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벌새] 벌새–아픔처럼 다가온 우리들의 기억
[2020 오늘의 영화 - 벌새] 벌새–아픔처럼 다가온 우리들의 기억
  • 황영미(숙명여대 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 승인 2020.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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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나인필름

오늘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되고, 한 개인이 겪는 개인사도 시대와 무관할 수 없기에 역사와 만나게 된다. 우리에게 잊히지 않는 개인사적 기억들은 영화라는 공적 기억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2019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영화제 45관왕을 거머쥔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개인적 서사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우리 한국사회 나아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며 소통되고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 대상뿐만 아니라 국내 영평상에서는 신인감독상을 비롯한 5관왕, 한국제작가협회에서는 작품상까지 차지하기까지 이 영화의 어떤 점이 한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에 이토록 많은 관심과 상찬을 받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보게 한다. 

이 영화는 개인의 욕망과 부조리한 사회가 충돌하면서 생기는 균열에 천작함으로써 미시서사와 거대서사를 조우하게 만든다. 즉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인 주인공 은희(박지후)가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사회에서 겪는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그려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가족공동체에서는 한국사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아픔이나 폭력에 대한 상처를 그리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성수대교 붕괴라는 시대적 사건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다.

은희를 둘러싼 주변은 가정에서부터 학교와 사회까지 폭력으로 응어리져있다. 아버지는 비행을 일삼는 여고생 언니에게 욕설을 하고, 아이들이 잘못되는 것은 당신 탓이라며 은희 엄마와도 심하게 다투다 폭력까지 휘두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있는 힘껏 폭력을 행사한 후 서먹해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는 모습이 은희의 시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가정폭력이 은희네 가정에서 일상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은희의 오빠는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그 강도를 높여간다. 은희만 그처럼 가정폭력을 당하는 게 아니라 단짝 지숙도 아버지한테 골프채로 맞아 입술이 터져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이 영화는 한국가정에 만연된 가정폭력 문제를 실재감있게 드러낸다. 입시 위주의 학교에서도 은희가 마음 둘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침샘에 혹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은희는 집보다 병원이 더 편하다는 말을 할 정도다. 지숙과 함께 다니는 한문학원 강사인 김영지(김새벽) 선생만이 은희의 아픔을 이해하며 유일하게 진심을 소통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아는 사람 중에 당신의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라며 영지 선생이 칠판에 적어주는 한문고전 속 명문장들은 은희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하고,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도 한다. 

ⓒ엣나인필름

이 영화는 은희의 상황과 마음의 정황을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전달한다. 1994년이라는 시간의 공기는 2020년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지금의 사회적 부조리는 왜 해결되기 어려운지를 진단하는 근원적인 시점을 제공한다.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과거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4년에 일어난 많은 사건 중에서도 영화는 성수대교 붕괴를 소환한다. 이 사건은 은희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이 의지했던 김영지 선생이 희생자가 되어 은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 계기로 작동한다. 자주 클로즈업 되는 은희의 슬픔어린 얼굴은 사회의 부조리가 인간 개인의 관계를 무참히 짓밟아버린 사건들이 일어난 1994년이 26년 전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현재적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

또한 중학교 2학년이라는 시기는 사춘기 소녀가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아가는 기간으로 작동한다. 은희는 사춘기 소녀로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기위한 힘든 입사식을 치르는 과정을 거친다. 오프닝에서 한 층 아랫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문을 두드리는 은희의 모습을 담은 장면은 은희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꿰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사랑을 연습하던 남자친구와도 그의 어머니의 방해로 헤어지기도 하고, 은희가 무작정 좋다며 다가오던 후배도 학기가 끝났으니, 지난 학기 상황을 얘기하지 말라며 떠나기도 한다. 침샘에 난 혹도 수술하여 떼어버리면서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자신의 몸과 마음 속 곁에 있는 것들과 이별해야 했다. 또한 단짝 친구 지숙과 문구점에서 재미삼아 물건을 훔치다가 주인한테 들킨 사건은 은희가 성장하는 데 있어 친구와 가족 모두와 소통부재를 가중시키는 계기가 된다. 문구점 주인이 부모님 연락처를 대라고 윽박지르자 지숙은 은희네가 떡집을 하는 집이라고 말하고는 정작 자신은 빠져나가 버린다. 문구점 주인이 은희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물건값을 주지않으면 경찰서에 아이들을 넘기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냥 경찰서에 넘기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이 사건은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만들었고, 방과 후 트램폴린을 하늘 높이 함께 뛰면서 스트레스를 풀던 지숙과의 관계도 끝나게 만들어 버린다. 지숙과 하늘을 배경으로 트램플린을 뛰는 장면은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는 은희와 지숙의 수직상승하는 성장 모티프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장면이 된다. 은희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은 이처럼 중학교 2학년이라는 은희의 성장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엣나인필름

또한 공간적 배경도 많은 의미를 지닌다. 은희가 사는 동네는 재개발이 진행되는 강남의 변두리 지역이다. 재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자신의 집에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돼 버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는 곳이다. 영지 선생과 은희가 밤 산책을 하는 동네 아파트에는 이 지역 재개발을 수주한 재벌회사에 대한 저항이 플래카드로 붙여져 있기도 하고, 아파트 벽이나 입구에는 페인트로 주민들의 요구사항이 적혀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발전에 의해 정작 원주인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부조리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의 사회적 함의가 만만치 않은 맥락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 삶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고스란히 함께 보여준다. 가정폭력이 난무하는 가정이지만,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옴으로써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그리 허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가부장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아버지였지만, 은희가 혹 때문에 수술할 때는 누구보다도 걱정하며 진심으로 은희가 잘 치료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은희 언니의 안전을 가족 모두가 걱정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가족과 사회의 부조리를 강조하면서도 우리에게 조금은 위안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영화의 매력에 큰 몫을 하고 있다. 국내영화계 시상식에서 신인연기상을 휩쓸다시피한 은희 역의 박지후는 어린 나이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인물 자체에 그대로 스며드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은희의 멘토가 돼 준 영지 역의 김새벽 배우 역시 차분하고 매력적인 연기로 〈벌새〉를 통해 여우조연상을 여러 차례 받게 됐다. 은희와 영지는 같은 왼손잡이로 설정돼 마치 은희가 성장하면 영지 같은 대학생이 될 것 같은 동질감을 준다. 은희를 이해해주는 진심어린 눈빛 연기는 모든 것을 다 의논해도 받아줄 것 같은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빠의 폭력에 시달리고 단짝 친구 지숙과의 관계도 끝나 우울한 은희에게 ‘노동가’를 잔잔하게 불러주며 위로해 주는 영지 선생과 은희와의 관계는 폭력적인 사회에 대한 여성 연대를 감성적으로 다가오게 재현한다.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은희의 감성과 시선으로 함께 하는 우리의 과거, 우리 개인의 기억과의 만남이다. 이 영화는 일상 속에 잊혀진 아픈 기억속의 1994년을 소환시켜 새롭게 의미화하게 한다. 현재의 우리 모습을 과거의 거울로 되비추면서 소중한 기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황영미 _ dalloway4322@naver.com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 숙명여대 교양교육연구소 소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역임. 한국사고와표현학회 회장 역임.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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