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완벽한 타인] 주체와 타인의 뫼비우스 띠
[2019 오늘의 영화 - 완벽한 타인] 주체와 타인의 뫼비우스 띠
  • 임대근(문화콘텐츠비평가, 한국외대 교수)
  • 승인 2019.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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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엔터테인먼트

1. “타인은 지옥”

장 폴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 안에는 이미 주체와 타인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타인 없는 주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주체 없는 타인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주체에게는 타인의 승인이 필요하고, 타인은 주체의 인정을 갈망한다. 신이 아담과 하와를 잇달아 만들었을 때, 인간은 독립해서 살 수 없는 존재로 이미 규정됐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죄의 길로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서로가 온전히 타인을 인정하고 승인했더라면, 인간은 영원히 아름다운 천국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은 주체를 온전히 승인하지 못하고, 주체 또한 타인을 완벽히 인정하지 못한다. 주체와 타인 사이에는 언제나 어긋남, 일치할 수 없는 오인과 왜곡의 지점이 존재한다. 주체는 타인의 오인과 왜곡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역시 타인에 대한 전적인 승인을 거부한다. 뫼비우스 띠처럼 얽혀버린 주체와 타인은 끊임없이 서로를 추수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상대의 위치까지 도달할 수는 없는 배반적 관계에 놓여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2. 한국영화, 이야기, 결핍, 노출

이재규 감독의 〈완벽한 타인〉은 쟁쟁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들 사이에서 선전한 보기 드문 블랙코미디다. 우리는 한국영화의 역사를 이끌어온 수많은 영화 제목 위에 전에 없는 발상과 창의성으로 무장한 참신한 작품 하나를 더 얹게 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2018년 한국영화를 이끈 대세는 묵직한 사회 역사물이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타인〉은 최근 한국영화가 지향하는 역사적 문제나 사회적 의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물론 이런 시도가 이 영화만의 것은 아니다. 〈부산행〉, 〈신과 함께〉 시리즈 등은 리얼리즘 영화의 큰 흐름 속에서 새로운 도전으로 호평받았다. 좀비를 등장시킨 〈부산행〉은 한국형 호러의 성공 가능성을 맛보았고, 웅장한 스케일과 컴퓨터그래픽으로 웹툰을 스크린에 옮긴 〈신과 함께〉 시리즈는 판타지도 킬러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두 영화 역시 사회적 의제로부터 완벽히 독립된 건 아니었다.

〈부산행〉은 한국 사회의 성별, 계층, 가족, 또래 집단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부조리를 배경으로 삼았고, 〈신과 함께〉도 군 의문사, 경제난, 빈부격차 등의 문제를 끌어들였다.

〈완벽한 타인〉이 사회적 의제로부터 완벽히 독립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는 사실 매우 사회적이다. 부부, 모녀, 친구 등으로 구성된 그들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 양상은 지극히 사회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의제는 미시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영화들과 다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쉽게 공론화하지는 않는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매우 사회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통쾌하지만 발칙한 웃음을 선사했다. 이탈리아 영화를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은, 한국영화가 어딘가로 ‘진출’을 꿈꿀 것만이 아니라, 바깥 영화를 잘 ‘진입’시킴으로써 스스로 더 풍성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런 상황은 두 시간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의 무대가 그저 어느 집 부엌과 거실 등으로 한정해도 충분히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 주었다. 특정한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거기서 무언가 비밀을 밝혀야만 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는 적지 않다. 이른바 공간 중심 영화다. 근작 한국영화만 해도 〈설국열차〉, 〈곤지암〉, 〈터널〉, 〈더 펜션〉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들은 대체로 재난이나 공포의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완벽한 타인〉은 그런 면에서도 창의적이다. 특정 공간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그 공간 자체가 이야기를 펼치기 위한 강력한 전제 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의 공간이 반드시 석호(조진웅 분)와 예진(김지수 분)의 집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집으로 옮겨 가더라도, 혹은 호텔이나 레스토랑 같은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더라도 이야기는 이어질 수 있다.

이야기가 공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는 건, 사건 역시 그 공간 안에서 집중된다는 뜻이다. 다시, 그 내부의 인물들은 공간과 사건에 집중해야만 한다. 독창적인 태도로 사건을 대하는 인물과 성격들이 포진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 없는 공간, 집중된 사건, 차별적이지 않은 인물들로 인해 이야기는 흥미를 잃게 된다. 〈완벽한 타인〉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개성을 잘 드러낼 성격들이 끌고 가야만 하는 이야기다. 그 완성도가 떨어진다면, 영화는 생기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석호, 예진, 태수(유해진 분), 수현(염정아 분), 준모(이서진 분), 세경(송하윤 분), 영배(윤경호 분)의 캐릭터는 연출의 공력과 맞아떨어지면서 충분한 상승효과를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한껏 기량을 뽐낸 수현 역 염정아의 연기는 놀라운 공감을 자아낸다. 아이들과 시어머니 앞에서 집을 나서며 당부를 잊지 않는 중년 주부의 얼굴과 시를 공부하면서 여고 시절 감성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순수한 얼굴, 자기보다 부자로 사는 친구를 헐뜯으며 통쾌해하다가 그게 발각되자 어쩔 줄 모르는 얼굴, 남편이 ‘게이’임이 드러난 뒤 분노를 참지 못하는 아내의 얼굴이 놀라울 만큼 핍진하다.

영화는 1984년 어린 시절을 속초 영랑호 근처에서 함께 보냈던 네 소년이 34년이 지나고 각자의 아내들과 함께 모여서 집들이를 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인물 소개 시퀀스를 통해 관객은 이들이 모두 무언가 작지 않은 결핍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알게 된다. 정신과 의사인 예진은 딸 소영(지우 분)과의 갈등 속에서 정작 자신의 불안한 심리를 다스리지 못한다. 가슴 성형전문의인 석호는 아내와 딸의 갈등, 그리고 인정받지 못한 젊은 시절 콤플렉스를 자신의 가슴에 품고 산다. 태수와 수현의 부부 사이는 예전 같지 않으면서 무언가 위압적인 관계로 보인다. 준모와 세경은 죽고 못 사는 신혼이지만, 과도한 애정 표현 뒤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결핍으로 구성된 존재들, 영배가 함께 오기로 한 여자 친구 ‘민서’를 두고 혼자서 도착하면 중심 사건이 펼쳐진다. 문제는 핸드폰이다. 핸드폰을 열어 모두가 공유하자는 게임은 그것의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제안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핸드폰은 마셜 매클루언이 공언한 바와 같이 “인간 몸의 확장”, 아니 어쩌면 “인간의 몸” 그 자체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초반부에 이 게임을 집요하게 몰아붙이는 예진의 의도는 아리송하다. 결말에 이르러 예진이 준모의 또 다른 불륜 상대였다는 사실이 들통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예진에게 있어야 할 필연성이라면,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그 필연성을 제외한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 정당성을 향한 확신과 욕망이었을까?

핸드폰을 뒤집어 보자는 제안은 함께 앉은 자리에서 모두 벌거벗자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노출은 시대와 사회의 합의를 필요로 한다. 시대적 맥락과 사회적 특수성이 노출의 정도를 결정하고 용인한다. 그런 합의가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벌거벗는 일은 지극히 위험하기 그지없다. 역설적인 것은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러므로 주로 바스트 쇼트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카메라가 배우들의 하반신을 잡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마치 숨기고 싶은 핸드폰의 민낯이 곧 하반신으로 은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하반신에 대한 언급은 벌거벗은 속마음을 드러낸다. 예진의 뒤태를 보고 태수가 “야 근데 바지 너무 꽉 끼는 거 아냐?”라고 내뱉는 말은 오랜 친구 사이에 편하게 던질 수 있는, 그러나 음탕한 본심도 함께 드러내는 고백이 된다.

노출 게임은 모두가 숨겨 두고 싶었던, 아무리 수십 년을 함께 지냈어도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간직하고 싶었던, 이 세계 속에서는 공유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들추기 시작한다. 마흔이 훌쩍 넘었을 이들의 결핍은 겉으로 드러났던 문제들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고 심각하다. 성형외과 의사는 부동산 투자에 실패하고, 변호사는 아내 이외의 다른 여인과 더불어 음심을 채우고 있고, 레스토랑 주인은 신혼의 아내를 두고 여러 여성과 불륜 관계를 이어왔다. 그리고 노총각은 알고 보니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였다. 

정보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커뮤니티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정보가 있는가 하면, 일부만이 공유하는 정보도 있다. 주체만이 알고 있는 정보도 있다. 주체만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극히 일부 타인과 교환할 수 있는 정보도 있고, 아무에게도 승인받지 않으려고 하는, 철저히 숨겨진 정보도 있다. 철저히 숨겨진 정보를 우리는 ‘비밀’이라고 부르고, 주체는 이것을 다른 세계 속에 노출하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3. 성립 불가능한 명제, ‘완벽한 타인’

완벽한 타인이라는 명제는 처음부터 성립 불가능하다. 타인은 완벽할 수 없다. 주체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체와 타인은 그 불완전성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타인이 완벽하다는 건 주체 또한 완벽하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인간은 타인 없이도 존재할 수 있게 된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들의 결핍은 친구라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주체는 던져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을 찾지만, 타인 역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주체와 타인은 모순과 갈등으로 뒤범벅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월식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영화에서 월식은 그저 시간적 배경을 표현하는 장치만은 아니다. 다소 여러 번 월식이라는 상징을 보여줌으로써 영화가 아슬아슬하게 “친절한 빨간펜 선생님”이 될 것 같은 위기도 없지 않지만, 달과 지구의 그림자가 겹쳐지면서 밝은 달이 문득 사라져 버리게 될 때, 그것은 지금 여기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 타인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영랑호의 상징도 비슷하다. 강과 바다라는 이중 정체성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복잡한 존재를 특정한 정체성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함의가 내포돼 있다. 그렇게 복잡한 정체성 은폐와 노출, 전치, 전환의 과정을 이해할 때만,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문제는 주체 안의 다중 주체다. 타인은 주체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내부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자기 안의 수많은 타인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 타인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만나며 겸손하게 그를 인정하는 일, 그들의 정체성을 간단명료하게 획분하지 않으면서 그 복잡성을 승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로 바로 설 수 있다. 

 


임대근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문화콘텐츠비평가, 사단법인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 중국영화포럼 부대표, 한국영화학회 총무이사. 중국영화, 대중문화, 문화콘텐츠 등에 관심을 갖고 강의, 연구, 번역 등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 최근에는 한-중 영화의 초국적 교류와 상호 관객성, 이야기 구성의 원리로서 트랜스아이덴티티 문제를 연구 중. dagenny@daum.net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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