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만난 별 Ⅱ 배우 윤정희] 사랑의 기억
[시로 만난 별 Ⅱ 배우 윤정희] 사랑의 기억
  • 장재선(시인)
  • 승인 2023.02.01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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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에 출연한 윤정희 배우. 〈시〉 홈페이지

사랑의 기억
- 배우 윤정희

장재선(시인)


딸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하게 떠났다는 당신
여기서의 나날을
한 남자의 피아노 음률 곁에서
환한 미소로 가꿨다

은막 뒤에서 혼자 울더라도
앞에서 힘을 쏟는 시간은
최후의 순례자처럼
정결히 보듬었다

망각의 병이 운명을 때리고
독한 추문이 한 시절을 어지럽혔어도
사랑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 작 노 트

윤정희 배우와 백건우 피아니스트 부부를 함께 만난 적 있다. 20년 전 쯤이었다. 백 피아니스트가 고국서 콘서트를 하기 위해 왔을 때 인터뷰를 했는데, 그 자리에 윤 배우가 동석했다. 윤 배우는 과묵한 남편을 대신해서 친절하게 콘서트의 내용을 설명하며 좌석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그가 ‘영화’와 ‘남편 내조’라는 투 트랙의 삶을 지혜롭게 다스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976년 결혼한 이후 파리에 거주했다. 해외 연주 투어를 함께 다니며 늘 연인 같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지난 2019년 세종문화회관 분장실에서 백 피아니스트를 만났을 때는 혼자였다. 윤 배우가 알츠하이머 투병을 하고 있어서였다.

백 피아니스트는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윤 배우의 동생들이 그의 간병 내용을 문제 삼아 후견인 소송을 제기한 상태여서 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윤 배우가 지난 1월 19일 파리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따스한 미소와 더불어 품위 있던 음성이 절로 떠올랐다.

윤 배우는 1960~197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를 이끈 여배우 트리오 중 한 명이었다. 파리에 거주한 이후로는 국내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만무방’ 등의 작품에 간간히 등장하며 고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2010년 작 ‘시’는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마지막 출연작이 됐다. 극중 주인공 미자는 시작詩作을 공부하는 노년 여성으로 알츠하이머 증세를 겪었다. 그런 인물을 연기해 호평을 얻었던 윤 배우가 그 즈음부터 발병을 했다니 운명의 지독함을 느끼게 한다.

백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소망했다. “한평생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며 살아온 배우 윤정희를 오래도록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바람대로 윤 배우가 한국 영화계에 남긴 공헌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장재선 문화일보 선임기자. 시집 『기울지 않는 길』, 시-산문집 『시로 만난 별들』, 산문집 『영화로 보는 세상』 등 출간.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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