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살아남은 아이] 세상과의 진실 싸움, 무엇이 중요한가
[2019 오늘의 영화 - 살아남은 아이] 세상과의 진실 싸움, 무엇이 중요한가
  • 정재형(영화평론가, 동국대교수)
  • 승인 2019.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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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아트하우스, 엣나인필름

1. 영화는 진실을 탐구한다

세상사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표피와 진실. 우리가 인식하는 삶의 모습들은 대체로 표피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다. 삶은 표피로서 존재하며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일상의 많은 사건, 사고들이 그렇다. 법과 제도로서 규정된 것들은 그저 표피일 뿐이고 진실은 말해지지 않는다. 결국 진실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근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화두 중 하나는 세월호였고 세월호의 진실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세월호의 표피적인 사실은 피해자의 상실감이라는 것이었다. 피해자의 상실감, 억울함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면서 영화에도 그와 같은 주제가 묘사되어 왔다. 〈살아남은 아이〉는 그러한 주제를 갖는 우화적인 영화임에 분명하다. 이 영화는 죽은 아이와 살아남은 아이, 그리고 피해자 부모가 존재한다. 영화는 피해자 부모가 겪는 상실감과 억울함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기능이란 바로 그와 같은 보편적인 소재나 주제를 통해 숨겨진 진실을 추적하는 것이다. 숨겨진 진실이란 플라톤의 이데아다. 피해자들이 갖는 상실감의 상대편엔 진실을 숨기며 생존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허위의식이 있다. 그건 삶을 가장한 껍데기, 즉 표피일 뿐이다. 그 허위적 삶은 본질을 모방하되 그저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허깨비 같은 삶이다. 영화는 그 꼭두의 삶을 깨버리고 진실을 향한 깊은 사유를 지향하는 매체인 것이다. 

ⓒCGV아트하우스, 엣나인필름

2. 진실 탐구,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영화는 성철, 미숙, 죽은 아들 은찬이 구했다고 알려진 살아남은 아이 기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맨처음 그들의 갈등은 성철이 기현을 데려다 일을 시키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첫 번째 갈등은 그것을 반대하는 미숙과 성철과의 갈등이다. 미숙이 성철의 행위를 반대한 이유는 은찬을 죽게 한 원인 제공자 기현에게 어떻게 동정을 베풀 수 있는가라는 의식이었다. 반대로 성철은 죽은 은찬의 유지를 조금이라도 이어받는 길은 그가 남긴 아이에게 동정을 베푸는 거였다. 이어 미숙은 기현을 받아들이면서 성철과 같은 생각으로 변한다. 미숙은 처음에 자식에 관한 이기적 사랑에 집착했지만 기현을 받아들이면서 박애주의로 변한 것이다. 기현은 은찬의 분신 혹은 연속성으로서 피해자의 상실감을 보상하던 의미체로 기능했다.

영화는 그 단계에 머물지 않고 두 번째 갈등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기현이 그날의 진실을 밝힌 이후 은찬을 죽인 다수의 ‘그들’과 그들을 감싸는 세상과 성철, 미숙의 갈등이 시작된다. 성철과 미숙은 진실을 규명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세상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피해자와 세상(시스템)과의 싸움이 본격화된다. 피해자는 진실을 캐내지 못한다. 영화는 세상일이 항상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은유화한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질문은 이처럼 단순하다. 세월호도 결국 그것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도 그 질문을 똑같이 반복한다. 과연 기현의 말대로 다수 아이들이 준영을 괴롭히다가 그를 말리는 은찬에게로 화살이 돌아가 모두 은찬을 가해하다 그가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현을 살리다가 은찬이 죽었다는 말조차 기현이 주도해서 한 것인지, 다수 애들이 기현에게 시킨 건지, 그들과 기현이 같이 공모한 건지 그것 또한 알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떠오른다. 〈라쇼몽〉은 그렇게 말한다. 어차피 객관적인 진실은 없다. 진실이란 그렇게 믿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의 방향도 대체로 〈라쇼몽〉과 비슷한 결말을 향해 간다.

극도의 불신상태에 다다른 성철은 기현의 목을 조르며 죽이고 싶어한다. 가까스로 살아난 기현은 자살을 통해 본인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한 행위로 진실이 드러난 것일까? 기현이 결백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게 거짓말이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의지할 곳이 성철과 미숙뿐이었는데 그들에게조차 버림받는다고 생각하니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 수 없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는 채 영화는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영화는 진실이 무엇인지 증명해내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기현을 살리러 물에 뛰어들어간 미숙과 성철의 행동에 포커스를 맞춘다.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둘은 기현을 죽은 아들 대신으로 생각하고 그를 여전히 동정하면 된다. 그래야 둘의 마음이 풀리고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본질이 아니라 실존의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CGV아트하우스, 엣나인필름

3. 실존적이며 부도덕한 인간의 탄생

기현에 의하면 진실은 이렇다. 준영이를 괴롭히다가 그걸 말리는 은찬을 죽인 것이다. 결국 은찬은 준영을 살린 격이다. 살아남은 아이는 기현이 아니라 준영이 된다. 준영은 살았으나 다른 애들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비겁한 아이다. 기현에 의하면 살아남은 아이는 비겁한 아이고 의사자로 지정된 은찬은 허위다. 여기까지가 기현의 논리지만 결과적으로 은찬은 기현아닌 준영을 구했어도 누군가를 구했다는 점에서 의사자가 맞긴 맞다. 의사자 은찬. 그 사실은 허위 속에서 우리들의 삶이 영위된다는 은유다. 

〈살아남은 아이〉의 표피적인 주인공은 기현을 통해 드러난 진실을 입증하려는 성철이다. 하지만 영화의 방점은 성철이 아니라 기현에 가 있다. 왜냐하면 기현이 바로 문제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현과 같은 인간은 잔잔한 일상에 균열을 내어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성찰을 유도해 내는 기능을 한다. 대부분 인간은 위선 속에서 살지만 문득 한 인물이 양심고백하면서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인간의 나약함과 비극의 본질이 노출된다. 〈살아남은 아이〉의 핵심적인 갈등은 무엇일까. 어쩌면 성철, 미숙도 아니고, 기현과 다수의 ‘그들’일 수 있다. 기현을 문제적 개인으로 보면 그를 문제시하는 다수의 세상과의 갈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개인과 체제와의 갈등을 그린 영화다. 기현은 자신도 조직의 일원이면서도 그 조직의 은폐된 부조리를 고발하는 자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조직으로부터 내몰리고 심하면 제거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내부고발자로서의 기현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

ⓒCGV아트하우스, 엣나인필름

영화의 출발에서 다르덴 형제의 〈아들〉을 살짝 모티프로 설정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를 설정하진 않는다. 아들을 죽게 한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의 원형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가 단지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영화가 내면적으로 더 닮은 것은 감독이 전혀 보지 않았다고 추정되는 낯설은 걸작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다. 기현의 거짓말로 형성된 은찬의 의사자 설정 아이러니 상황은 〈순교자〉에서 배교하고 죽은 목사들을 순교자로 탈바꿈시킨 살아남은 목사의 미스테리한 행위와 흡사하다. 그러한 인간의 갈등양상은 욥, 도스토옙스키, 카뮈, 브레송, 다르덴으로 이어지고 김은국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실존주의적 개념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도덕한 실존은 단적으로 카뮈의 〈이방인〉에서 그려진 뫼르소의 부도덕함으로 대변되고 영화적으로 브레송의 〈소매치기〉나 다르덴의 〈아들〉로 이어진다. 〈살아남은 아이〉에서 기현의 위선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다수의 허위의식에 맞선 개인의 부도덕으로 생존하는 것이다. 기현을 보듬을 수밖에 없는 성철과 미숙의 입장도 결국은 그것으로 회귀한다. 진실규명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싸르트르에 의하면 실존은 본질을 선행하는 것이다. 기현이 거짓말을 했든 다수가 거짓말을 했든 실존 이상으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피해자가 살아가기 위해선 다수에게 버림받은 기현을 껴안고 굳건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허위에는 허위로 맞서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 의식이 현대인을 대변하는 실존주의적 삶의 방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전히 실존주의 의식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재형 한국영화학회회장, 영화평론가협회회장 역임, 현재 동국대 교수. 저서로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이 있음. jhjung@dongguk.edu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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