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셰이프 오브 워터] 각기 다른 것들의 가치를 드러낸 ‘사랑이야기’
[2019 오늘의 영화 - 셰이프 오브 워터] 각기 다른 것들의 가치를 드러낸 ‘사랑이야기’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1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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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폭스 코리아

사랑에도 모양이 있을까? 간혹 외국 영화의 제목이 한국어로 바뀔 때 의아한 순간들이 있는데, 〈셰이프 오브 워터〉가 〈사랑의 모양〉으로 해석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굳이 따지자면 물의 모양 정도가 될 터인데, 굳이 사랑의 모양이라고 덧붙인 것을 보니, 이것은 사랑이야기라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기괴한 괴물이 등장하는 크리처물이나 판타지로 보기보다, 로맨스로 영화를 읽어주세요라는 간절한 바람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셰이프 오브 워터〉가 크리처물이나 S.F 혹은 판타지로 읽힐 여지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이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 모든 이종교배적 설정이 전혀 이상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상상과 현실을 하나의 에피스테메 위에 올리고, 불가능한 역설과 가능한 진실을 함께 다루는 작가로 워낙 정평이 나 있으니까. 그에게 이 세상은 잔혹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곳이며, 그 잔혹한 아름다움이라는 역설 가운데서 삶의 진짜 의미 즉, 아이러니가 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이프 오브 워터〉는 그 기괴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어떤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장 기예르모 델 토로 작품다우면서 한편으로 관능적이며 에로틱한 영화. 만약 에로스가 자기 안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상태의 반대말이라면 그러므로 다른 세상을 향해 나를 활짝 여는 것에 대한 지칭이라면 〈셰이프 오브 워터〉는 그야말로 매우 관능적이며 에로틱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세계는 아름답고 기괴하다. 그로테스크가 기괴한 아름다움을 가리킨다면, 기예르모 델 토로의 세계가 바로 그 단어의 정의항에 서 있을 법 하다. 〈판의 미로〉나 〈헬 보이〉 같은 세상을 보자면, 우리가 상상력의 전부라 믿었던 매끈하고, 유아적인 세계와 단숨에 결별하게 된다. 그렇지, 상상 속의 세상이 언제나 도자기처럼 차갑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피조물들의 공간은 아니었지, 때로는 비늘과 털이 무성한 괴수가 살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상상 속이었지, 하고 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그런 점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 그 세계 속의 간절한 소망을 전달해 주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로맨스이고, 살아 생전 한 번 쯤 해볼까말까 한 세기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시대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시대적 배경이다. 냉전이 한참이던 1960년대, 소련과 미국 중 누가 먼저 달에 사람을 보낼 것인가에 몰두하던 시절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결과로 경제적 혜택과 폭발적인 영향력 확장을 맛보았던 두 나라, 어떤 점에서 미국에게 있어 그때야말로 최고였던 시절이다.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대표를 자임하며 가장 앞선 과학적 기술과 그것이 암시하는 강력한 미래를 가진 나라였으니 말이다.

한편 1960년대는 미국 문화의 주축이었던, 영화가 점점 대중과 멀어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이 각자의 집을 공략하면서 사람들은 극장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고 불리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누구도 굳이, 발걸음을 옮겨, 극장에 가지 않았다.

주인공 엘리사가 사는 집 밑의 대형 극장에 늘 파리가 날리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극장은 추억을 되씹기 위해 찾아오는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말았다. 엘리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의지처인 옆집 남자 자일스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맥락도 유사하다. 이제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지 예전처럼 그림을 구매하지 않는다. 상업 광고용 그림을 그리던 자일스는 그렇게 천천히 중심에서 밀려났다.

영화의 인물들은 이렇게 가장 1960년대 다우면서 한편 1960년대라는 새로움과는 거리를 둔 인물들이다. 조금은 지나간 것들에 매달려 살아가던, 고집스럽고 조금은 미련한 사람들, 새로운 것, 과학, 기술에 넋이 나가 있던 그때,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소중한 가치를 모두 대변하던 시대, 엘리사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엘리사에게 소중한 것은 다만 감각적인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속 1960년대는 음악감독 알렉상드르 플랑드르가 선택한 고전적 재즈 음악들과 함께 고즈넉하게 흘러간다. 돈과 기술이 넘쳐났다고 해서 1960년대가 천국은 아니다. 공공연히 차별과 폭력이 일어나던 곳, 흑인에 대한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과격한 혐오, 장애인에 대한 비하, 여성차별 등 아직 부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했던 인권의 미숙함이 고스란히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금껏 인상적 조역으로만 여겨졌던 샐리 호킨스의 눈부신 연기이다. 그녀는 빗방울을 따라 흐르는 시선이나 수화를 건네는 손동작만으로 말 이상의 감정과 정서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다운 미술은 가히 압도적이다. 욕실 전체에 물을 가뜩 채워 두고 두 사람이 둥둥 떠 있는 그 장면은 그것은 사랑이었노라, 라는 말 이외의 어떤 것도 떠오르게 하지 않는 마술을 발휘한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사랑은 움직이는 것

주인공 엘리사가 목소리를 잃은 장애인이라는 것, 가장 친한 친구가 게이와 흑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목소리를 잃고 남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엘리사였기에 종이 완전히 다른 생명체의 메시지를 읽고, 소통한다. 엘리사에게는 그 생명체의 외모나 그것의 과학적 활용처가 중요하지않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어떤 기적과 닮아 있다. 그것은 말로, 그러니까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로 전개되는 감정이 아니다. 그렇게 엘리사는 낯선 생명체와 사랑에 빠진다.

엘리사가 ‘괴물’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이다. 엘리사는 교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어떤 외적 기준들 그러니까, 남자, 여자, 흑인, 백인, 중산층, 노인 등의 여러 표지에 의해 판단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엘리사와 가장 반대에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낯선 생명체를 괴롭히는 리차드이다.

그는 소변을 보기 전에 손을 씻고 소변을 본 후엔 씻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다. 그는 자기 신체 일부를 만지기 전에는 손을 씻지만 타인의 손을 잡기 전엔 손을 씻지 않는다. 그 신체 일부가 타인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초가 남미 어느 늪에서 잡아온 피조물을 고문하고 괴롭힌다. 그 피조물은 비록 우리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의사소통도 되고 감정의 교류도 가능하다. 하지만 마초 관리자에게 그 피조물은 열등하고 이상한 물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관리자에게는 자신과 생김새가 다른 모든 게 다 열등하다는 사실이다. 흑인은 피부색이 다르니 열등하다. 여성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우선 생물학적으로 다른 몸을 가졌으니 열등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엘리사가 열등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신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형상으로 인류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형상’은 백인 남성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백인 남자가 가장 신에 가까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금씩 결격 사유를 지닌 열등한 존재이다. 결함을 가진 이상 여자나 괴물이나 흑인이나 괴물이나 모두 다 똑같이 열등하다.

영화의 놀라운 힘은 무시 받고, 협박받고, 천대받는 그들이 힘을 모을 때 발휘된다. 물속 피조물이나 말 못하는 여성이나 다 똑같이 열등하다면 적어도 그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없다. 엘리사가 연구소에서 피조물을 구출하려 할 때,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라”라며 만류한다. 하지만 적어도 엘리사에게 그 피조물은 우리보다 열등한 생명체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체이다. 즉 그 피조물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똑같은 존재이니 사랑에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함과 차별로 이뤄진 게 아니라 생명을 가졌다면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똑같은 존재인 셈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결국 사랑 이야기이다. 인류가 이 땅에 살아온 이후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사랑의 이야기. 그것은 비단 인간과 인간 종 간의 것에 멈추는 것은 아니리라. 사랑 앞에 다르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각기 다른 것들이 그것 나름의 가치와 색깔, 의미를 지니고 저절로 형형한 빛깔을 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기예르모 델 토로가 생각하는 유토피아, 헤테로피아로서의 천국일 것이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동아일보》 영화평론 입선. 저서로 『오이디푸스의 숲』 등이 있음. 강남대 교수.  noxkang@hanmail.net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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