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8] 선유도를 다시 이루어가는 사람들
[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8] 선유도를 다시 이루어가는 사람들
  • 강형철(시인)
  • 승인 2021.08.0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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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에 물들다〉 대표 임동준

  나에게 선유도는 너무 먼 곳이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이름의 섬 선유도(仙遊島)는 새만금 사업이 진행되면서 가까운 곳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먼 섬이다. 이전에 선유도 해수욕장에 다녀왔다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선유도란 지명을 강릉 경포대나 낙산 해수욕장의 이름처럼 아련한 곳으로 여겼다. 지리적으로 먼 곳이 아닌 곳에 나는 살고 있었지만 해수욕장이란 곳에 별로 가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무관한 곳이라는 인식이 거기에 개입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선유도는 이곳 군산에서도 배를 타고 두어 시간 가야 도달하는 곳이기도 했다.

  군산에 돌아와 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나는 이곳을 중심으로 글을 쓰면서 선유도에 대해서도 글을 쓰고 싶어 두어 번 갔다가 포기했던 것은 정직하게 말하면 선유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 중에 새만금 사업 반대투쟁을 했던 어른들이나 친구들의 절망을 지금도 잊지 못하였던 까닭도 있다.

  그러던 차에 최근 국립 한국문학관 사무국장 직에서 정년퇴직을 하면서 50여 년의 서울 생활을 일단 종결한 정우영 시인이 느닷없이 내게 방문했고, 게다가 그의 동생이 나를 데려가기 위해 차까지 가져오는 바람에 엉겁결에 선유도에 다녀오게 되었다. 비응항을 지날 즈음에는 비응도 해수욕장에 관한 채만식의 산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허망한 이야기도 했다. 차는 어느덧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를 거쳐 덥석 선유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만금 방조제를 지나다보면 어떻게 이 창창한 바다를 가로질러 부안까지 댐을 쌓고 그 안에 농지를 만들고 공장 부지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일을 이렇게 해냈는지 생각하며 경탄하기도 한다. 부안 쪽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볼 수 있는 서해 바다는 그야말로 장엄하다. 어쩌다 차에서 내려 굽이쳐오는 파도를 마주하다 보면 사업중단을 요구하며 이곳에서 청와대까지 삼보일배를 하면서 처절하게 투쟁했던 모습의 깊은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한심한 현실 순응주의자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 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기도 한다. 머리로는 “’개발‘은 마치 낡아빠진 유토피아처럼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하나의 ‘좀비’”라는 볼프강 작스의 말을 옳다고 동의하면서도 대규모 개발사업의 명분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업에 감탄하고 있는 일종의 분열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선유도에 들어섰으나 해수욕장이 이미 개장되어 사람들이 바닷물과 함께 노니는 모습을 보며 세계는 참으로 깊고 넓다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야미도 지나며 보이던 선유도의 최고봉인 망주봉 쪽으로 다가서니 예전에는 정비되어있지 않은 길들이 차량통행에 지장이 없을 만큼 잘 뚫려있었다. 선유도에서 내가 아는 곳은 망주봉 뒤쪽에 자리한 <선유도에 물들다>라는 카페다. 이곳을 소개해준 사람은 사찰음식을 바탕으로 대중음식점을 하다가 최근에는 퓨전 한식 중심으로 바꾸어 군산 맛집의 하나로 정착한 <모산방> 이성환 대표와 그의 부인 오복희 시인이다.

  소개의 말은, 이곳 카페와 펜션 운영자인 임동준 대표는 단순한 카페 운영자가 아니고 선유도의 역사에 해박하고 선유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웃들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문화운동가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이곳 선유도 출신이면서 외지에 나가 사업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진정한 삶의 자리를 모색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지난 호에 소개한 <마리서사>의 임현주 대표가 타향인데도 삶의 자리를 고향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면, 임동준 대표는 고향의 땅에서 새롭게 고향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만나고 싶었다.

  건너편으로 무녀도가 보이는 해변가에 임 대표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변 쪽을 향해 정박한 배는, 바닷물이 빠져 있었지만 육지에 닿아있는 밧줄에 오후의 햇살이 깃들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참 아름다운 곳에서 열심히 산다는 나의 말에 그는 지금의 풍경보다 해 질 무렵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며 거기에 더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참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우선 편안함을 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가 들려준 얘기들, 그리고 그가 기고한 잡지나 신문에 기고한 글을 요약해 정리한다.

  <선유도에 물들다>의 임동준 대표는 선유도 토박이다. 선산에 12구가 넘는 묘가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일가가 이곳에 정착한 지 3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곳 망주봉 뒤의 새터 마을에서 1970년대 초 집을 지어 살며 3~4척의 배로 어업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살았다. 당시 배를 만드는 목수들, 그리고 일반 목수들과 함께 선유도산에서 구한 나무로 지붕 서까래 대들보와 마루를 껴맞추기 기법으로 집을 지었다. 아버지는 어촌계장과 이장으로 활동하다가 90년대 초에 김 가공 사업을 하러 부안으로 떠나면서 할머니께서 군산에 있는 집과 이 집을 다니면서 사셨는데, 그러다가 할머니가 2001년 돌아가셨고 그 이후 집은 20여 년 가까이 빈집으로 남겨져 있었다.

  임 대표는 예전에 평범한 섬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군산에 나가 학교에 다녔고, 병원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하고 대학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수산물 유통업에 종사하기도 하다가 2018년에 섬으로 돌아왔다. 그는 할아버지가 지었던 본채와 사랑채를 리모델링하여 펜션과 카페를 열었다. 예전의 사람살이에 적합하게 지어진 집의 골조는 유지하고 사람들이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내부의 시설은 간소화하면서도 품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바꾸어 시공하였다.

  카페로 쓰는 건물의 외벽은 시멘트 브로크였는데, 브로크를 이루고 있는 모래 사이에 잘게 부서져 있는 조개껍질이나 소라껍질 등이 설핏 보였다. 그는 그런 것들이 선유도의 실체라고 생각되어 일부러 살렸다는 말도 했다. 카페의 탁자 중 하나는 바다 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폐선에서 얻은 삼나무를 건조시켜 다듬고 칠을 해서 만든 것이라며 웃었다. 잘 다듬어졌고 나무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선유도와 무녀도 신시도 등의 주민들과 함께 고군산 역사문화 동아리를 조직하여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선유도주민통합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다. 2020년 10월부터 11월까지 5회에 걸쳐 전문가의 강좌를 개최하기도 했다. ‘섬의 문화적 가치’, ‘살고 싶은 섬, 가고 싶은 섬’, ‘섬 역사와 문화’, ‘고고학으로 본 군산도’, ‘역사문화 이야기를 활용한 섬 관광’ 등의 주제로 강좌가 진행되었다.

  그는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이곳 고군산 지역의 역사도 공부하며 같이 공유하고 그 역사 속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문화유산도 이해하면서 이곳 선유도가 잠시 들렀다가 가는 일회용 관광지가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체감하면서 자연스레 힐링센터가 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물론 자신이 운영하는 업소 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들도 그런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유도 일대 섬들은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고군산군도의 모습이 그려져 그 존재를 드러냈지만, 조선조 정조실록에는 이곳 선유도 신시도 무녀도 장자도 등에 3000여 명이 거주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김중규, 『군산 답사 여행의 길잡이』) 고군산은 예전에는 김제 만경현에 속해 있다가 1899년 군산이 항구로 개항하면서 일제 식민지 기간을 거치면서 옥구군에 편입되었고, 1995년 도농복합형 군산시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어떤 지역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섬 선유도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의연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수명을 다해 스러져 가고 떠났지만 근래의 선유도는 인근의 신시도나 무녀도 장자도 등과 함께 그리고 그곳에 연고를 둔 사람들과 더불어 새만금 시대 새로운 관광사업의 주역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변할 것이 있을 것이다.

  임동준 대표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나는 '우리들은 고향을 떠나면서 비로소 고향을 얻는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은 언제나 배반을 전제로 생명을 키운다고도 할 수 있다.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근대 이후 우리들은 태어난 곳에서 끊임없이 이탈당하여 자신의 삶을 살도록 강제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귀향해서 살게 될 때 그의 고향에는 타향이 스미게 되어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큼 고향은 새로워진다.

  임동준 대표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세우고 이루어갈 또 다른 선유도, 그곳에 사람들끼리 우애와 환대 속에서 사는 삶이 깃들고, 방문하는사람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아로새겨지는 명소가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강형철
1955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숭실대 철학과. 동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5년 『민중시』 2집에 『해망동 일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해망동 일기』『야트막한 사랑』『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환생』과 평론집으로 『시인의 길 사람의 길』『발효의 시학』 등이 있다.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숭의여대 미디어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다 정년하였으며, 현재 고향 군산에서 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8월호(통권 8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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