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기행] 유럽의 작은 성, 룩셈부르크
[도시 기행] 유럽의 작은 성, 룩셈부르크
  • 설재원(본지 에디터)
  • 승인 2022.03.0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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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 사무국과 룩셈부르크 필하모니 사이로 보이는 신시가지 모습
유럽의회 사무국과 룩셈부르크 필하모니 사이로 보이는 신시가지 모습

스트라스부르에서 세 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수도, 룩셈부르크의 첫인상은 1인당 GDP 세계 1위 국가답게 깔끔하고 현대적이었다. 신시가지에 들어서자 신전 느낌의 새하얀 기둥을 자랑하는 필하모니 룩셈부르크가 환하게 나를 맞았다.

유럽의회 사무국
유럽의회 사무국

현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신시가지

룩셈부르크 신시가지에 위치한 필하모니 룩셈부르크의 정식 명칭은 그란데-듀체스 조세핀 카롯 콘서트 홀로 1995년 룩셈부르크가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되며 계획된 콘서트홀이다. 직전 해인 1994년에 프리츠커상을 수상했고 한국에서는 청담동에 있는 하우스 오브 디올의 설계를 맡은 것으로도 유명한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의 진두지휘 아래 세워진 필하모니 룩셈부르크는 2005년 준공된 이후 지금까지 룩셈부르크의 문화력을 상징하고 있다. 도시마다 하나쯤은 있는 대형 LUXEMBOURG 조형물 역시 이곳에 있다. 아쉽게도 내가 방문했던 21년 10월은 코로나19로 인해 문을 닫은 상태였다.

로베르 슈만 동판
로베르 슈만 동판

룩셈부르크 필하모니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로 유럽의회 사무국에 다다른다. 유럽의회 전체 직원 4,500명 중 3,500명이 근무하고 있는 유럽의회 사무국은, ‘유럽의 아버지’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의 이름을 따 ‘슈만 빌딩’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입구로 들어가면 좌측 벽면에 ‘초대 유럽의회 의장(의원 총회 의장)’이라는 설명과 함께 커다란 슈만의 동판이 자리하고 있다. 룩셈부르크 태생의 프랑스 행정가 슈만은 그가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던 1950년 5월 9일에 유럽의 석탄과 철강을 공동 관리하자는 슈만 선언을 발표하며 유럽석탄철강공동체ESCS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공동체EC를 거쳐 현재의 유럽연합EU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로베르 슈만처럼 프랑스식 이름과 독일식 성 조합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게 룩셈부르크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기도 하다.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유럽의회 사무국 뒤편에 있는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Grand-Duc Jean (무담 현대미술관) 역시 신시가지에서 놓쳐서는 안 될 명소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석재와 유리의 조화가 아름다운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은 루브르박물관의 유리피라미드를 설계한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하였고, 내부에서는 현대미술의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는 힙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미술관 뒤에는 탑 꼭대기가 도토리를 닮은 튕겐Thüngen 요새가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성곽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주 아름답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둑한 시간이 됐고, 야경을 보기 위해 구시가지로 넘어갔다.

구시가지 진입
구시가지 진입

자유와 저항, 헌법 광장

황금여신상
황금여신상

신시가지를 빠져나와 가파른 오르막을 타고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구시가지에 도착한다. 가장 먼저 황금여신상이 있는 헌법 광장을 찾았다. 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1923년 설립된 황금여신상은 ‘자유와 저항’이라는 룩셈부르크의 국가 정신을 상징한다. 황금여신상 하단 글귀 마지막 부분에는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다. 바로 한국전쟁 파병Campagne de Corée이다.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룩셈부르크는 2차 세계대전에서 또다시 독일에 의해 점령당한다. 이후 연합국에 의해 나라를 되찾는데, 세계대전을 거치며 중립국의 한계를 절감한 룩셈부르크는 1945년 영세 중립을 포기하고 NATO에 가입한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겪은 아픔과 연합국에 대한 고마움을 모두 갖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두 차례에 걸쳐 총 89명의 군인을 파병한다. 작은 규모로 보이지만 룩셈부르크 전 병력의 10퍼센트 가량을 파병한 셈으로 UN 파병국 중 가장 높은 비율이며, 2명의 전사자와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파병 전력 중 사상자의 비율 또한 가장 높다. 룩셈부르크 군은 금굴산 전투, 학당리 전투 등의 임진강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국내에도 이들을 기념하는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비가 동두천에 있다.

헌법 광장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아돌프다리를 감상하기 아주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건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아치교였던 아돌프다리의 웅장한 모습과, 다리를 둘러싼 숲과 강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헌법광장의 맞은편에는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룩셈부르크 노트르담 대성당이 위치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성당 격인 룩셈부르크의 주교좌성당cathedral으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 세 개의 첨탑을 자랑한다. 성당 내부는 화려한 실내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으며, 대공 가족이나 룩셈부르크 주요 인사의 결혼 및 장례 장소로 쓰이고 있다. 성당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예수회에서 세운 국립도서관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Wikimedia
노트르담 대성당 ⓒWikimedia

유럽의 작은 성

본격적으로 들어간 구시가지는 같은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시가지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룩셈부르크는 ‘작은 성’을 의미하는 ‘레제부르크’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를 보자 그 말이 바로 이해됐다. 지정학적 위치로 항상 크고 작은 분쟁 틈에 껴 있었기에 룩셈부르크는 늘 파괴와 보수가 반복되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요새 도시를 구축했다. 구시가지와 요새는 전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지금까지도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신시가지에는 높은 건물들 사이로 넓은 도로가 쭉쭉 뻗어 있었다면, 이곳은 더 낮고 클래식한 건물들 사이로 유럽하면 떠오르는 돌바닥이 깔려 있었다. 그래도 길 폭이 넓고, 차량 통제 구역이 많아 걸어 다니기는 편했다.

기욤 2세 기마상
기욤 2세 기마상

먼저 시청 옆에 있는 기욤 2세 광장을 찾았다. 여느 유럽의 구시가지와 마찬가지로, 룩셈부르크 역시 기욤 2세 광장을 중심으로 문화가 꽃피었다. 널찍한 광장은 무려 13세기에 만들어졌고, 지금도 주말마다 마켓이 열리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이곳이 공사중이라 약간은 휑하다 싶은 느낌도 있었다. 광장을 상징하는 기욤 2세 기마상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랜드 두칼 궁전Palais Grand-Ducal이 나온다. 그랜드 두칼 궁전은 시청사를 개조하여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고, 앙리 대공이 이곳에서 집무를 볼 때면 국기가 게양된다. 유럽의 다른 궁전들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2시간마다 진행되는 근위병 교대식과 여름 시즌에 오픈하는 가이드 투어는 인기만점 관광요소이다.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졌을 때, 룩셈부르크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슈망 드 라 꼬니슈Chemin de la Corniche 이동했다. 구시가지의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이 산책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코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밤이라 사진에 다 담아낼 수 없었지만 이곳의 야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절경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지켜내기 위해 높고 견고한 요새를 쌓아 올린 건 아니었을까. 성채를 따라 걸으며 그렇게 룩셈부르크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슈망 드 라 꼬니슈
슈망 드 라 꼬니슈
슈망 드 라 꼬니슈
슈망 드 라 꼬니슈
슈망 드 라 꼬니슈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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