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경계선] 경계의 이쪽과 저쪽
[2020 오늘의 영화 - 경계선] 경계의 이쪽과 저쪽
  • 김남석(영화평론가, 부경대 교수)
  • 승인 2020.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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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트 필름

  “인간과 단 하나의 분리 불가능한 경계선으로 분리될 수 있는, 일반 단수 대문자 동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질적인 경계와 구조들의 다수성을 고려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 중에, 그리고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과 별개로, 광대한 생명체들의 다수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자크 데리다

1.
경계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이다. 이러한 한계, 즉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한계의 이쪽과 저쪽을 분간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선이 요구되는데, 사람들은 흔히 이 선을 ‘경계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경계란 경계선의 안쪽을 뜻하고, 경계선에 의해서 분할된 바깥쪽 공간은 일정한 기준의 바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서로 다른 인식들이 뒤섞이면서, 처음에는 명확했던 경계와 경계선의 개념이 점차 흐려진다. 한계가 먼저 결정되자 이를 표시하기 위해서 경계선이 그어지는 것인지, 경계선이 그어졌기 때문에 경계가 설정되며 일정한 영역이 생겨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이라는 범주(한계)가 설정되었기 때문에 영장류나 고대 인류 혹은 신화 속의 괴물과 인간이 분리되는 것인지, 인간과 다른 비인간의 범주(생명체)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영역이 별도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게된다. 그렇게 영화 〈경계선〉(Gräns/Border, 알리 아바시 감독)은 경계와 경계선이 가진 이중적 잣대를 전제하고 출발하는 영화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상에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어떠한 방식으로든 그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경계의 안과 밖은 서로 다른 양상을 내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가령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어진 하나의 선을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남자들의 습성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세계를 형성하면, 이와 차별화된 영역에서 여성들 역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여자의 관점에서 선을 그어도 비슷하다. 여성들은 남성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마련하였기에, 그들 사이에는 분별할 수 있는 각자의 영역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분할과 분별에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경계라고 믿어졌던 남자와 여자의 경계선이 그리 견고한 기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생물학적인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관념은 과거부터 동성애나 양성애자들로 인해 교란되고 있었고, 신체적으로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존재가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었다. 신체적인 기준을 넘어 자신의 성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혹은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이기도 한 어떤 영역으로 재규정하려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런데도 생물학적인 구별이나 통상적인 변별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둘 사이의 사랑이라는 고전적 전제이자 원초적 경계는 위협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상식에서는 이러한 남/여의 구별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어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틀 자체가 과연 유효하냐는 의문 자체까지 봉쇄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경계가 때로는 균열하고 붕괴하는 사실조차 부인할 길은 더욱 없어 보인다.

영화 〈경계선〉은 그러한 지점에 균열을 더하는 영화이다. 애초부터 명백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틀과 선, 즉 경계(선)라는 암묵적인 합의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자 했으며, 그 틀에 균열을 가하여 선의 저쪽 혹은 경계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모으고자 했다. 경계는 늘 그렇지만 이쪽과 저쪽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광범위하고 모호한 점이지대를 만들어 왔다. 그 점을 강조하여 주목하면,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강제적인 틀과 편견 그리고 경계가 만든 인식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경계선〉은 이러한 경계 위에서 성립된 영화이다.

ⓒ트리아트 필름

2.
한 여성이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세관원으로 보이는데, 그녀가 하는 일은 입국자들의 불법 소지품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놀라운 후각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처음에는 술을 찾아낸다. 마치 탐지견이 마약을 골라내듯 그녀는 입국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숨기고 싶은 물건을 골라낸다. 

그가 골라내는 사람들을 거의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후각 능력에 대한 주위의 믿음은 확고하다. 심지어 그녀는 단순 후각만으로는 찾아낼 수 없는 아동 포르노 동영상을 담은 메모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녀의 능력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녀는 단순히 냄새만 잘 맡을 수 있는 능력만이 아니고, 그 냄새를 풍기는 주체의 심리적 상태도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하지 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가히 초능력이라고 부를만한 특별한 재능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결정적으로 예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쳐다보기 꺼릴 정도로 추녀였고, 어찌 보면 남성적 면모도 동시에 지닌 괴물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여 자신의 집을 공유하고 있고, 정작 집주인임에도 동거자가 데려온 개에게 위협을 당할 정도로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였지만, 카메라는 그녀의 착한 마음씨보다는 그녀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 쇼트 역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어찌 보면 인간 같아 보이지도 않는 추모醜貌를 보여주는 데에 할애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의 일상과 주변은 유난히 비어 있었고, 누군가를 대동하지 않고 숲을 거닐 정도로 자유로운 삶이 보장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한 남자가 나타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많은 용의자들이 지나갔던 입국 통로에 그 남자 역시 들어섰다. 밀수꾼들의 길을 그 남자 역시 걸어들어왔을 때, 그녀는 본능에 따라 그 남자를 주목했다. 수상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평범하지 않은 기운이 그녀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밀수꾼이 아니었고, 용의자도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신체적 특색뿐이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에 당혹해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특별한 사람이었다.

대신 그는 양성구유였고, 특별한 신체를 지닌 존재로 밝혀졌다. 그의 신체를 검사한 동료가 한 말은 그의 호기심을 준동시켰다. 그리고 그를 알아가면서, 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인간을 넘어 인간의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해간다. 그 과정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녀는 여느 영화들이 대개 그렇지만, 자신 앞에 나타난 특별한 존재(남자)에게 묻게 된다. “당신은 누구냐고".

남자는 이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벌레를 먹는 법과 자유롭게 수영하는 법, 편견에서 벗어나는 법,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활용하는 법과 심지어는 섹스를 하는 법을 가르친다. 여분의 인간들과 달랐던 그녀와 그가 가지고 있었던 비밀과 신체와 그들의 소속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넌지시 가르친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넌지시 전달된다. 우리(그와 그녀)는 인간이 그어 놓은 선 밖의 존재라고.

ⓒ트리아트 필름

3.
그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은 영화적 설정으로 바꾸면 황당한 사실로 귀결된다. 선 밖에 있다는 그들은, 소위 말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영화는 슬쩍 이러한 메시지를 환상적 설정으로 얼버무린다. 그들 남녀가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트롤’이었고, 멸종을 피해 소수의 그들 무리가 여전히 이 세상에 떠돌고 있으며, 남자는 인간의 아이를 훔쳐내고 자신들의 아이(트롤)들을 그 자리에 넣어 다시 세상에 나갈 방도를 찾고 있다는 소소한 설정도 덧붙여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이 이 영화의 장르를 이전시킬 정도의 힘을 갖지는 않는다. 그녀와 그가 트롤이라고 해도, 그들은 세상의 악이 아니며 무찔러져야할 괴물도 아니다. 이 영화는 악도 괴물도 아닌 그들의 모습을 통해 거꾸로 선 안에 있다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시선의 교차가 가능한 것은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에 있는 한 개체에 대한 관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이 이 영화를 경계선을 중심으로 대립하는 두 세력 간의 대결에서, 경계선 그 자체에 대한 주목으로 이끈다.

트롤 남성을 만나 ‘그’의 메시지를 접한 여자는 우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 무엇보다 기뻐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주었지만 어딘지 서먹서먹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게 되었고, 꽤 오랫동안 함께 거주했지만 섹스조차 할 수 없었던 동거인을 대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때마침 맡았던 소아 포르노 사건과 그에 따른 아이의 죽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 남자가 하는 일은 누군가의 아이를 죽이는 일이고, 그 일은 우리의 아이를 살리는 일로 인해 용서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경계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경계선 저쪽을 선택하는 일이, 살아 있는 자라면 긋지 말아야 하는 선을 다시 긋는 일이라면?

여자는 결심해야 했다. 그녀는 남자로 인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경계 안쪽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분명 이러한 앎은 그녀의 삶과 정신을 해방했다. 경계선의 이쪽에 ‘그냥 머무는 것’과 ‘자신의 정체를 이해하고도 머무는 것’은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 경계 바깥으로 나갈 기회도 인지하였다. 그리고 남자의 제안대로 그녀는 그를 따라 인간이 아닌 세상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발을 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 인간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는 것과 살아 있는 존재로서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을 준수하는 것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의 가르침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자유롭기를 바라고, 그래서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 대가로 누군가가 죽거나 인간인 존재가 인간 바깥의 존재로 버려져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인간들 틈에서 멀어질 수는 없었다. 경계의 저쪽으로 넘어가는 일은 그냥 경계선을 확인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아야했고, 그 경계선의 언저리를 방황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대신 그녀는 경계선을 알게 되었다.

경계(선)는, 그리고 경계에 대한 앎(인지)은, 그녀 자신을 깨어나게 했다. 그녀가 놓여 있던 애초의 자리를 파악한 현 상태는, 경계 바깥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그 경계 바깥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과 의심도 함께 불러왔다. 그녀는 내심 내면에서 물었을 것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경계 바깥에 있을 수는 있겠지만,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생명체의 경계 바깥에 있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더 일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면, ‘착한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경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착함과 착하지 않음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어야 하는가. 이 영화는 착함/안 착함의 기준을 함께 살아갈 자세의 유무로 규정하고 있다. 착한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착한 것에 대한 당위나 계몽을 벗어나고자 하는 미세한 분별과 다르지 않다. 이를 통해 인간 안에서 혹은 인간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 내재하는 어떠한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트리아트 필름

4.
남자는 남자가 사는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여느 인간들이 설정한 경계 바깥의 삶이다. 여자는 남자로 인해 자신의 앞에 놓여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어떤 경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 경계의 어느 쪽에 자신을 위치해야 할지 최종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 앞에 나타난 ‘그-존재’에게, 그 존재의 의미를 물었고, 그 대답으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답을 얻었기 때문이다.

체포되는 남자가 뱃전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기억한다. 그 남자로서의 존재는 묻고 있다. 나와 함께 경계 바깥으로 나갈 것인지, 답답하게 그 경계 안쪽에 머물 것인지. 경계의 어느 쪽에 설 것인지 분별하고 선택할 때가 왔다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이것은 비단 트롤과 인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상에 아직 트롤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인간은 늘 이러한 경계의 안쪽과 바깥쪽을 동시에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무지하고 불안했던 우리는 경계를 긋고 그 바깥쪽을 내치는 선택을 감행해왔다. 그러자 경계 바깥에서 적지 않은 것들이 소외되었다. 학대당하는 동물이 그러하고, 몇 세기 전만 해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흑인과 유아와 노예가 그러하며. 늘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야 하는 서발턴(하위주체)이 그러한 존재이고, 황당한 폭력 단체로만 비하되는 이슬람과 북한 등도 아마 거시적 관점에서는 그러한 대상일 것이다.

선이 그어지고 경계가 생기면 늘 무언가가 그 바깥으로 추방되는 수순이 진행된다. 그들-경계 바깥의 존재들은 우리 곁에는 있지만, 늘 우리가 아닌 어떤 존재로 혹은 우리와 다른 그들로 규정되고 우리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곤 하는 악과 추와 차이의 존재들로 남곤 했다.

우리-인간은 그들 모두를 배척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음에도, 늘 그들을 우리 바깥으로 밀어내고 철저하게 경계를 그을 수도 있는 존재들로 거듭났다. 그때 우리가 긋는 기준은 물리적인 선이기도 하지만, 착함/나쁨의 도덕적인 선이기도 했으며, 오만과 편견과 무지가 살려낸 인습의 선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선은 인위적일 수 있고 변동 가능할 것일 수 있었다.

영화 〈경계선〉은 어느 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해당한다. 그녀가 입국장의 통로에서 그를 만나고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이 속한 세상에 대해 고민하게 했던 그 질문을 함축한 질문이다. 그토록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경계선이 ‘나’를 경계선 바깥으로 나가라고 강요하거나 알려준다면,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경계의 안과 밖은 결국 뒤섞여 있는데, 그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당신에게 통보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이다. 〈경계선〉은 사실 임의의 것이지만, 경계선 안쪽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감옥일 수도 있다.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는 끝까지 확정할 수 없겠으나, 경계의 이쪽과 저쪽의 상황을 살필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양쪽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치우침 없이 선택할 수 있을 때, 영혼과 정신의 자유는 얻어질 수 있다고 막연하게 대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김남석 _ darkjedi@dreamwiz.com
1973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 졸업.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 저서로 『조선의 여배우들』 『조선의 연극인들』 『조선의 대중극단들』 등이 있음. 현재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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