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허스토리] 〈허스토리〉가 가로지르는 길들 혹은 물음들
[2019 오늘의 영화 - 허스토리] 〈허스토리〉가 가로지르는 길들 혹은 물음들
  • 이수향(영화평론가)
  • 승인 2019.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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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위안부 소재 영화라는 곤경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성노예 문제 즉 종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는 초기의 역사 고발적 성격에서 순결주의 이데올로기적 분노의 투영, 그리고 피해자의 목소리로 발화하게 하기라는 인식적 확대를 거치며 만들어져 왔다. 특히 2017년에 개봉된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는 더 이상 소녀적 이미지에 피해자들을 가두지 않고 이제 노년이 된 그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적 공감대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므로 2018년에 다시 한 번, 위안부 소재의 영화인 〈허스토리〉가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가 얼마만큼의 성과를 더 보탤 수 있을 것인 지에 대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종군 위안부에 대한 부채감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예상가능성의 측면에서 신선하지 못하다는 지적과 어두운 역사에 대해 더 이상 들추고 싶지 않아하는 불편함이 대중적 심리에 같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 속에도 묘사된 바와 같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해 그게 뭐가 자랑이냐고, 그만 좀 하라고 화내는 사람들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소재 자체가 주는 위압감과 불행 서사를 영화라는 오락 매체를 통해서 보고 싶지 않은 저항 심리의 곤혹스러움이 영화 외적으로 〈허스토리〉에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사 내적으로 비분강개와 위안이라는 카타르시스의 한계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손쉬운 만족감을 통해 시민의식의 고양이라는 환상을 가로지르고 잊혀진다면 영화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더욱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위안부를 다룬 영화가 주는 기대치를 배반하면서도 더 나은 인식적인 새로움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 앞에 놓인 양자의 곤경이었던 것이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피해자의 피해자성의 균열

〈허스토리〉는 초반부의 자막에서 나오듯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가 된 ‘위안부’ 원고 3명과 일본 공장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원고 7명, 총 10명의 원고단이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을 오가며 진행한 ‘관부재판’을 다룬 영화이다.

주인공인 문정숙 사장(김희애)은 부산에서 여행업으로 제법 돈을 벌고 지역 여성 사장들 모임에도 참여를 하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기생관광으로 영업정지를 당하게 되자 사회봉사 차원에서 정신대신고센터를 개설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된다. 그리고 문사장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배정길 할머니(김해숙)를 비롯해 여러 명의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아 일본에게 사죄를 받아내려는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들을 1991년~1998년간 이루어진 재판과 구두변론들을 통해 법정물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이 영화는 소재의 특성상 윤리적 차원에서 ‘선한 할머니들’/ ‘악한 일본’을 상정할 수밖에 없고 그런 측면에서 여전히 국수주의적 정념이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인물 성격화 차원에서 상당히 입체적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성격과 등장 이유를 명백히 갖고 영화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사장은 성장 서사의 주체로서, 그간 계몽주의적인 색채를 가진 교양소설(Bildungsroman) 속 주인공 남성의 자리에 여성을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최근의 영화들에서도 평범한 소시민이던 사람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각성하여 분발하는 서사의 주인공은 〈변호인〉과 〈택시 운전사〉처럼 늘 남성이었다. 이 자리에 여성이 놓였다는 것은 이 영화가 특정 소재에만 함몰되는 영화가 아니라 여성들 간의 연대와 책임 의식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간 오달수, 유해진 배우 등이 맡았던 주인공의 동성 조력자이자 서사적 긴장을 이완시켜주는 역할은 문사장을 돕는 여성경제인연합의 신사장(김선영)이 담당하여 워맨스를 펼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피해자들의 피해자성을 단일화하지 않는 태도이다. 박순녀(예수정) 할머니는 몸에 상흔(문신과 자궁 적출 수술 자국)을 남긴 채 끝내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던 피해자들의 일반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욕지기와 흡연으로 상징되는 강한 캐릭터를 표현한다. 이와 대비되는 서귀순(문숙) 할머니는 쪽진 머리와 옥색 한복, 온건한 말투로 성격 표현을 하면서도 위안부가 아닌 근로정신대 출신이라고 할머니들과 자신을 구분 지으며, 재판장에서 일본인 선생의 증언을 추동하는 강력한 서사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옥주(이용녀) 할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유아적인 모습으로 내내 작은 웃음을 유발하지만 변론 과정에서 ‘대를 이을 아들’ 대신이라는 미명 아래 ‘딸’로서 희생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 할머니들의 고통의 범주를 가부장제 하의 여성의 고통이라는 좀 더 통시적인 관점의 문제로 확대시킬 수 있는 인식을 얻게 된다. 

피해자의 범주 설정에 대한 그간의 통념에도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홍여사(박정자)는 끌려갔지만 나중에는 위안소 주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에 대해 문사장은 “처녀는 피해자고 창기는 피해자 아닙니까, 피 빨린 거는 똑같죠.”라고 변호한다. 배정길 할머니의 아들 역시 매독에 걸린 모체로부터 물려받은 뇌병변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문사장에 의해 ‘어머님 재판이면서 당신 재판’이기도 하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전형적인 피해자의 형태에 들어가지 않았던 이들도 이 범주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내용상의 변곡점을 담당하는 폭로의 플롯을 쥐고 있는 인물은 배정길 할머니로, 그녀의 진술에서 허위가 드러나는 장면은 서사적 위기를 구성하며 원고단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다.

이렇듯 다양한 서사적 기여도를 가진 인물을 통해 같은 피해를 겪은 원고단 속에서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생각들과 각자의 입장 차이들을 제시한다는 부분이 피해자의 피해자성에 대한 단순한 인식을 깨뜨리는 지점이다. 심지어 문사장과 이상일 변호사(김준한)가 재판에 이기기 위한 서귀순 할머니의 진술방식 놓고서 격론을 펼치기도 한다. 이는 어떠한 의견 균열도 허용치않는 매끈한 이해 공동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기반한 것이다. 나아가 피해자들의 각기 다른 목소리와 의문들에 대해 이 영화가 대면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또 다른 여성 서사를 기대하며

유지나는 1999년의 한국 영화계를 설명하면서 “영화가 현실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이 시기 한국 영화 세상은 남성만의 세상이다.”(『여성 영화산책』, 161쪽)라고 조망한 바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영화계는 얼마만큼의 젠더 다양성이 이루어져 있는가.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주요 담론이 된 페미니즘의 흐름이 영화계에도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2018년에도 여성 중심 서사의 영화들이 많은 공감을 얻었고, ‘허스토리언(영화 〈허스토리〉의 팬들)’이나 ‘쓰백러(영화 〈미쓰백〉의 팬들)’와 같이 적극적인 관객들의 지지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라는 장 안에서 여성은 어떠한 방식으로 형상화되고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있어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여성의 서사를 말하는 것은 저예산의 고된 작업이며, 주요 영화에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더라도 쾌락주의적 대상화의 시선이나 남성 인물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소재가 제한적인 여성 영화들이 애써 만들어지더라도 낮은 관객 스코어는 제작과 창작의 양 주체를 낙심케 한다. ‘허스토리언’과 ‘쓰백러’들의 유의미한 공감과 연대 속에서도 여성 중심 서사는 ‘잘 팔리지 않는’ 서사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성 서사는 계속 만들어지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시 또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한 고군분투의 다양한 노력 중의 하나로 〈허스토리〉는 유의미하다.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면서도, 영화적 과시를 위해 이들의 아픔을 카메라로 전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위안부 문제를 통해 민족주의의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 여성의 몸과 역사에 새겨진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공통된 영역을 상상해낸다. 나아가 민족-젠더-폭력-세대의 다양한 항들을 교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여성주의가 당면한 문제의식을 확대하고 있다. 단일하지 않은 그들의 입장과 증언의 불일치 속에서도 현재에도 지속되는 아픔들을 손쉽게 봉합하지는 않는 미덕을 통해 왜 여전히 그들과 연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위안부 소재 영화가 더 만들어져야 하는가. 종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는 역사적 책무, 정치적 고려와 실익, 할머니들의 생물학적 죽음* 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중심에 육박해 들어가지 않는 처치 곤란함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는 피해자의 고통은 고려하지 않은 채 국가 간의 사정이라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합의 즉, “이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윤병세 외교부장관, 2015년 12월 28일)라는 공언이 가진 부조리성으로 다시금 환기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영화의 말미, 문사장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겼다고도 졌다고도 할 수 없고, 아직 안 끝났다 뭐 이래 말할 수 있겠지예.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까"

결국 이러한 영화들은 다시 만들어질 것이고 끊임없이 재탈각되고 의미화되는 과정을 통해 단순히 한 시대의 원한 감정만을 보여주는 차원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 윤리적 책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 이 부분은 영화의 개봉 이후 다소 논란이 되었는데, 원래는 “2017. 4. 4. 관부재판 마지막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라는 자막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되었으나, 일본시민단체인 ‘전후 책임을 묻고 관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측은 생존한 할머니들이 있는 등 몇 가지 문제제기를 했고, 제작사는 이를 받아들여 “2018년 현재 관부재판의 원고는 두 명만 생존해 있다.”로 수정되었다.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평론상 수상. 국문학 박사를 수료했고, 현재 영화와 문학의 연대와 길항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공저로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 『영화광의 탄생』, 『영화와 관계』 등이 있다. ar dor1024@naver.com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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