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쿨투라 어워즈] 밀려오는 시의 물결이 되어
[2024 쿨투라 어워즈] 밀려오는 시의 물결이 되어
  • 소유정(문학평론가)
  • 승인 2024.01.30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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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오늘의 시 「여름 판타지의」 하재연 시인 인터뷰

인터뷰어 소유정(문학평론가)
일시 2024년 1월 13일
사진 김한솔
장소 카페 좋아진다

가끔은 아주 이상하고도 선연한 감각에 휩싸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새해가 된 지 한 달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지난 해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거나 한참이나 지나버 린 시간의 기억들이 문득 낯선 얼굴로 끈질기게 따라붙는다거나 하는. 대부분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이 감각은 때때로 시차를 두고 우리를 찾아온다. 지난 날의 나인 것 같지만 과거의 나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어느 시간의 나를 보며 한 사람에게 만들어지는 어떤 틈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물건이나 기계의 연결부가 꼭 들어맞지 않아 유격이 생기듯 사람에게도 틈이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유효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주 멀리서 도착하는 나 자신처럼 나와 나 사이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하재연의 시는 이 미세한 틈을 면밀히 들여본다. 말하는 이가 감각하는 나와 나 사이의 시차는 겨울에 여름을 떠올리고, 지구 반대편의 계절을 상상하는 것처럼 멀지만 밀려오는 파도의 물결처럼 단번에 눈앞에 놓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발 끝에 닿아 나를 부르는 이 물결의 언어에 대해 하재연 시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소유정 안녕하세요, 축하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어 기쁜 마음입니다. ‘2024 쿨투라 어워즈' 오늘의 시로 하재연 시인의 「여름 판타지」가 선정되었어요. 이 시는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요. 마치 첫 문장처럼 여름의 시가 겨울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도착한 것 같아요. 수상 소식을 듣고 어떠셨나요?

하재연 안녕하세요, 소유정 선생님. 함께 기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해 주셨듯이 겨울에 도착한 여름의 소식처럼 뜻밖이었습니다. 「여름 판타지」라는 작품은 물론 여름에 쓰이긴 했지만, 시 안에 눈 내리는 겨울의 풍경이 더 우세한 것처럼, 시를 읽는 이들에게는 여름이라는 계절 안에서 그릴 수 있는 어떤 판타지에 관한 것으로도, 또는 상반된 계절에 떠올리는 여름에 대한 판타지로도 읽히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계절이 지난 후에 선정 소식과 함께 작품을 다시 마주하게 되니, 제게도 어떤 계절을 돌아 느리게 도착한 노래가 재생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다른 이들이 함께 들어주시는 기분이었어요.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함께 읽어 주시고 호명해 주셔서 기뻤습니다.

소유정 최근 여름이라는 계절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시(집)들이 눈에 띄고 있는데요. 제게 있어서 늘 맨앞에 놓이는 여름 시는 시인님의 것이었어요. 수상작인 「여름 판타지」도 그렇고, 시 안에서 불러오는 계절로 여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시인님께 여름은 어떤 계절인가요?

하재연 여름은 지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있는 내 자신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 계절이 끝나고 났음을 알아차릴 때야 내가 느꼈던 감정과 감각이 선명해지는 계절인 것 같아요. 너무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살 속에 서 있을 때 인물의 실루엣이 잘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요. 고통의 감각이든, 차가움의 감각이든 그것을 겪는 동안이 너무 격렬해서 그런 걸까요. 여름의 강렬한 대비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제 시집에는 여름만큼 겨울도 많이 등장하긴 합니다. (웃음)

소유정 지난 가을에는 산문집 『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문학과지성사, 2023)를 출간하셨었지요. 작년 여름은 어떻게 보내셨을까 궁금했었는데, 아무래도 책 작업에 시간을 많이 쓰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마침 산문집 안에도 같은 제목의 글(「여름, 판타지」)이 있어 반갑기도 했고요. 시인님 개인의 기억이 묻어난 글들도 좋았지만, 제게는 '여성 작가'라는 공통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분들이 유독 마음에 남아 힘껏 밑줄을 그었던 책이었습니다. 첫 산문집을 출간한 소회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하재연 산문집을 묶으며 원고를 선별하고, 손보고, 편집하는 과정도 오래 걸렸지만, 꽤 시간이 지난 글들을 지금 묶어내는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더욱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지치지 않고 용기를 불어넣어 준 출판사와 편집자 분들에게 참 감사한 책입니다. 원고를 선별하고 책의 체재, 배열을 바꾸어나가는 과정에서 시집보다 훨씬 더 많이 편집자님과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시집과는 다른 재미와 보람이 있었어요. 소유정선생님이 말씀하신 ‘여성 작가’라는 공통 감각에 대한 공감을 편집자 분들과 함께 나누기도 했고, 산문집 낭독회에서 독자 분들도 나누어주셔서 저도 제가 쓴 것 이상의 것을 받았지 않나 싶습니다. 저의 지난 여름을 관통하는 시와 산문이 이번 어워즈의 선정작인 시 「여름 판타지」와 산문집의 「여름, 판타지」인데, 나란히 읽어주셔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소유정 수상작 「여름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처음에는 선명하게 그려지는 장면이 있었어요. 책상 앞에 앉아 눈이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는 한 사람처럼요. 그런데 흰 눈이 내려 앉은 백지에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 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라는 첫 문장을 쓴 순간, “클리셰가 난무하는” 현실에 무언가 뒤섞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에요. 그것은 “반구의 너머” 계절일 수도, 과거와 미래일 수도,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일 수도 있겠지요. 혼란한 가운데 “마지막 장”이 덮이고, 그 사이의 기록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기억일지가 궁금해지는 시였어요. 쓰이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느껴지기도 혹은 모두 썼지만 쌓인 눈 아래 감춰진 것 같기도 했는데요. 시 바깥에 남은 이야기들을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하재연 이 시의 제목은 「여름 판타지」이지만 시의 끝 무렵에 이르기 전까지 여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요. 지구의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는, 내가 겪고 있는 계절과는 완전히 다른 계절을 지나고 있다는 이상한 동시성에 대해 생각하며 시를 썼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느닷없이 사랑하게 되었을 때, 십 년만 먼저 또는 이십 년만 먼저 그 이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가정이나 상상은 헛되고 의미 없지만 부질없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클리셰 같기도 하죠.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이리 저리 쓸려 다니기도 하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우리 삶에 있지 않나 싶어요. 시를 잘 읽어주셨는데요. 반구의 이쪽과 저쪽에서 발생하는 정반대의 계절감,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현재를 상실하는 감각, 그리고 쓰여져 버린 것들과 이후에서야 시작될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오는 기억과 감정들에 대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소유정 이 시에서 화자는 ‘이십 년 후의 너’를 떠올리고 있어요. 처음에는 미래의 자신을 그려보는것이 아닐까 싶었는데요. 미래가 ‘나’의 ‘있음’을 확언할 수 없는 시간이라면, ‘너’는 화자가 사랑하고 영영 그리워할 대상일지도 모르겠어요. ‘너’는 어떤 존재이길래 ‘나’로 하여금 이렇게 슬픔을 느끼게 하는 걸까요?

하재연 읽어 주신 것처럼, 이십 년 후의 ‘너’는 여기와 건너편,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 속에 나와는 엇갈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와의 조우는 흰 백지와 같은 어떤 만들어진 프레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죠. 그러니 그에 대한 사랑도 결국은 판타지 같은 것일 텐데요. 삶도 이런 것일지 모르겠어요. 결국 이상한 엇갈림들로 미만한 삶 가운데, 꿈꾸던 계절의 장면은 어떤 종결 이후에야 가능한 것. 아니 사실은 우리가 살아갈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삶의 프레임 안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 것. 너무 비관적일까요? 그래도 저는 끝내 ‘아름다운 너’에 대한 사로잡힘을 포기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소유정 어느덧 20년이 넘게 시를 써오신 셈인데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하재연 무엇일까요?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만, 산문집에 썼던 것처럼 쓰고 있지 않을 때의 나보다는, 쓰고 있을 때의 나가 조금은 더 견딜 만한 인간이라서가 아닐까 싶고요. 좋은 텍스트를 남겨준 작가들, 또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는 많은 동시대 작가들의 글에서도 자극과 힘을 동시에 얻습니다.

소유정 세 번째 시집인 『우주적인 안녕』(문학과지성사, 2019)이 출간된 지 5년 가까이 되었어요. 시집은 정말 오래 고민하고 내시는 것 같아서 전작들의 기간을 보면 아직 조금 기다려야 되나 싶은데요. 독자로서는 얼른 다음 시집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에요. 앞으로의 출간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하재연 묻고 기다려 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집 출간을 계약한 지도 꽤 되었는데, 제가 워낙 쓰는 속도가 느립니다. 발표한 작품들을 고치거나 고르는 일에도 시간을 많이 들이는 편이고요. 올해는 작품도 더 많이 쓰고, 시집을 묶는 데도 더 힘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이번 선정을 그 계기와 동력으로 삼게 되어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입니다.

소유정 마지막 질문입니다. 「여름 판타지」의 장면을 빌려 여쭙고 싶어요. 시인으로 한 권의 책을 남길 수 있다면, 마지막 장에 쓸 한 문장은 무엇인가요?

하재연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질문을 들으니, “미안합니다”라는 한 마디가 떠오릅니다. 올리버 색스는 임종 전에 남긴 책 제목이 『고맙습니다』였는데, 저라는 인간은 그런 것 같아요. 마지막이라고 상상하니,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며 저지르고 더럽힌 수많은 일들에 대해 과연 속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럴 수 있다 해도, 이미 쓰이고 결말이 나버린 책을 다시 쓰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요. 다시 쓸 수 있는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진다고 해도, 더 좋은 책을 쓰지는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도 같군요.

 


소유정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사이’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이제니의 시 읽기」가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산문집 『세 개의 바늘』과 비평 연구서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공저)가 있다.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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