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플럭서스Fluxus, 자유로운 영혼들: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 & 백남준 작가
[미술관 탐방] 플럭서스Fluxus, 자유로운 영혼들: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 & 백남준 작가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05.26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릴 적, 태어나자마자 접한 텔레비전은 신기한 요술 상자였다. 조그마한 네모상자는 사람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이 있고 소리가 들린다는 자체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골 마을에 텔레비전이 유일하게 있던 집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북적이기 일쑤였다. 드라마나 코미디로 울고 웃고, 사건 사고 뉴스에 분노하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고, 운동경기 응원으로 한마음 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접하는 세대라면, 필자는 텔레비전 세대이자 비디오카메라 세대이다. 텔레비전을 시청만 하고 비디오카메라로 찍을 줄만 알았지 이런 것을 이용하여 예술 혹은 미술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역발상으로 ‘비디오 아트(video art)’를 창시한 분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적인 작가 백남준(1932-2006)이다.

  백남준 작가는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생전에 국제적으로 예술 활동을 했기에 세계 유명 미술관이나 웬만한 갤러리에 가면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디오 설치작품을 보면 “아! 백남준 작품이다”라고 할 만큼 다들 잘 알고 있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기술을 사용한 예술 형식으로, 예술가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감정, 예술적인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비디오 매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지금은 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즉 비디오 아트는 텔레비전을 붓이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비디오테이프나 전파를 조정하여 표현한 예술이라 보면 된다.

  1965년 당시 플럭서스(Fluxus) 예술가였던 백남준이 소니의 최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사용하여 최초의 비디오 작품을 제작·상영한 것이 비디오 아트의 시초가 되었으며, 그 후 비디오 아트는 ‘움직이는 전자회화’라는 애칭으로 국제적으로 확대되고 현재는 수많은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렇듯,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개척하고 현대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 백남준의 업적을 한곳에 담아내자는 소망을 담아 2008년에 개관한 미술관이 바로 경기도용인시에 위치한 백남준아트센터이다. 이곳은 흩어져 있던 그의 작품들을 한곳에 모아 지속 가능하게 보존하는 공간이자 시대를 앞서간 백남준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미술관 측은 백남준 작가가 바랐던 ‘오래 사는 집’을 구현하기 위해 그의 사상과 예술 활동에 대한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연구를 발전시키는 한편, 이를 실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아트센터 건물을 앞쪽 정면에서 봤을 땐 네모난 거울들이 모자이크처럼 길게 늘어선 일자형으로만 보여 단조롭고 심심한 느낌이 들었는데, 건물 뒤쪽은 건물 옆 옹벽과 나란히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어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한다. 더군다나 아트센터 뒤쪽은 경기도 어린이박물관으로 넘어가는 구릉지역으로 위쪽에서 내려다보니 건물 전체 모양을 파악할 수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건물은 백남준의 이니셜인 ‘P’자 형태와 백남준 작가가 처음 음악을 접할 때 연주한 그랜드 피아노 형태를 보여준다고 한다. 또한 건축물은 젊은 독일 건축가인 키르스텐 쉐멜(Kirsten Schemel)이 세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선정된 설계로 마리나 스탄코비치(Marina Stankovic)와 공동으로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지상 3층과 지하 2층으로 구성된 아트센터는 외벽이 여러 겹의 거울들로 이루어져 있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고 안에서는 밖이 훤히 보이는 구조이며, 1층과 2층이 전시공간과 함께 대중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층 출입구를 바로 통과하면 왼쪽이 로비이자 주전시실인 백남준 전시실이 있고 안내 데스크를 돌아 오른쪽으로 가면 도서관과 카페가 있다. 좌우 양방향으로 쭉쭉 뻗은 내부 구조이며, 백남준전시실은 현재 《웃어》전이 진행 중이다.

  《웃어》전은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예술 제도에 도전한 플럭서스와 백남준을 유머의 관점에서 조망하기 위해 기획한 전시이다. 플럭서스는 ‘유출,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 플럭스(flux)에서 유래한 말로 기존의 문화 및 예술의 상투성·진부성에서 탈피하겠다는 의도에서 형성된 예술단체이다. 이 단체는 1960년대 초 독일에서 시작하여 뉴욕에서 국제적으로 확산이 된 이벤트 중심의 반예술적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당시 고급화되고 규격화된 예술에 도전하거나 기존 예술 형식에 대항하는 양상으로 전개된 종합예술형식이다. 그러니까 음악가, 화가, 시인, 무용가,영화작가, 전시기획자, 연기자 등을 통해 예술의 전 분야에 걸쳐서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으며, 이들의 예술은 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펼쳐졌는데 그 소재에서부터 형식까지 자발적인 참여와 즉흥적 해프닝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플럭서스는 훗날 백남준이 퍼포먼스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비디오 아트로 출발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활동그룹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 진행 중인 《웃어》전은 플럭서스를 통해 백남준을 바라본다고 한다.

  전시는 플럭서스 그룹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쟝피에르 빌헬름를 추모하는 백남준의 퍼포먼스 사진부터 시작하여 〈반격의 연주〉, 〈도발하는 연대들〉, 〈어쩌다 예술〉, 〈일상의 파격〉, 〈플럭서스 전설들〉 등의 소주제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으며, 기록사진과 영상을 통해 당시의 백남준과 플럭서스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반격의 연주〉에서는 백남준이 새로운 방식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작곡하고, 연주함으로써 음악과 미술, 예술과 일상의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과감하고 유머러스하게 실행한 퍼포먼스 공연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여준다. 〈도발하는 연대들〉은 오브제의 작품보다 참여자의 기여와 과정에 초점을 두고 실험적 공연의 형식이 중심이 되어 유연하게 움직이는 작가들의 연대로, 1961년  쾰른에서 열린 일종의 전위연극과도 같았던 《오리기날레》와 1962년 《플럭서스 국제신음악 페스티벌》에서 백남준이 머리와 넥타이에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사진들이 전시 중이다. 또한 플럭서스는 우편과 여행을 통한 작품과 정보의 교환으로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는데, 이들은 전시회와 강연회 그리고 각종 선언문과 출판물, 조형물과 오브제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그래서 〈어쩌다 예술〉, 〈일상의 파격〉에서는 신문, 잡지, 책,우편물도 예술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게임이나 지시문, 키트, 우편, 신문, 책,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플럭서스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으며 작품 안에 숨겨진 유머코드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플럭서스 전설들: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조지 머추너스, 샬롯 무어먼》에 등장하는 이들은 오늘날의 백남준을 있게 한 사람들이다. 특히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와 '플럭서스 운동'을 이끈 요셉 보이스는 백남준이 행위 예술가로 성장하고 비디오 아트의 저변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었던 예술가이다.

  “존 케이지(1912~1992)가 완전히 성공하기 전에, 요셉 보이스(1921~1986)가 거의 무명일 때 나는 이들을 만났다. 동지로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기에 동등하게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커다란 행운이었다.”

  백남준은 생전에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퍼포먼스 공연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보내며: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의 제목만 봐도 존 케이지에 대한 존경심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퍼포먼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는 공연 도중에 무대에서 내려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행했다.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 행동은 일반적 상식으로 보면 무례한 짓이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물의 용도를 다양하게 확장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백남준은 “피아노는 연주할 수도 있지만 부술 수도 있다. 마찬가지다. 넥타이는 맬 수도 있지만 자를 수도 있다”고 말하며, 이것은 존 케이지 음악적 관점에 백남준식의 유머가 더해진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1990년에는 평생의 친구였던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기 위해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백남준이 추모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를 선보이고, 보이스가 즐겨 쓰던 중절모를 시멘트로 16개 제작하기도 했다.

  조지 머추너스는 플럭서스의 창시자이자 ‘플럭서스’라는 명칭을 사용한 예술가이다. 1964년에는 작가들이 만든 이벤트 스코어나 오브제를 작은 상자에 담아 일종의 게임 키트처럼 제작하는 ‘플럭서스 키트’를 창안했으며,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플럭서스 상점을 열어 플럭서스 활동을 한 작가들이 제작한 물품을 판매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샬롯 무어먼은 백남준이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의 예술적 동반자이며, 클래식 음악의 정형화된 틀을 깨는 실험 음악적 공연과 해프닝을 통한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그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예술가이다. 특히 백남준의 스코어 〈생상스 테마 변주곡〉(1964)에서 샬롯 무어먼이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연주하다가 물이 담긴 드럼통에 들어갔다 나와 온몸이 젖은 채로 연주를 마치는 퍼포먼스 공연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시청각적 인상을 남겼다. 그 후로도 샬롯 무어먼은 백남준과 함께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TV첼로’, ‘TV침대’ 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 활동을 전개했다.

  〈플럭서스 전설들〉은 백남준과 이들이 함께한 퍼포먼스 공연들이 사진이나 증거물의 흔적들로 지금 전시실에 전시되어있으며, 《웃어》전은 백남준이 참여한 플럭서스 그룹의 기록관이자 박물관이다.

  지금 전시에서 보듯,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이벤트적인 예술 활동은 일반 관람객들이 보기엔 ‘도대체 뭐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플럭서스는 당시에도 특정한 양식과 미적 기준이 없고 규율이 없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어,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누군가의 지적처럼 “정신 나간 인간들”이라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로버트 와츠가 “플럭서스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어딜 가든지 플럭서스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하는 점이나, 딕 하킨스의 “플럭서스는 자신이 이름을 갖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말처럼 이해하고 추리하려 하기보다는 공연자의 몸짓이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받아주고, 공유해주는 것이 플럭서스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며, 일상생활 속의 우리 모습이 바로 ‘플럭서스’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주전시실 외에도 백남준을 대표하는 비디오 설치작품 〈TV정원〉과 〈TV물고기/비디오 물고기〉가 로비와 통로에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다양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매년 2~3회의 기획전시가 열리는데, 지금은 《전술들》이라는 주제로 전시중이다. 또 2층에는 백남준 작가의 뉴욕 브룸 스트리트에 위치했던 작업실을 재현한 아카이브 컬렉션인 〈메모라빌리아〉가 상설 전시되어 있어 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보면 새로운 사조의 등장으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피카소의 입체적인 그림이 후기인상주의 계보를 뒤집어 놓고, 칸딘스키가 점·선·면으로 형상이 없는 추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으며,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세상에 들고 나와 미술작품으로 등장시켜 다다이즘을 창출하였듯이, 백남준 역시 TV모니터를 선택하여 실험적 예술방식으로 예술의 대중화를 외치면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를 개척하였다.

  비디오 아트는 하나의 예술적 방법으로서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비디오 아트의 예술형태에 대한 생각은 “꼴라쥬 기법이 유화 물감을 대신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하리라”라는 백남준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백남준은 플럭서스 활동을 통해 관객과 상호 소통하는 참여예술을 지향하였고, 비디오 설치작품으로 영상에 나타난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의 유도를 이끌었다. 또한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실험적이고 창의적으로 작업했던 그는 예술가의 역할이 미래에 대한 사유에 있다고 보았으며 지금도 가장 “현대적인 예술가”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출처
백남준 아트센터 https://njp.ggcf.kr/
『플럭서스』, 르네블록, 전경희 옮김, 열화당, 1990
『현대미술사전』, 안연희 엮음, 미진사, 1999
《월간미술》, 「플럭서스-미술사의 테러리즘」 중에서, 2001년 11월호

 

* 《쿨투라》 2021년 6월호(통권 84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