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쿨투라 어워즈] 초공간의 물리적 마법 서사: 하재연 시인의 「여름 판타지」
[2024 쿨투라 어워즈] 초공간의 물리적 마법 서사: 하재연 시인의 「여름 판타지」
  • 홍용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4.01.30 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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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Cultura Awards 오늘의 시 작품평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
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시작되는 대본을 쓰는
창밖으로는 눈이 쏟아진다 클리셰가 난무하는
장르 드라마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열려 있는
창문틀이 육체처럼 삐걱거리고 있다
나의 시간들이 새어나가고 있다

(중략)

이십 년 후의 네가 이상하게 아름다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가며
결말을 준비하고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여름의 파도소리는 시작된다

지구의 건너편 반구에서부터
기억처럼 도래하는 방식으로

- 하재연, 「여름 판타지」 부분

 

하재연의 「여름 판타지」의 낭만적 공간 서사이다. 여기에 시간성은 없다. 그래서 시적 캔버스에는 시간의 인과론적 질서로부터 자유롭다. 시적 정조와 화법이 가볍고 경쾌하고 몽환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간이 없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이기에 공간적 거리는 의미가 없다. 고전역학과 변별되는 양자 얽힘의 무한 도약적 상상이 가능해지는 자리이다. 이를테면, 무한의 공간적 거리와 무관하게 상호 관계성을 지닌 대상과는 상응하는 반응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시적 사건, 표식, 상황이 동시성의 판타지로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여름과 겨울의 절기가 동시에 전개될 수 있다.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 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 네가 도착하는 시기가 이십 년 후인지,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기보다 이십 년이 지난 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과거에서 미래로 열려 있는/ 창문틀” 안에서 이 둘의 의미는 중첩성을 지닌다. “과거에서 미래로 열려 있는/ 창문틀”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 얼어붙은 강물처럼 정태적인 입체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창문틀이 육체처럼 삐걱거”린다. “나의 시간들”이 “기화하는 탄산”처럼 “새어나”갈 것이 염려된다.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입체적 공간성이 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화자의 판타지적인 사랑의 서사는 깨어지게 된다.

시적 화자 앞에는 “이십 년 후의 네가” 나타난다. “이상하게 아름다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상위차원의 초공간에서 조망하는 입체적 공간 서사에 대한 총체적 직시이고 감상이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가며/ 결말을 준비”한다. 얼어붙은 시간의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겨울은 “여름의 파도 소리”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이 “기억처럼 도래하는 방식으로”다가온다. 선형적 시간 질서가 지배하는 ‘지금, 여기’의 현재가 복원되는 지점이다. 과거는 기억된 현재로 남지만 미래는 망각된 현재로 아득히 사라져 간다.

미래학자 아서 클라크는 ‘극도로 발전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했다. 하재연은 미래 과학의 마법에 편승하여 상위 차원의 공간에서 자신의 삶과 사랑의 서사를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위 차원에서 감상하는 현존재의 시공에 대한 깊고 거시적인 마법적 사유와 감상이다. 한편, 이것은 또한 시적 화자의 원형 상상과도 연관된다. 의식적 질서 저편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성이 감지하고 감각하는 근원적 자아의 삶의 범주로 해석된다. 집단 무의식의 원형성은 우주적 지평으로 열린 초공간의 전일성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퀀텀quantum적 도약과 무의식적 원형성의 동시성이 몽환적 화법 속에 신묘하게 감지되는 시편이다. ‘2024 쿨투라 어워즈’ 설문에 이 작품이 단연 선명하게 부각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의 놀라움에 있으리라.

 


홍용희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김지하 문학연구』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김지하 마지막 대담』 등이 있음. 젊은 평론가상, 애지문학상, 시와시학상, 김달진 문학상, 유심문학상, 편운 문학상 수상.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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