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공작] 거대한 공작에 대한 “반격의 서막”, 그리고 역사의 진전
[2019 오늘의 영화 - 공작] 거대한 공작에 대한 “반격의 서막”, 그리고 역사의 진전
  • 설규주 (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19.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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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엔터테인먼트

‘극劇’보다 더 ‘극적劇的’인… 그래서 황당한…

‘공작工作이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서는 ①노력이나 기술을 들여 물건을 만듦 ②일정한 목적을 위해 미리 일을 꾸밈, 이렇게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영화 〈공작〉에서 ‘공작’의 의미는 ②에 더 방점이 찍혀 있긴 하지만 ①도 많이 담겨 있다.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을 꾸미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기술이 들어갔던가. 

〈공작〉의 소재는 실화다. 실화가 아니었다면 〈공작〉은 여느 첩보 영화 중 하나 정도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공작〉의 후반부 사건 전개가 너무 ‘극적’이라 ‘이건 영화니까 그럴 수 있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사건이 오로지 ‘극’만은 아니라는 데 생각에 이르면 정신이 번쩍든다. 더 놀라운 건 북한 정권과 한국 정권 사이에 있었던 거래다. 적대하고 있는 세력 간에 거래가 있었다는 것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어느 나라건 외교 당국 간의 이른바 ‘물밑 접촉’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그 거래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종종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쓰는데, 이 경우가 딱 그렇다. 남한 정보 당국이 북한 정권에 상당한 돈을 주면서 무언가 요청을 하는데 그게 자그마치 ‘총격’이었다. 그것도 전시에 준하는 정도의 총격을… 한때 국가 교육과정에 따라 충실한 반공교육을 받아 왔던 사람들, 북한에서 온 거라면 하찮게 보이는 종잇조각 하나라도 신고해야 할 정도로 북한을 경계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사람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견뎌야 했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바보로 만들어 버린 황당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북한 관계자를 만나 총격을 요청한 행위야말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을 한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 아닌가.

ⓒCJ엔터테인먼트

진짜보다 더 많이 기억되는 가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남북 간의 교전이나 북한의 무력 도발 역사는 꽤 길다. 1976년에는 그 참혹한 도끼만행사건으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했다. 1984년에는 당시 소련의 관광 가이드 1명이 남북군 사정전위원회 회담 장면 촬영 중에 월남을 해왔고 그로 인한 총격전으로 국군, 미군, 북한군 사망자가 발생했다. 1996년에는 북한군이 갑자기 비무장지대를 인정하지 않겠다면서 판문점 주변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였고 이는 며칠 남은 총선에 큰 변수가 되었다. 2017년에는 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하던 북한군 병사가 갑자기 군사분계선을 넘어 내려왔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북한군의 집중 사격이 있었지만 결국 그 병사는 월남에 성공하였다. 

이 중 1996년 총선을 앞두고 발생한 판문점 무력시위는 가짜로 간주된다. 북한의 무력 도발 자체는 실제로 있었지만, 그것은 한국 정부와의 공모 속에서 기획된 것이며 따라서 남쪽에서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선거에 이용하려고 과잉 대응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이 사건을 검색하려면 ‘판문점 도발’보다는 ‘북풍北風 조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 진짜 도발이 아닌 가짜라면 지워져야 하고 잊혀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이 가짜 무력 도발은 남북 관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또렷하게 남아 있다. 때로는 진짜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고 부끄럽게. 1997년 12월 대선 직전에 미수로 끝난 총격 요청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건 아예 ‘안기부 북풍 조작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두 사건은 총선, 대선이 있는 해에는 어김없이 소환되어 진짜보다 더 인기 있고 유명한 가짜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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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가짜들의 향연

판문점에서 북한이 벌인 가짜 무력 도발 외에도 〈공작〉에는 가짜가 참 많이 등장한다. 박석영(황정민)이 리명운(이성민)에게 선물로 준 롤렉스 시계도 가짜고, 이에 화답하듯 리명운이 박석영을 시험하기 위해 건넨 고려청자도 가짜다. 리명운이 박석영 가슴에 신뢰의 표시로 달아준 배지는 사실 도청장치였으니 이것도 가짜다. 북한에서 남한 광고를 찍기 위해 먼저 답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도 가짜다. 진짜 목적은 핵시설 염탐에 있었으니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업가로 위장한 박석영이라는 인물 자체가 가짜다. 등장인물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도 가짜가 난무한다. 

〈공작〉의 수많은 대사 중 가짜의 극치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국가’나 ‘조국’을 위한다는 표현이었다. 안기부장도, 안기부 실세 간부도, 국회의원도 사업가로 위장한 안기부 공작원도, 조선노동당 간부도, 북한군 장교도 저마다 국가나 조국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든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대체 그들에게 국가란 뭐길래?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송강호)은 변론 중에 국가가 뭔지 묻고 그 답도 주었다. 그는 헌법 제1조 2항을 인용하며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일갈한다. 〈공작〉은 다른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는 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없고 답도 없다. 국가, 조국, 공화국, 민족 등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할 때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무엇인지 알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만 늘어간다.

게다가 그들이 되뇌는 ‘국가를 위해’라는 취지의 말은 상당한 피로감을 준다. 왜 그럴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많이, 아무리 자주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를 위한다’는 말은 왜 그렇게 들리지 않을까. 개개인보다 훨씬 크고 높고 숭고해 보이는 국가를 위한다는데….

등장인물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국가가 무엇인지 유추해 볼 수는 있다. 그들이 그토록 위한다는 국가는 사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특정 조직과 그 세력에 불과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조직을 이용해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안기부장에게는 안기부가 국가고, 국회의원이나 당 간부에게는 소속 정당이 국가고, 군 장교에게는 군이 국가다. 〈공작〉에서 안기부장(김응수)은 총격 요청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안기부 실장(조진웅)에게 솔직하게 고백한다. “일단 대선부터 이겨놓고 생각합시다. (지금) 부대가 전멸하게 생겼는데…” 사실은 이렇게 자기가 소속된 조직이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일하면서도 겉으로는 국가를 내세워주면 자신의 임무를 좀 더 당위적이고 신성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라 신념이나 자기 최면에 가깝다. 그래서 가짜다. 아무리 포장해도 가짜는 진짜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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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의 그늘

200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기간에 버락 오바마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나라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국가는 특정 조직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 즉 미국을 가리킨다.이 발언 때문에 오바마 선거 캠프는 다른 진영으로부터 어떻게 조국을 자랑스러워한 적이 없는 사람이 ‘퍼스트 레이디’가 될 수 있겠느냐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미셸 오바마가 한 말의 전체 요지는 ‘이전까지는 미국이 자랑스럽지 않았다.’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정치를 갈망하는 사람들 덕분에 희망을 볼 수 있어서 미국이 자랑스럽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냥 ‘미국’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미국’이라야 자랑스러워할만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국가에 대해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1968년 만들어진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에는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이 있다. 1972년판에서 이 맹세의 정도는 훨씬 강해졌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는 표현으로 수정된 것이다. 이것이 2007년 판에서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유독 2007년판에만 대한민국 앞에 수식어가 들어 있다. 충성의 대상이 “조국”에서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그냥’ 대한민국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로 반듯하게 서 있는’ 대한민국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전히 2007년판 ‘국기에 대한 맹세’가 사용되고 있던 2016년-2017년 도심 한복판에서는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가. 충성의 대상이어야 할 대한민국에 대한 불경함인가? 충성의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대한민국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이 구호 속에 국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을까? 비록 그 외침 깊은 자리에는 나라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을지라도, 적어도 그 시점에 ‘내가 사는 나라, 자랑할만하네.’라는 생각으로 ‘이게 나라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 반대였을 것이다. 오히려 당시 우리나라가 너무 부끄러워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온 구호였을 것이다. 

그럼, 나라가 잘 돌아가기만 하면 그건 자랑스러워해도 된다는 걸 의미하는가? 1960년대에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에서처럼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중요한 경제 지표에서 우리나라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세계 시장에서 우리나라 제품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면 마치 자기 자신이 잘 나가는 것처럼 마냥 좋아하면 되는가? 그저 나라가 발전하면 그만인가?

물론 나라가 엉망인 것보다는 잘 나가는 것이 당연히 좋다. 그런데, 국가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 불사해도되는 것인지는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공작〉에서처럼 궁극적으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공작’을 해도 괜찮은가? 공작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 낸 국가를 우리는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가? 〈공작〉이 다루고 있는 1996년, 1997년 선거 관련 공작 말고도 과거 국가 기관이 ‘국가를 위해’ 기획한 공작 사건이 적지 않은데 결과적으로 국익에 이바지한 것이라면 면죄부를 줘도 괜찮은 것인가?

곳곳에 퍼져 있는 ‘공작’의 그림자

국가를 위해 공작을 일삼는 모습은 최근 우리나라 스포츠계를 흔들고 있는 폭력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코치와 선수에게는 지상 과제였고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써 폭력은 널리 용인되어 왔다. 심지어 효과적인 수단으로 애용되기까지 했다. 폭력은 때로는 선수들의 기량을 극대화시킨다는 명분으로, 때로는 특정 선수를 밀어주기 위한 도구로 활발하게 사용되었지만 가해자들의 공모 속에 철저히 은폐되어왔다. 그 때문에 그렇게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악착같이 모은 메달 수는 메달 집계 순위에서 우리나라를 늘 상위권에 올려놓았다. 한국 국민으로서 그러한 결과 자체는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메달 중 상당수가 선수들의 땀과 노력만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한 눈물과 고통의 산물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 높은 순위는 자랑스러움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자아낸다.

스포츠계의 폭력은 국가 기관의 공작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모두 국가를 위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특정 조직과 일부 구성원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스포츠계 이면의 진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나라가 딴 수많은 금메달을 보며 마냥 뿌듯해할 수 있을까? 그걸 차마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애국심에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국가 기관의 공작에 의한 성취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반격의 서막”

언제는 안 그랬을까마는 요즘도 우리나라에는 뉴스가 넘친다. 특히 곳곳에서 과거의 악습이 밝혀지고 그로 인한 충격과 실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진다. 영화 〈공작〉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영화는 20여 년 전 남한 정보 당국과 당시 여당의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을 고발했다. 이처럼 뒤늦게라도 그동안의 거짓과 잘못을 공작해 온 관행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에 대한 단죄와 대안 모색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록 과거의 공작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슬픔과 피해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

국가 기관의 거대한 권력과 관계자들의 막강한 카르텔에 균열을 낸 것은 그에 필적할만한 또 다른 강한 세력이 아니라, 조직과 국가의 부속품쯤으로 여겨져 온 개인인 경우가 많다. 〈공작〉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가짜 속에서도 아마도 ‘유이’하게 서로에 대한 진정어린 신뢰와 국가에 대한 진심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박석영(황정민)과 리명운(이성민)이 반전을 만들어 낸 것처럼. 그동안 국가라는 이름을 팔아가며 사익을 추구해 온 일부 법조계, 정치계, 스포츠계 등의 견고한 시스템에 몇몇 개인이 몸을 던져 조금씩 공론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처럼. 반격은 그렇게 시작되고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야 미국이 자랑스럽다는 미셸 오바마의 발언을 다시 생각해 본다. 스포츠든 정치든 경제든 과거의 ‘공작’ 악습으로부터 벗어나고 그 상처를 치유해 내면 한국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그래서 마음 놓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때쯤엔 그 정도는 너무 당연해서 ‘국가’라는 것을 개인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 자체가 일종의 넌센스가 되어 있을까?

 


설규주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 학사, 석사, 박사 졸업.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음. qzoos@hanmail.net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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