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쿨투라 어워즈] 부동산 공화국의 아비투스, 우리 안의 ‘괴물성’: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4 쿨투라 어워즈] 부동산 공화국의 아비투스, 우리 안의 ‘괴물성’: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 안숭범(영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 승인 2024.01.3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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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Cultura Awards 오늘의 영화평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부동산 공화국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불온한 욕망이 그린 지옥도다. 초월적 재난이후 밝혀지는 것은, 서울 아파트를 둘러싸고 우리가 품어온 불편한 ‘아비투스habitus’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산증식에 관한 단단한 맹신으로 높아진 서울아파트를 모두 무너뜨리며 출발한다. 대지진과 한파가 동시에 들이닥치자,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로 변한 아파트 더미 속에서 인간들은 잿빛 묵시록을 써 내려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콘크리트 상품(아파트)에 저당 잡혀 살아온 시절의 고단한 관성에 아직 시달리고 있다.

한국인에게 아파트의 위치, 평형, 주거 형태는 서로의 신분을 가늠하는 결정적 잣대다. 특히 입지 좋은 아파트는 ‘사는living 곳’이기 전에 ‘사는buying 것’으로 전환된 지 오래다. 부동산 시장의 상황과 무관하게 ‘하우스 푸어’와 ‘벼락 거지’ 사이에 압착 당한 이들은 서로에게 불행을 전가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뉴스릴처럼 펼쳐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그러한 불행이 오랜 세월 적층되어 왔음을 증언한다. 늘어나는 서울 아파트 층수와 평수, 상승하는 매매 가격, 비정상적인 분양 열기 등은 통제되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의 자가 진화 과정을 환기시킨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서울은 계속 과밀화되었고 아파트를 향한 우리의 과잉 욕망은 제어되지 않았다.

따라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문법을 준용한 건, 전략적이고 당위적이다. 영화 속 재난은 이미 우리 안에 잠재되어온 문제의 계기와 기원을 폭로하는 효과적인 촉매다. 이 글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주인공 영탁의 상징적 위치를 살펴 보면서 아파트를 향한 ‘과잉욕망’ 속에 잠복해 있던 우리의 괴물성을 살펴보려 한다. 황궁아파트를 두고 펼쳐지는 ‘정체성 정치identitypolitics’의 장은 서로의 ‘괴물성’이 충돌하는 현실적인 무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당신은 영탁이(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건물, 황궁아파트 103동을 배경으로 한다. 낡고 오래된 이 복도식 아파트는 처절한 생존 경쟁의 풍경을 전시한다. 그리고 목숨이 오가는 갈등과 긴장의 한복판에 영탁이 있다. 그는 부동산 공화국을 지탱하는 신화, 곧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상상적 논리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은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는 모세범이라는 본명으로 택시를 운전하며 살고 있었다. 영화 속 정보를 종합하면, 그는 시장가보다 싸게 급매로 나온 황궁아파트 103동 902호를 구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기 매물이었고, 모세범은 전 재산을 날리고 만다. 이미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가장의 권위를 잃어왔던 그는, 사기를 당한 후 삶의 의미를 박탈당한다.

그에게 황궁아파트 103동 902호를 소유한다는 건, 실추된 정체감을 되찾고 사회와 가정에서 자기 입지를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범은 실제 902호 소유자였던 영탁 등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걸 알게 된 후, 영탁을 찾아가 살해하고, ‘가짜 영탁’이 된다. 아파트에 농락당한 자(세범)가 아파트로 농락한 자(영탁)의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상징적·사회적 지위를 탈취한 것이다. 결국 세범이 영탁이 된 사건은, ‘가해/피해’의 경계가 끊임없이 유동하는 부동산 시장의 교란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울 아파트에 대한 허구적인 기호 가치가 소실된 시점에 이미 예고된 사고들 중 극단적 사례에 해당한다.

신분을 영탁으로 세탁한 이후, 그는 어울리지 않는 양면적 성격을 한 몸에 지닌 괴물이 되어, 반영웅으로 거듭난다. 서사적으로만 보면, 그는 차악과 최악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연민과 동정을 이끌어 내는 몇몇 정보를 안고 있는 반영웅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입체적 성격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관점은, 아파트를 향한 한국인의 과잉 욕망이 빚어낸 괴물로 보는 것이다. 그가 대출금의 힘으로 순조롭게 902호의 주인이 되었다면 그는 ‘하우스 푸어’였을 것이다. 사기를 당한 후 펼쳐진 절망적 상황을 감내하려 했다면 그는 극단적인 ‘벼락 거지’의 삶을 견뎌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하우스 푸어’의 불행과 ‘벼락 거지’의 불안이 사회적 충돌을 야기하는 자리에서 태어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몇몇 장면 중 백미는 그가 ‘가짜 영탁’ 곧 살인을 저지른 세범이라는 사실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신이다. 그 신이 삽입되기 직전, 그는 황궁아파트 주민 회식 장면에서 윤수일의 〈아파트〉를 열창한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라는 후렴구는 의미심장하다. 황궁아파트의 밤을 찌르며 반복되는 그 노랫말은, 영탁과 그곳 주민들이 망각하거나 지연하고자 했던 ‘실재의 순간’을 데려다 놓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당신은 바퀴벌레(가 아니)다

영탁이 차악과 최악 사이를 오가는 괴물이 된 계기는, 폭력적인 ‘구별짓기’의 장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면서부터다. 그의 흑백논리에 따라 황궁아파트 103동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별적으로 규정된다. 그곳에서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입주민뿐이다. 외부인은 추방하거나 처단해야 할 바퀴벌레다. 이러한 차별적 질서는 부동산 공화국이 발명한 서열화된 주거 형태와 분화된 계급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결과다. 이러한 갈등적 ‘구별짓기’는 영화 초반, 황궁아파트 주민회의 때부터 등장했던 바 있다. 외부인의 ‘추방/허용’을 결정하던 주민회의 신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때 주민들은 검은 바둑알(허용)과 흰 바둑알(추방)로 자기 의사를 표현해야 했다. 이 장면은 주민과 바퀴벌레, 혹은 생존과 죽음을 나누는 ‘빗금(/)’의 폭력성을 시사한다. 오로지 영탁만이 그 ‘빗금’ 위에서 추방의 주체이면서 추방의 대상이기도 한 기이한 정체성을 은폐하고 살아간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가장 현실적인 ‘구별짓기’ 장면은 또 다른 인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황궁아파트 주민회의 도중 한 입주민은 황궁아파트로 이주하기까지의 개인사를 늘어놓는다. 그는 육교 너머 저편에서 빌라 세입자로 살았던 적이 있다. 그에게 황궁아파트는 더 나은 계급으로 편입된 증거이며, 무려 23년이 걸린 결실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지난한 개인사를 근거로, 입주민이 아닌 사람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 아파트를 자가 소유한다는 게, 특권적 보상이거나 차별적 성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부동산 공화국 신화에 의해 탄생한 괴물성이 우리의 지근거리에 편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결과적으로 영탁이 강화해가는 ‘구별짓기’의 질서는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몫이 없는 자’(기욤 르블랑)를 향한 폭력적 타자화를 정당한 것으로 용인하는 힘이 된다.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은 그러한 차별적 신념을 현실에서 실천하며 우월적인 자기 신분을 확인받으려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대지진으로 나타난 예외상황 속에서 ‘구별짓기’의 장이 탄생했다고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점이다. 거주 수준 및 입지에 의해 발생하는 낙차(빌라/황궁아파트/드림팰리스)와 거주형태(세입자/임대인) 사이의 위계는 이미 선재하고 있었다. 현실을 쏙 빼닮은 그러한 위계 안에 집단적 폭력성과 개인의 괴물성이 이미 잠재되어 있다는 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주민/외부인’을 구분하는 힘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이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장을 작동시키며 이웃을 예정된 죽음의 공간으로 추방하는 논리를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에게 당장 유익한 원칙이 타자의 실존을 지우는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은,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를 성찰하는 데 유의미한 관점이 될 수 있다. 오늘도 한국인은 초월적인 재난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부동산 불패 신화의 부작용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꿈에 질식되기 전,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길 희망한다.

 


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소장.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한 바 있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콘텐츠를 비교문화학적 시선에서 연구하고 있다.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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