에서 12명, 소설·수필·희곡 분야에서 19명, 평론부문에서 11명의 명단이 들어갔는데 주요한, 최남선, 서정주, 이광수 등등의 이름들 속에 채만식의 이름이 포함된 것이다. 채만식이 1941년 이후 쓴 작품인 『아름다운 새벽』과 『여인전기』 두 편이 친일작품으로 분류된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최유찬의 『채만식의 항일문학』, 서정시학, 2013, 49쪽 참조).

  이후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2004년에 제정되고 이후 몇 번의 개정이 이루어진 뒤에 2012년 10월 22일 개정된 법률 제2조 제11, 13호에 의거 채만식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다. 당연한 결과로 기왕에 이루어졌던 채만식 문학관 건립, 문학비 건립 등의 사업은 활기를 잃었고 생가터 복원 등등의 사업은 구체적인 자료나 사정 등 여러 문제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주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채만식 「논 이야기」 모형 형상
ⓒ채만식 「논 이야기」 모형 형상

  이후 현재까지 백릉 채만식에 대한 논의는 대략 세가지로 형태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의 행적과 무관하게 그의 작품만을 독립적으로 살피면서 그의 문학적 성과만을 가지고 수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니 그 자체의 문학적 성과만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관점이겠다. 이를 우리는 형식주의 관점 혹은 문학주의 관점이라 보통 부른다.

  두 번째로는 작품과 삶을 하나로 보고 그에게 역사적 평가에서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이를 과감하게 배제하자는 관점이다. 그가 친일행각을 하고 친일작품을 썼으므로 이를 후세에 바른 역사의식과 실천지침을 주기 위해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산주의적 입장이다. 프랑스가 나치에 협력한 인사들에 가혹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청산작업을 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로는 이른바 절충주의라 할 수도 있겠는데, 그의 행적은 행적대로 살피고 그의 문학작품은 또 그대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부끄러운 과거도 자랑스러운 과거도 우리의 역사이니 이를 같이 공유하며 삶과 역사의 준열함을 살피는 거울로 삼자는 것이다.

  각각의 입장이 지닌 장단점이 있어 어떤 것이 바른 입장과 관점인지는 논자에 따라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고, 각기 지닌 장점과 단점이 있을 수 있겠다. 필자는 그의 작품이 지닌 압도적 성과는 큰 의미의 민족 문학론으로 수용하되 그가 보여주는 친일행위나 작품들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밝히면서 독자들과 많은 일반 시민들에게 큰 의미의 거울로 제시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곰곰이 생각하면 살아있는 모든 행위는 모순을 안고 있다. 생명 자체가 모순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세계 자체가 모순이고 이를 핵심으로 파악하는 인식을 우리는 변증법적 세계인식이라 말한다. 세계가 그러하다면 우리 개인도 민족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운 얼굴도 자랑스러운 얼굴도 우리의 얼굴이다. 잘사는 사람들은 부끄러웠던 과거라는 거울을 잊지 않고 현재적 삶의 모든 부문을 살펴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채만식의 처음과 끝이라 할 수 있는 생가터와 그의 묘소는 지금 허허벌판과 같이 버려져 있다. 그 모습이 현재 군산의 어김없는 모습이지만 그 폐허와 배제의 모습을 살아있는 거울로 만들고 이를 우리 삶과 역사의 거울로 만들어내는 것은 또 다른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가 쓴 소설은 물론 산문 수필 등을 읽으면서 그가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어떻게 작품을 창작하고, 또한 프로 문학이 맹위를 떨칠 때에도 ‘동반자 작가’라는 이름으로 그 의미에는 동참하되 문학인의 자세를 꼿꼿하게 지켜낸 점에 공감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탄생시킨 『탁류』나 『태평천하』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초등학생 시절 이후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일본에 유학을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귀국,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교사, 기자, 잡지 편집자, 등등을 전전하면서도 집 한 채도 건사하지 못하고 서울 변두리의 동서남북을 셋방살이로 전전하다가, 끝내 생활이라는 압력에 의해 친일행위로 빠져드는 비극에 처하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더욱이 해방 이후 그러한 삶 전체를 스스로 「민족의 죄인」이란 소설로 단죄하고 동시에 「논 이야기」와 같은 명편의 소설을 쓴 작가가 되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에 찌들어 1950년 ‘못 먹어 죽는 병’이라 일컫는 폐병으로 이승을 하직 했는지 알게 되면서 그의 삶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과 얼마나 유사하고 우리에게 큰 의미를 일깨우는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형철
1955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숭실대 철학과, 동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5년 『민중시』 2집에 「해망동 일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과 평론집으로『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등이 있다.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며,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숭의여대 미디어문예장착과에서 시를 가르치다 정년하였으며, 현재 고향 군산에서 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4월호(통권 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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