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쿨투라 어워즈] 오늘의 시 수상자 「여름 판타지의」 하재연 시인
[2024 쿨투라 어워즈] 오늘의 시 수상자 「여름 판타지의」 하재연 시인
  • 하재연(시인)
  • 승인 2024.01.30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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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판타지

하재연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
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시작되는 대본을 쓰는
창밖으로는 눈이 쏟아진다 클리셰가 난무하는
장르 드라마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열려 있는
창문틀이 육체처럼 삐걱거리고 있다
나의 시간들이 새어나가고 있다

기화하는 탄산에게 사로잡힌
탄산수의 나머지 심정으로

종반부가 다가온다
지면을 덮는다
흰 백지와 같이 절대적으로

이십 년 후의 네가 이상하게 아름다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가며
결말을 준비하고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여름의 파도소리는 시작된다

지구의 건너편 반구에서부터
기억처럼 도래하는 방식으로

- 《청색종이》 2023 여름호

 


시작 메모

이 삶을 다시 살 수 있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헛되고 쓸모없는 상상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아픔의 감각마저 사라진다면, 그건 이곳의 삶이 아닐 것이다. 시간 여행자로서, 나와 같이 생긴 젊은 ‘나’를 바라보는 나로서도 그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쓰이고 있는 삶 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후에서야 시작되는 계절, 그것이 있을 거라는 또 다른 환상.

 

사진 Joinki ©Korean Literature Now, LTI Korea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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