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로마] 도련님의 헌사, 〈로마〉
[2019 오늘의 영화 - 로마] 도련님의 헌사, 〈로마〉
  • 신귀백(영화평론가)
  • 승인 201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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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씨네마

넷플릭스가 투자·제작한 〈로마〉는 사해동포 서비스 회사다운 주제를 다룬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스트리밍 기업에서 계급이 가지는 증오심을 비껴갈 것은 자명한 일. 일단 하녀 이야기라면 있을 법한 금반지와 억울한 누명, 주인아저씨의 짐승성 같은 클리셰가 없다. 탐욕과 이기심 내지 적개심에 대한 우의도 적다. 권세가 우정을 침범하지 않는다. 섬뜩한 눈빛과 저주의 언어들이 없다. 가난한 자가 글을 깨우치고 세계에 눈뜨는 계몽성도 버린다.

쿠아론이 전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이 아니다. 우정에 대한 답례다. 잠잘 때 자장가를 불러 준 유모에 대한, 친구들이 오면 한 상 걸게 차려주던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에 나오는 기요할멈에 대한, 허안화의 〈심플 라이프〉의 늙어 요양원에 가는 집사 아타오에 대한, 그러한 관계에 대해 계급성을 덮는 실천이다.

인본주의

〈로마〉는 감독의 꼬맹이 시절 자전적 이야기를 반영한 작품이라 한다. 1970년대 초 멕시코, ‘로마’는 구역명으로 중산층 동네다. 여기 할머니와 엄마 등 여자와 어린이로만 구성된 가족에 두 명의 식모(가정부라 말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시라)가 있다. 광대뼈에 펑퍼짐한 얼굴의 인디오계 아가씨는 개똥을 치운다. 칼 가는 아저씨의 피리 소리로 시작하는 아침, 빨래하고 개똥을 치우는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는 흘러간다.

주물주물 빨래를 널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하학시킨다. 저녁에는 동료와 스트레칭을 하면서 개똥 치우라며 짜증 내던 쥔아줌마 소피에 대한 뒷담화를 한다. 휴일에는 동료 하녀 아델라와 시내에 나가 콜라에 햄버거를 먹고 극장에 간다. 수다 뒤에는 남자친구 페르민과 데이트다. 쌍절곤을 바지 뒤에 꽂고 다니는 건달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 공원에 가자며 모텔에 간다. 남자는 샤워커튼 봉을 뜯어서 일본 무사처럼 인사를 한 후 무술연습을 보여준다. 놈의 덜렁거리는 물건은 드러내되 식모의 벗은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화장실 다녀온다던 애인은 점퍼를 놓고 가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페르민은 사라졌어요. 저를 해고하실 건가요?” 주인의 결정에 달린 인간의 존엄. 이 존엄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녀에겐 고용이 먼저인데. 의사는 언제, 몇 명이랑 했냐가 중요한데, 쥔아줌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병원 가자, 아줌마가 알아서 할게”라는 클리셰를 배신한다. 비극의 핵심은 인본주의다.

포장되지 않은 저개발 동네에 울려 퍼지는 선거홍보의 소음 속 남자를 찾아 나서는 길에 동네 서커스가 진행된다. 서커스와 다름없는 선거운동을 지나니 시위진압대의 대나무 목검 시범이 벌어진다. 애써 찾아간 남자애는 “임신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 미친 하녀 같으니”라는 말 뒤, 이어지는 흐느끼는 소리. 그러나 화면전환 속 울음의 주인은 백인 중산층 여성 소피다. 

마르지 않는 빨래 같은 마음으로 개똥 같은 마음으로 출산을 기다린다. 아니 다가온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가 사복경찰이 되어 학생들에게 총질을 한다. 시위의 난리 속 백골단이 사람을 죽일 때 양수가 터지고. “심장 소리가 안 들려요” 신생아기에게 심장 충격 장면, CPR반응 중단. “그래도 아기를 안아 볼래요? 여자 아이에요” 하얀 천에 둘둘 말리는 사산 태아를 흑백으로 지켜봐야 하는 지점은 클레오나 보는 관객으로서도 다행이다.

칼갈이 아저씨의 피리 소리와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돌아온 일상. 이제 막 남편과 갈라선 소피는 비통을 내색하지 않는 클레오에게 바닷가 가족여행을 제안한다. 이어 펼쳐지는 압도적인 바닷가 크레인 샷 롱테이크 장면. 사랑에는 소극적이고 어리석지만 식구들과의 우정과 위험에는 적극적인 클레오. 수영을 못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우선이다. 생명을 찾아 뛰는 책임감을 넘어선 무한사랑이다. 내가 노래해서 재우고 입힌 아이인데. 파도를 향해 결연히 들어가는 소녀의 바다는 눈부시게 애틋하다. 그리고 원신 원컷을 장식하는 가족들 등 뒤로 부서지는 햇살. 

집에 돌아와 옷으로 송수화기를 닦던 하녀는 빨래 더미를 안고 옥상 계단을 오른다. 그때 비행기가 서서히 지나간다.

ⓒ판씨네마

그들 각자의 영화관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이 직접 카메라를 든 영화라 한다. 달리와 크레인 도중의 줌샷 등 칭찬이 자자하다. 넓은 1층 거실 하나하나 전깃불을 끄고 식모방으로 돌아와 물을 마시는 것으로 요약되는 360도 패닝 숏, 무빙 롱테이크와 카메라 워킹에만 몰두하는 리뷰들은 이 영화가 가지는 휴머니티를 조명하는 데 방해가 된다(어쩌랴). 묘하게도 주인 중년 남자의 자동차 주차 장면만큼은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같잖은 운전 솜씨를 자랑하는 남자들에 대한 제유이리라. 파킹 좀 하는 이 남자는 책은 놓고 책장을 가져간다. 

컬러필름이었다면, 상상이 줄었으리라. 시위와 출산의 장면 등이 몰입에 방해할 수 있을 테니. 천연색감이 너무 많은 정보를 주거나 인지하는 피곤함 그리고 흑백사진의 하얀 테두리가 주는 아우라도 그렇지만, 사실 클레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이는 세상은 모두 무채색으로 보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컬러였다면, 클레오가 고갱의 그림에 등장하는 꽃을 든 원주민 여자로 보일지도 모를 일.

바닷가 사건 이후 돌아오는 자동차 좌석 안에서 식모 아가씨도 한 소년도 창밖을 오래 응시하던 장면이 나온다. 극 중 소년의 시선이 제일 잘 드러내는 부분이니 그가 쿠아론(혹은 카메라의 시선)이라 해 두자. 아빠의 외도와 70년 월드컵, 선거와 폭력시위로 정신없이 지나간 시간 속 소년에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것은 식모누나와의 극장행이다. 여기서 감독의 속마음이 읽힌다. 

“다만, 제가 만든 〈그래비티〉의 아름다움은 클레오 누나와 같이 간 극장에서 본 장면의 연장일 뿐이에요” 하는 감사와 헌사다. 우주인을 담은 화면에 심취해 있다가 둔중하게 열리던 극장문을 나서면 확 밝아지던 그 이상한 느낌에 대해 쿠아론은 관객들에게 동의를 구한다. 어둠의 신전에서 나와 밝은 극장 밖의 인형팔이나 노점상의 풍경들이 기시적이면서도 생소하지 않던가 고. 마치 낮잠을 자다 깨어 학교에 갈 시간일지 모른다고 울먹였던 유년의 시간들처럼…….

파도에 휩쓸린 소년 중 하나가 쿠아론일 것이다. 그 구원에 호들갑스러운 감사 대신 최고의 장면을 선물하는 것. 당장의 땡큐가 아닌 그 고마움을 수십 년 간직한 채 세상 사람에게 돌려주는 미덕을 견지한다. 순간에 피운 꽃이 아닌 시간이 맺게 한 열매는 견고하고 침착하다.

ⓒ판씨네마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 허안화의 〈심플 라이프〉

〈로마〉의 차별성은 소년의 가슴을 달구던 열혈이나 부끄러움을 다루지 않는 것. 다만 은근할 뿐. 영화 속 주인의 취향을 나타내는 소품으로만 등장하는 불상의 존재가 그런 메시지는 아닐는지. 그래, 이 사랑은 희귀한 것만은 아니다. 하여, 소세키가 「도련님」이라는 소설로 쓰고, 허안화 감독이 영화로 만들지 않았던가. 근성과 충돌만이 성장의 조건이 아님을 넌지시 깨닫지만 그 고집을 버리지 않는 ‘봇짱’은 섬에서 늙은 하녀에게 편지를 쓴다. 편짓글 속 허세와 ‘가오’가 봇짱을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기요 할멈에게 보답하는 사랑의 방식이니까.

도련님같이 잘 생긴 배우 유덕화가 등장하는 〈심플 라이프(桃姐), 2012〉에서는 성공한 영화제작자가 늘그막의 하녀에게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 생선 요리에 관한 도련님의 취향을 사랑해주던 헌신적인 하녀가 중풍으로 쓰러졌으니. 4대에 걸쳐 헌신한 할멈에게 의무가 아닌 위무를 통해 부담스럽지 않게 인간의 빚을 갚는 시선은 안온하다.

유모의 사랑 속 물에 빠졌던 소년이 자라면 ‘도련님’이 될 것이고 더 나이를 먹으면 ‘유덕화’가 되는 과정은 사적이거나 지역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로마〉의 쿠아론에게도 올곧고 바른 성품으로 날뛰던 ‘봇짱’의 시절이 있었을 터. 쿠아론은 유덕화의 구체적 선행이 아닌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편지나 회고록 대신 영화 한 편으로 그가 받은 애정과 온유에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위트와 유머는 부족하지만). 어린 시절을 꾸며준 사람이 부모 말고도 유모나 식모가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보석을 가진 사람일 터. 그것이 기성품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덧: 봇짱도 유덕화도 아니지만, 같이 극장에 가던 정순이 누나를 마음속으로만 불러본다, 노스텔지어와 죄의식을 동반해서. 봉순이 언니나 몽실언니는 아니지만, 무대접으로 기억되는 클레오가 보고 싶다. 부엌에 연결된 식모 방에서 겨우내 뜨던 메주 냄새와 더불어 제목을 알 수 없는 흑백영화와 이리극장 쇼 무대 위에서 목을 다듬던 가수 배호의 기침 소리가 오래도록 따라온다. 

 

 


신귀백 영화평론가. 장편 다큐멘터리 <미안해, 전해줘> 연출. 영화평론집 『영화사용법』, 지역인문서 『전주편애』를 펴냈다. butgood@hanmail.net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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