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6] 군산 국제 문화마을에서
[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6] 군산 국제 문화마을에서
  • 강형철 (시인, 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
  • 승인 2021.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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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살펴보는 거울이다”라는 어떤 작가의 말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 거울의 의미를 즉물적으로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바람이 한 점도 없는 날 바다의 표면을 보면 그 표면은 매끄러운 ‘거대한 거울 하나’ 그 자체다. 그때는 밀물과 썰물이라는 만고불변의 큰 원칙도 모두 ‘바다 거울’ 속으로 깊게 들어가 흔적이 사라진다. 특히 그런 모습은 아침 햇살이 보이기 직전에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한쪽에 바람이 그 수면을 스쳐 불 때는 하나의 면에 얼룩처럼 둥그런 타원형의 물 주름이 생기기도 한다. 댓잎만 살랑여도 몸 둘 바를 몰랐던 이시영 시인의 시구(詩句)를 눈앞에서 실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짧다. 곧바로 다시 바다는 위대한 하나의 면이 된다.

  그런 순간은 해 질 무렵에도 어쩌다 조우할 수 있다. 그때에는 이 세계가 얼마나 고요한 곳인가를 확인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때는 시간도 어디론가 가고 없다. 어린 시절은 물론 성장기 혹은 젊은 시절의 어떤 특별한 순간이 느닷없이 환한 등불을 켜고 생의 그 싱싱했던 얼굴을 비춘다. 순간 자신의 생애를 지난 얼룩덜룩한 삶의 풍경과 지도들이 한꺼번에 뭉개지면서 모든 사람은 성과 속이 하나로 합쳐져있던, 아니 그렇게 분리되지 않았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되고 마침내 성인(聖人)이 된다.

 

  개펄이었던 곳 아니 바닷물이 거대하게 담겨있던 성스럽기초차 했던 곳에 나는 20대 중반 무렵 서 있었다. 그 어스름의 바다 앞에서 시를 써야겠다 서원했다. 또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고전적 도서, 그래서 그 의미도 모른 채 암기의 대상에서 벗어나 제목의 의미가 불행한 사람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뜻이 담긴 외국어라고 일러준 은사 최명관 교수님의 강의를 생각하며 내가 쓰는 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쳐져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만약 내가 글을 쓴다면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하던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이 지난 지 벌써 45년이 지났다. 그리고 내가 첫 시집 『해망동 일기』에 담았던 「아메리카 타운」이란 시들을 떠올리고, 나름 진정성을 다해 썼지만 의욕과 실제는 다른 것이어서 그 작품들의 어수룩함을 마주하며 몹시 부끄러워 바다로부터 황급히 도망친다.

  ‘아메리카 타운’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메리카 소도시란 의미다. 그러므로 내가 제목으로 쓴 아메리카 타운(America town)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어법에 맞게 표현하자면 아메리칸 타운(American town)이 맞다. 아메리카 타운은 아메리카라는 국가의 도시라는 뜻인데 그런 명칭이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제목으로 글을 쓰고 87년 유월항쟁의 와중에 쓴 시의 첫머리를 ‘아직도 나의 시 제목은 아메리카 타운’이라 썼다.

  이렇게 썼던 이유는 우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지만 그 이유의 뒷면에는 그곳은 이미 우리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 아니라 미국식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범람하는 곳이고, 그곳의 실제 주인은 이제 우리가 아니라 미국 혹은 미군이라는 인식이 주는 자포자기적 심정,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부정의식 혹은 ‘이것은 아니다’라는 저항감이 은밀하게 숨어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80년 광주 이후 우리의 분단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큰 축이었던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 사실과 그에 따른 필연적 결과물인 한국전쟁에 관한 인식의 심화 과정에서 생긴 역사의식이 배어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군산 아메리카 타운이 설립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절이다. 박정희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해 이국 땅에서 근무하는 미국 병사들의 휴식 혹은 유흥을 위해 특별한 구역을 정해 마치 미국내에서의 유흥문화를 즐기는 것과 같은 특별대우를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인천 동두천 오산 파주 평택 의정부 칠곡 등등의 많은 곳에 설치했다(《매거진 군산》 2011년 10월호 참조). 군산에는 주한미군 제8전투비행단-‘울프 택’이라 불리는 미 공군부대를 위한 특별구역에 세워졌다. 1969년 주식회사 옥구 아메리카 타운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전북 옥구군 미면(현 군산시 미성동)에 설치된 것인데, 기사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실세 군인 중의 한 사람인 박태하 대령의 조카가 1만여평의 땅을 사들여 타운을 세웠다고 한다(《경향신문》 2020년 8월 14일 기사).

  70년대에는 낮에도 장사를 하며 성업이었지만, 80년대 이후 이른바 국제화가 자연스러운 추세를 이루며 90년대 초반까지 1만여 명의 주민과 종업원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활황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박정희 정부 때인 1977년에는 ‘기지촌 정화대책’을 필두로 여러 규제와 단속들이 이어졌고 9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위축되기 시작하여 1천여 명이 거주하는 곳으로 변화했다(《경향신문》과 《전북도민일보》 기사 참조).

  어쨌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운영방침등이 생기고, 2000년대에 이르면 미군은 물론 한국인도 많이 드나드는 곳으로 개방되고 자연스럽게 젊은 학생들도 다양한 음악과 문화를 접하는 곳으로 인식 되어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 입맛도 체험하고 싶어서 드나드는 장소로 변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추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2010년에는 ‘아메리카 타운’을 ‘국제문화마을’로 개명하여 운영하였는데 초기에는 성업을 이루던 업소도 50여 개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2011년 이후에는미군들도 타운에만 가지 않고 일부는 평택이나 성환 등 외부로 가기도 하고, 또 군산 도심 특히 대학가 앞에도 드나들었다. 또한 시민들도 자유롭게 국제문화마을을 드나들면서 ‘타운 번회’에서는 새로운 방향의 타운 운영계획을 수립하였고, 그 한 예로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셔틀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메리카 타운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지 벌써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행정구역 명칭이 전북 옥구군 미면에서 전라북도 군산시 미성동으로 바뀌었고, 이름도 어찌 됐든 아메리카 타운에서 국제문화마을로 바뀌었다. 초기에는 미군을 위한 위락시설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지만, 이제는 주둔하는 미군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오고 내국인들도 다양한 문화체험의 장소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가 예전 그곳에 거주하며 성을 매매하던 여성들에게 부쳐왔던 ‘양색시’ ‘양공주’ 등등의 아픈 이름들이 사라지고 곳곳에는 영어나 외국어로 씌어진 클럽이 들어서고 음식점이 줄을 이어 성업을 이루는 곳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중반 내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보았던 시멘트 브로크 집들 마당과 거기의 빨랫줄에 널려있던 스물 대여섯 개의 눈부시던 팬티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때 불던 들판의 바람도 이젠 불지 않는다. 건물 외벽에는 영어로 번역되거나 표기된 음식들의 메뉴판이 걸려있고 이젠 대도시의 유흥가에서 볼 수 있던 간판들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도 세상의 보통풍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Covid-19로 인한 휴업안내판이 걸려 있기도 하고 관계 당국에서 붙인 것으로 보이는 영업 중지문이 문 앞에 X자로 붙어 있기도 하다. 내가 갔을 때는 대낮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거의 통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모든 곳이 다 그러할 터이지만 이제 다시 1960년대 소박한 들판과 야산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반세기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흥성했던 삶의 역사는 이제 어떤 식으로 변화될 수 있을지 누구도 알 수는 없다.

  나는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을 때 ‘자행거(自行車)’라고도 불리기도 했던 자전거를 타고 포장된 국제문화마을 길을 지나 들판 쪽으로 나아간다. 대로변의 논들은 큰 공장으로 변화하고 자동차들이 마구 달리고 있었지만, 들판 한구석에는 보리들이 패어 고개를 세운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속에 깜부기가 보리보다 더 자란 목을 빼고 으스대고, 예전에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사용되던 수로에는 여전히 부들이나 갈대들이 흐르는 물속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제 다시 옛날로 갈까? 가서 대지와 인간이 한몸이었던 시절로 갈 수 있는 것일까? 한때 광활한 들판을 책임졌던 넓은 수로가 이제는 조그마한 수로로 쪼그라들었다. 그렇지만 거기에 흐르는 물도 바다 못지않은 한 거울이라는 사실 또한 틀림없다.

 

 


강형철
1955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숭실대 철학과. 동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5년 『민중시』 2집에 『해망동 일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해망동 일기』『야트막한 사랑』『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환생』과 평론집으로 『시인의 길 사람의 길』『발효의 시학』 등이 있다.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숭의여대 미디어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다 정년하였으며, 현재 고향 군산에서 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6월호(통권 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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