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어느 가족] 담장 안 현실을 질문하는 판타지
[2019 오늘의 영화 - 어느 가족] 담장 안 현실을 질문하는 판타지
  • 안숭범(영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 승인 201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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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는 자연발생적 공동체에 가깝다.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엮인 그 구성원들은 사랑이라는 신비를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 아래 결속한다. 예컨대 우리 중 대다수에게 가족은 나를 여기 있게 한 힘이다. 존재의 가장 따뜻한 배후이면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상당수의 역사다.

이 같은 언명은 진실에 가깝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의 믿음을 기반으로 형성·유지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창조한 인물들은 그 믿음 아래 감춰진 기이한 결핍과 균열을 반사하는 인물들이다. 그의 첫 장편 〈환상의 빛〉 속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분)는 학창시절 죽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내내 떨치지 못한다.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가족을 꾸리게 된 그녀는 이번엔 남편의 자살 이후 생긴 그 충격적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 〈아무도 모른다〉의 사남매는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엄마를 끈질기게 기다린다. 결핍 이전의 가족 상태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어떤 약속,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약속이 적힌 메모에 뼈아프게 의존한다. 이 같은 결핍에 대한 태도는 가족에 대한 믿음이 불러 온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그 믿음은 결국 사남매를 사회적 잉여의 자리로 던져 버린다.

〈어느 가족〉 속 가족의 출발점도 정확히 거기다. 이 가족은 사회적 시선에서 ‘정상성’ 혹은 ‘평범성’에서 벗어난 잉여의 자리에 놓여 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혈연관계, 즉 생득적으로 결속된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후적 선택에 의해 유사가족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죽은 남편의 집에서 그의 연금으로 연명하는 하츠에(기키 기린 분), 일용직 노동자이지만 도둑질에 더 능숙한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 전직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지금은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아키(마쓰오카 마유 분), 학교를 궁금해 하지만 도둑질부터 배운 쇼타(죠 카이리 분), 부모의 학대에서 벗어나 이 이상한 가족의 마지막 구성원이 된 유리(사사키 미유 분) 등이다.

이들은 가족에 대한 신화적 믿음이 향하는 방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혹은 그 믿음을 각기 다른 맥락에서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게 하는 인물들이다. 가족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구멍을 내는 틈새들이면서 그 자체로 미묘한 질문이기도 하다. 지면의 제약상 여기서는 쇼타와 유리에 의해 제기된 질문을 추수해고보자 한다. 그 이전에 공유해야 할 것은, 쇼타의 입에서 ‘스위미’라는 제목으로 언급된 교과서 속 우화가 이 영화 전반을 은유한다는 사실이다. 쇼타는 그것을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거대한 참치를 물리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작은 물고기들은 동정과 연민에 기초해 의지적으로 존속되는 이 유사가족의 구성원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참치는 제도권의 가족에 대한 규율적 시선일 수 있다. 이 시선은 내부를 단속하는 매우 힘 센 관성을 지닌다. 그 때문에 영민한 관객은 이 영화가 실패가 예견된 실험극이 란 걸 일찌감치 알게 된다. 아직 기성사회에 진입하지 않은 쇼타와 유리는 그러한 비극적인 전망을 배경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육박해 온다. 

먼저 쇼타의 의미론적 위치를 떠올려보기로 한다. 앞서 〈어느 가족〉의 인물들이 ‘가족’에 대한 신화의 균열점들, 그 틈새에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쇼타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 틈새를 들여다보며 사회적 자아를 획득해가는 경로에 있는 소년이다. 혹은 주체적 자각의 단계에 입사하기 직전에 와 있다. 유사가족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와 ‘우리’의 관계를 질문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 유사가족의 형성 과정엔 크고 작은 모순과 부도덕이 산재한다. 일단 그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가족 제도의 부작용을 웅변한다. 그들이 밥상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기반도 찜찜하기 그지없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그들이 생계의 안정성을 꾸려온 배경엔 하츠에의 죽은 전남편의 그림자가 있다.

그는 제도권이 명한 정조의무, 성실과 신의의 원칙을 위반한 채 딴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하츠에를 등지고 죽는다. 그러나 제도권은 하츠에에게 죽은 전남편의 집을 물려준 것은 물론 연금 수혜자 자격도 부여한다. 심지어 하츠에는 전남편이 밖에서 낳은 자식들을 찾아가 종종 생활비를 타오기까지 한다. 하츠에의 몫이 된 집과 돈은 매우 중요하다. 유사가족 구성원들이 ‘가정’이라는 생활 울타리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뒹굴다가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한 쇼타는 인정 많은 오사무로부터 도둑질을 배운다. 쇼타는 오사무를 좋아하지만 질문을 내려놓진 않는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얘들이 학교에 다니는 거 아녜요?”, “나를 구해줬을 때에도 뭘 훔치려다 날 발견했어요?” 이러한 질문은 자연발생적 혈연관계로 탄생한 가족과 지금 자신이 속한 유사가족 사이의 낙차에서 발원한다. 그러면서 쇼타는 집에서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곤 한다. 제도권이 정상성, 평범성으로 인준하는 ‘가족’과 ‘성장’을 궁금해 하는 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마트에서 양파를 훔치다 들켜 쫓기게 되었을 때 내린 선택은 내면의 압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높은 도로 위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스스로 달아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 행위는 쇼타가 오사무에게 했던 질문의 다른 판본이다. 영화 내 유사 가족구성원들과 영화 밖 우리에게 던진 최종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면,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결정적 근거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쇼타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경찰 앞으로 불려나가게 된 이 유사가족은 그들의 실존을 추궁당한다. 노부요는 오사무와 함께 진짜 남편을 살인한 치정극의 주인공으로 취급 받았던 적 있다. 이번에는 집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하츠에의 시신 뒤처리를 두고 살인, 시신 유기의 의심이 따라붙는다. 유리를 유괴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것은 물론, 쇼타의 지난날에 대해서는 아동 학대와 방기 혐의가 덧씌워진다.

유사가족에 대한 세간의 취조가 진행되는 영상은 참여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건조한 바스트 쇼트로 유사 가족들의 진심을 사실화하려 한다. 특히 쇼타와 유리의 유사 부모 역할을 해온 오사무, 노부요에게서 ‘유사’라는 수식어에 대한 입장을 들으려는 작심이 읽힌다. 이러한 연출이 영화적으로 훌륭한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오사무와 노부요가 ‘말한 것’과 ‘차마 말하지 못한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제3의 답을 준비하고 싶어진다. 유리를 돌보기 위해 세탁 공장을 나오기까지의 과정에서 노부요는 큰 희생을 반복해서 치른다. 또한 오사무의 본명(쇼타)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쇼타를 향하던 그의 온정적 태도에 우리가 모르는 진심이 있을 것이란 상상을 하게 된다. 진짜 가족에게 있는 생득적 ‘혈연’은 없지만 그들의 관계망엔 보기 드문 희생과 연민의 ‘사연’이 드리워져 있는 셈이다.

이제 또 다른 질문으로서 유리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녀는 “낳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부모 곁에서, 물리적·정서적 폭력이 일상화된 가정에서 유사 가족에게 구조된다. 그런데 그녀가 유사 가족의 일원이 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TV에서 그녀의 실종 소식이 방영된다. 이때 알게 된 그녀의 본명은 쥬리다. 그녀는 이 가족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은 존재인 것이다. 문제의 TV 장면을 본 오사무는 유리에게 집으로 돌아갈 거냐고 묻는다. 그때 그녀는 생득적 가족을 포기하고 유사 가족을 택한다. 이후 유리는 유리도, 쥬리도 아닌 새로운 이름 ‘린’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 이름은 그녀의 자발적 선택과 유사 가족의 선의의 포용에 의해 탄생한 정체성의 새로운 표지이기도 하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오사무를 통해 새 삶의 출구를 찾은 노부요는 유리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함께 목욕을 하던 노부요와 린은 서로의 팔뚝에 새겨진 유사한 흉터를 어루만져준다. 그렇게 노부요는 자연 획득되는 모성이 아닌, 의지적 결단과 정서적 유대로 얻어진 모성을 받아들인다.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말의 허구성을 주지시키며 린을 꼭 안아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치유의 관계는 의지적·정서적 결단을 전제한다. 윤리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인간적인 유대감의 힘을 상기시킨다. 이제 린은 ‘당신에게 진짜 가족이 있는가’를 묻는 상징적 피사체가 된다. 말수 적은 꼬마 소녀 린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에 합당한 태도를 되새기게 한다.

하츠에의 죽음 이후, 유사 가족은 사랑으로 소통하는 관계의 필요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다소 과장적인 과거사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처럼 무람없이 대할 수 있는 누군가가 가까이에 필요한 사람들이다. 〈어느 가족〉은 완전한 합일을 이룬 정서적 공동체의 순간을 두 번 보여준다. 먼저는 마루에 붙어 앉은 그들이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는 신이다. 비 그친 후의 밤하늘을 장식 중인 불꽃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순간의 판타지로 사라질 불꽃을 두고 그들은 생경한 감동을 느낀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해체되어 흩어질 유사 가족에 대한 우리의 시선과 이후 남겨질 여운에 대한 유비에 해당한다.

유사가족에게 찾아 온 두 번째 합일의 순간은 단연 바닷가 신이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그들은 활기차게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죽음을 예감한 하츠에는 멀찍한 곳에 홀로 앉아 있다. 그 순간 하츠에는 “다들… 고마웠어”라고 조용히 읊조린다. 그녀에게 그들은 상징적·물리적으로 두 번 죽은 남편의 빈자리를 메워준 식구들이었다. 이후 신에서 하츠에는 죽고 유사 가족 구성원들은 굳이 슬퍼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하츠에의 시신을 집 안에 묻고는, 아무렇지 않게 지금까지 해온 동거를 연장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아무 일 없음’을 통해 가족 구성원이면서 개별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을 상기시킨다.

영화 마지막 시퀀스에서 쇼타와 유리는 자연발생적·생득적 가족 공동체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쇼타가 오사무를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쇼타가 버스를 타고 혈육의 곁으로 되돌아가려는 순간, 오사무는 진심과 유리되는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 대신 쇼타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자 그 꽁무니를 뒤쫓으며 뭔가를 외친다. 버스 안에서 뒤늦게 오사무를 되돌아 본 쇼타는 선택에 의해 탄생한 두 번째 아빠를 바라보며 조용히 “아빠”라고 읊조린다. 함께 훔친 낚싯대로 거대한 참치를 낚진 못했지만, 그들이 보낸 시간이 신비한 공명을 일으킨 것이다 .

친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쥬리가 된 린은 무관심과 물리적 폭력이 횡행하는 벽돌 담장 안에 다시 갇힌다. 영화의 엔딩신은 그녀가 지금 행복할까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에 일정한 답을 준다. 혼자 무료하게 놀던 쥬리는 발뒤꿈치를 들고서 조용히 담장 밖을 응시한다. 쥬리의 표정을 경유해 우리는, 그녀가 유리이거나 린이었던 시절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도 밤하늘의 불꽃과 바닷가의 웃음을 함께 누린 그 공동체를 더 오래 생각해 볼 일이다. 

 

 


안숭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국제영화비평가연맹 사무국장, 부산국제영화제 피프레시상 심사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을 비롯하여 『SF, 포스트휴먼, 오토피아』, 『북한을 읽는 해외 다큐멘터리의 시선들』 등이 있다. holy31ch@hanmail.net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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