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완벽한 사랑의 밀어
[2019 오늘의 영화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완벽한 사랑의 밀어
  • 송경원(영화평론가)
  • 승인 2019.12.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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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픽처스 코리아

“이토록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오지 않아요.” 숱한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달콤함 사이에서 등대처럼 빛나는 대사를 하나 고른다면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속 확신에 찬 한 마디를 꼽겠다. 자유로운 사진작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일상의 권태 아래 서서히 잠겨가던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의 영혼을 일깨운다. 이후 두 사람이 함께 떠났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행복했습니다’는 막연한 대리만족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오늘의 떨림을 놓치지 않고 화면에 잡아두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프란체스카는 들끓는 내면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표정을 억눌러 보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미세한 떨림을 전부 숨기지는 못한다. 솜털의 움직임마저 들릴까 숨 죽이게 만드는 그 장면의 긴장감은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의 열기를 닮았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며 불현듯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프란체스카가 떠올랐다. 2007년 발간된 안드레 애치먼 작가의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을 각색해 영화화한 이 작품은 한여름 열기처럼 들뜨고 설레는 사랑의 순간들을 담아낸다.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1983년 여름, 이탈리아 근교의 별장에 17살 소년 엘리오(티모시 살라메)와 그의 가족이 머물고 있다. 고고학자인 아버지 펄먼 교수(마이클 스틸버그)는 매년 여름 젊은 학자 한 명을 별장으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곤 해왔다. 그해 여름 24살의 미국 청년 올리버(아미 해머)가 손님으로 초대되어 아버지의 책 출간을 돕는다. 엘리오는 새로운 손님에게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관심 없는 척 거리를 둔다. 하지만 축복처럼 햇살이 쏟아지던 그해 여름 엘리오는 계속 눈가에 밟히는 올리버를 통해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뜬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아마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정반대에 놓인 영화일 것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영혼을 울리는 떨림을 속을 삭히는 멜로드라마였다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나를 네 이름으로 불러줘’라는 고백처럼 사랑의 숨결을 온 힘을 다해 토해내는 뜨거운 로맨스의 흔적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두 영화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순간이라는 정서를 공유한다. 같은 수원에서 흘러나온 서로 다른 물줄기라고 해도 좋겠다. 두 영화가 공유하고 전파하는 것은 사랑이라 불리는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진동, 그 떨림이 주변에 남기는 것들을 남김없이 기록하고자 하는 태도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첫 섹스를 나누던 밤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말한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께.” 이름을 교환해서 부르는 이 장면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고백일 것이다. 네가 되는 꿈. 끝내 너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것까지 아낌없이 공유할 수 있는 관계. 엘리오에게 “나를 네 이름으로 불러줘”라는 말하는 올리버의 들뜬 요청이 “확실한 감정을 붙잡으라”던 로버트의 떨리는 호소와 겹쳐 보이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원작 소설에 대해 “정말 섹시하다”고 압축·정리했던 〈뉴욕타임스〉의 서평처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이 허락한 관능적인 순간들을 한여름 눈가를 어지럽히는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이미지들로 담아낸다. 

ⓒ소니 픽처스 코리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없는 것, 부재를 통해 더욱 선명해지는 사랑의 시간 동성애에 눈을 뜨는 소년의 흔들리는 내면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소년의 커밍아웃 자체를 대단한 사건인양 집중하거나 호들갑 떨지 않는다. 영화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건 첫사랑의 열병과 사랑을 들킨 소년의 수줍은 마음이다. 억눌러도 숨길 수 없는 사랑의 흔적들은 영화 곳곳에 욕망의 제스처를 남긴다. 총명하고 조숙한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자신을 봐달라는 양 괜히 지식을 뽐내다가도 행여 말이 넘쳐 마음을 들킬까 매번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건다. 시선을 감추려 괜히 선글라스를 써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올리버 주위를 맴돌고 있는 엘리오의 동선은 그 자체로 강력한 사랑의 신호나 다름없다. “마음을 드러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로맨스 소설의 한 구절을 구태여 인용하며 새초롬하게 돌아서는 엘리오의 모습은 꾹 참으면서도 미처 꼬리 흔들기를 감추지 못하는 강아지마냥 귀엽고 사랑스럽다. 놀라운 것은 이토록 은밀하고 개인적인 흔들림을 영화는 단 한 번도 입밖에 내거나 설명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없다. 원작 『그해, 여름 손님』은 1인칭 자기고백과 회고담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소설에는 적합한 형식이지만 막상 장면으로 옮기기엔 난감하다. 그런데 각색을 맡은 제임스 아이보리는 심지어 1인칭 내레이션조차 배제한 뒤 겉과 속이 다른 소년의 행보를 오롯이 그려내는 마법을 구사한다. 영화 속 엘리오는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일부러 올리버를 차갑게 대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지나치지 않았는지, 혹여 올리버가 멀어져 버리면 어떻게 할지 내내 불안에 시달린다. 소설에서는 그 분열된 행동과 내면을 동시에 서술해버리지만 영화는 내레이션 하나 없이 그저 행동들만을 ‘보여준다’. 덕분에 적지 않은 관객들이 중반까지 엘리오가 올리버를 열망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결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진가, 팽팽한 긴장감과 설렘은 초중반 긴가민가하고 모호한 분위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다. 보이지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관객은 밝은 눈으로 인물들의 몸짓 하나 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끝내 엘리오의 서툰 불안에 동조할 수 있다.

ⓒ소니 픽처스 코리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는 노골적인 시점 쇼트와 클로즈업도 거의 없다. 풍경을 담는데 일가견이 있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탈리아 북부 평평한 대지를 담요처럼 깔아 두고, 부드럽게 굽이치는 강물이 더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요로운 정경을 쌓아 나간다. 그 위에 자연광의 강렬하고 선명한 햇살을 얹으면 평범한 시골의 여름 풍경마저 관능적으로 변모한다. 특유의 섬세하고 강렬한 터치로 완성한 이탈리아 시골 마을은 배우들의 미묘한 떨림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최상의 무대나 다름없다. 덕분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흔한 시점 쇼트와 클로즈업을 거의 쓰지 않고 인물의 실루엣과 몸짓만으로 말로 못 다한 감정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나간다. 가령 엘리오와 올리버가 마주하는 장면은 눈부신 햇살부터 은은한 달빛까지 항상 빛이 넘쳐난다. 서로를 갈망하는 두 사람의 실루엣은 이로써 더욱 선명해진다. 반면 엘리오가 올리버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사귄 여자친구 마르치아(에스더 가렐)와 밀회는 대부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공간에서 이뤄진다. 

마지막으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는 자극적인 사건과 혐오의 시선이 없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이 대개 동성애를 불편한 사건 취급하며 외부의 압박과 시련을 배치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선 조금 특별한 방식의 사랑에 불과한 것처럼 다뤄진다. 동성애에 대한 저항감이 훨씬 심했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등장인물 그 누구도 동성애를 적대하지 않고 혐오의 언어를 함부로 내뱉지 않는다. 이름 모를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은 마치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낙원처럼 평화롭다. 그렇게 영화는 외적인 변수와 사건들을 다 제거하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엘리오와 올리버 두 사람의 교감에 오롯이 집중한다. 덕분에 이들의 수줍고 설레는 사랑을 온전하고 자연스러운 경험으로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특히 영화 말미 엘리오의 아버지 펄먼의 현명한 조언은 엘리오는 물론 관객의 마음 한 구석 피어나는 불안마저 온화하게 다독이며 이들의 사랑과 지나간 여름, 다시 오지 않을 인생의 한 페이지를 축복한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본질은 단순하다. 이것은 날카롭고도 충만했던 첫 사랑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할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는지 깨달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에서 이어지는 이른 바 ‘욕망 3부작’의 마침표를 찍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지나간 시절.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햇살 속의 아른거림. 그리고 사랑에 빠진 순간에 일어나는 변화들. 그렇게 영화 속 올리버의 마지막 한 마디는 첫 사랑을 겪은 모두에게 잊지 못할 마법의 주문을 남긴다. “나도 너와 같아. 나도 전부 다 기억해.”

 

 


송경원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씨네 21》 등에 영화평론 기고. 제14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제1회 시네마테크부산 비평공모 가작, 제2회 게임비평공모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수상. sokimera@naver.com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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