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암수살인] 피해자의 심경에서 상상한다는 것
[2019 오늘의 영화 - 암수살인] 피해자의 심경에서 상상한다는 것
  • 김시균(매일경제 문화부기자)
  • 승인 2019.04.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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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박스

역수사의 플롯, 전복의 구도

영화 〈암수살인〉(감독 김태균)은 살인마 강태오(주지훈)가 부산 자갈치시장 칼국수집에서 체포되는 장면으로 닻을 올린다. 이 같은 출발은 그동안 한국 범죄물에서는 발견할 수 없던 접근 방식이었다. ‘추적하는 형사와 달아나는 범인’이라는 클리셰화된 도식을 초입부터 허문 것이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이미 수인囚人이 된 부동의 신세다. 형사만이 움직임이 자유로운 동적 존재로, 이는 기존의 형사- 범인 구도의 전복이다.

여기엔 하나의 게임이 개입돼 있다. 범인이 진실과 허구를 뒤섞은 B·C·D의 추가살인 자백을 건네면 형사는 이를 받아 피해자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진실이 증명된다. 범인은 자신의 세치 혀에 의존하는 형사가 증거 찾기에 실패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자신이 던진 자백이 연이어 입증에 실패한다면 결국엔 A살인마저 무혐의 처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출소될 것이다(전직 형사 송경수는 이게 가능한 일임을 후배 형사 김형민에게 알린다).

이것은 범인이 쓴 각본이다. 물론 형사도 이 각본의 위험성을 안다. 시작부터 그는 대단히 불리한 처지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으므로, 자백을 받아내려면 범인이 원하는 금액의 영치금과 물품을 매 접견마다 건네줘야 한다. 이는 혐의 입증에 불리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범인은 이를 알기에 돈 많은 형사를 조롱한다. "행님, 아이큐 백 안 되지요?" 범인의 자백에 의거해 피해자를 찾아야지만 진실이 증명된다는 것. 이러한 역逆수사 플롯은 그 자체로 극에 긴장과 서스펜스를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익숙하지 않은 접근인 데다 이야기 흐름을 쉽게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신선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암수살인〉이 진정으로 값진 건 그 너머에 있다고 나는 본다. 역수사 플롯의 짜임새는 충분히 흥미로우나, 서사의 종착지가 결국 김형민(김윤석)의 승리일 것임을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값지다는 것인가. 바로 배제의 미학이 거둔 윤리성이다. 〈암수살인〉은 범죄물이지만 폭력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 그러면서 피해자 개개인의 감추어진 사연을 찾아서 듣는 데 골몰한다. 강태오의 게임을 수락한 듯 보이나 김형민의 진짜 관심은 그게 다가 아니다. 사라진 피해자 개개인을 찾아내 진실로 애도한다는 것.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그는 피해자의 심경에서 상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줄 안다.

ⓒ쇼박스

배제의 미학으로 구축한 윤리성

극의 출발부터 살인마 강태오는 부동의 존재다. 그는 거리를 활보할 수 없다. 이미 옥중에 갇혀 있고 육체적 자유는 박탈당했다. 20대 여성 허수진의 살인 피의자로 체포됐기에 극 내내 그의 활동 범위는 세 곳으로 제약된다. 교도소 접견실과 독방 그리고 법정.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추격자〉(감독 나홍진)와 〈조디악〉(감독 데이빗 핀처)이다. 전자가 지영민(하정우)의 체포 뒤에도 그가 다시 거리를 활보하리라는 불안과 함께 극에 강한 긴장을 부여한다면, 후자는 언제 어디서 조디악의 살인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무작위성이 짙은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강태오에겐 그럴 여지가 애초에 차단돼 있다.

이 영화는 많은 걸 배제한다. 현 시점에서 강태오의 추가 범행 가능성은 없다. 말을 제외한 몸의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말의 활동조차 김형민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추격자’의 전후반부나 ‘조디악’의 전반부에서 보게 되는 끔찍한 이미지들은 〈암수살인〉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죽는 순간 피해자들의 외마디 비명도, 참혹한 시체도, 피칠갑된 공간도, 범행 도구가 자아내는 서늘함도 이 영화에는 없다. 쫓는 형사와 쫓기는 범인 간의 추격전 또한 없기에 긴박한 스릴 역시 느끼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암수살인〉은 잔혹성을 전시하지 않는 영화다.

대신에 주목하는 건 접견실이라는 공간이다. 성격도 목적도 판이한 두 남자가 상호 반복해서 대면한다. 한 쪽이 게임을 제안했고 다른 한 쪽은 수락했다. 아니, 수락한 듯 행동했다. 김형민의 시선과 조형사의 캠코더는 살인마 강태오의 자백을 유심히 듣는다. 그러면서 지켜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이 검은 악마는 김형민을 조롱하고, 도발하고, 웃고, 소리친다. 때로는 이성적인 듯싶다가도 때로는 비非이성의 광기에 도취된다. 그는 종잡을 수 없다(극 중반부, 독방에 엎드린 그는 검은 펜으로 불교의 수호신을 닮은 그림을 휘갈겨 완성한다. 그러곤 벽면에 있는 달마대사 그림 옆에 나란히 붙인다. 이 불쾌한 악마적 형상은 강태오 자신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김형민은 그런 그를 어떻게 마주하는가. 우선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절대 동요하지도 않는다. 애써 받아주는 척하되 이따금 도발하며 맞선다. 이 보이지 않는 팽팽한 심리전은 접견실이라는 대결장場에 전에 없던 긴장감을 주조해낸다.

폭력적 이미지의 배제는 텍스트 내외적 제약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내적으로는 역수사 플롯이라는 점에서, 외적으로는 실화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의 범죄를 예상할 수 없고, 과거의 범죄는 김형민의 머릿속 재연이나 피해자들의 플래시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거의 재연과 플래시백에서 있는 그대로의 참혹한 살해 현장이 복원되기란 힘들다.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되어서다. 후자의 경우엔 피해자 유가족들이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실정이므로, 폭력의 재연은 그 자체로 문제될 소지가 있다. 

어쨌거나 이 모든 배제는 〈암수살인〉의 미덕으로 승화한다. 빼고 없앰으로써 〈암수살인〉만의 윤리적 지평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강태오는 갇혀 있고, 김형민은 움직인다. 고로 우리는 자연히 후자의 활동에 집중한다. 후자의 활동에 집중하면서 마주하는 건 그가 일군 윤리의 신新지평이다. 

ⓒ쇼박스

피해자의 심경에서 상상한다는 것

극 중후반 법정에서 그는 말한다. “죽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한 번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라고. 한 남자 살인 사건을 파헤치며 어렵사리 강태오를 법정에 세웠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되려던 순간이다.

“죽은 피해자는 단 한 차례 칼을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여러 군데 칼에 찔려 사망을 했습니다. 처음 목에 맞아서 큰 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자기 목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봤었을 겁니다. 자기를 찌르는 범인 얼굴이 보이고 또다시 칼이 자기 살을 찢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웠겠습니까.”

그는 피해자 입장에서 상상한다. 죽은 이의 주변인을 찾아 누비며 이야기 조각들부터 모은다. 그런 다음 그 모은 조각들을 꿰맞춰 상상해본다. 그들이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웠을지”를. 그들이 느꼈을 고통을 그는 최대한 나의 고통인 것처럼 느낀다. 아니, 느껴보려 노력한다.

앞선 법정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극 초중반 그는 실종된 오지희의 할머니를 찾아간다. 피해자 가족 곁에서 그는 그저 말없이 듣고 있다. 우리 지희가 수영을 잘 했다, 옷가게를 한다고 들었는데 경찰들이 술집에서 일했다고 그러더라. 돌아 나온 그는 상상한다. 이어지는 건 그의 상상 신(과거 재연)이다. 살해 현장이 재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신은 상당히 섬뜩하다. 김형민이 죽은 피해자의 심경에 최대한 다가가 상상했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남자의 여동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오빠 그리 되고 나서, 엄마도 한 몇 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작년에 풍까지 맞았습니더. 솔직히 우리 경찰 안 믿습니다.” 그는 힘없이 답한다. “사실 저도 잘 안 믿습니더.” 그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는 경찰은 안 믿는다. 피해자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존재를 그는 믿지 않는다. 그래서 홀로 나선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암수살인 범죄를 어떻게든 세상 바깥으로 드러내려 한다. 그것만이 억울한 피해자를 진혼鎭魂하는 길이라 그는 믿는다.

그간 우리는 이러한 캐릭터를 보아온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없고 영화에서도 없을 것이다. 다수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 냉기 가득한 세계에 김형민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더 소중하다. 

피해자들의 심경에서 생각한다는 것.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이를 마치 나의 고통처럼 느껴본다는 것.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워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망각한 괴물과 기억한 인간의 싸움이 결국 인간의 승리로 귀결되는 건 당연한 결과일 터다.

그리하여 마지막 신에 이른다. 허허벌판에 김형민이 홀로 외롭게 서 있다. 때는 저물녘인 듯싶고, 갈대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그 가운데 우두커니 선 그가 허공을 향해 토해내듯 말한다. “어데있노, 니"

박미영 사건은 종결됐다. 살인마 강태오는 패소해 무기징역을 받았다. 하지만 김형민은 기쁘지가 않다. 그럴 수가 없어서다. 아직 과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사라진 피해자들은 남아 있고, 그들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니 계속 찾아야 한다. 당신의 심경에서 상상하고, 당신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면서.

그의 진실한 애도는 쉬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김시균 매일경제 문화부에서 영화와 클래식 기사를 쓴다. 영화가 우리 삶을 구원하리라 굳게 믿고 있다. sigyun3814@gmail.com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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