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그린 북] 진지하면서도 울림 강한
[2020 오늘의 영화 - 그린 북] 진지하면서도 울림 강한
  •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 승인 2020.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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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 아트하우스

만약 나에게 좋은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묻는다면, 비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략 두 경향의 영화를 들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보수적인 스토리와는 다른 서사를 지닌 영화가 하나이고, 식상하거나 통상적인 스타일을 과감하게 파괴하는 스타일을 지닌 영화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스토리를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후자는 스타일을 통해 영화적 새로움을 추구한다. 물론 스토리와 스타일의 새로움이 적절하게 결합한 영화를 만난다면 무척이나 행복하겠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둘 가운데 하나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덤 앤 더머〉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등 주로 가벼운 코미디를 연출한 감독으로 알려진 피터 패럴리의 수작 〈그린 북〉은 스토리를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영화이다. 단언컨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촘촘한 스토리이다. 물론 그런 스토리를 살리는 미장센과 연기자들의 연기, 그리고 음악이 좋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응당 스토리라고 해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진지하면서 울림 강한 영화를 만들지 못했던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린 북〉이 왜 스토리적 측면에서 놀라운 영화인지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전에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미국의 어두운, 숨기고 싶은 역사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미국을 세계의 경찰 국가, 또는 정의의 국가라고 칭하지만, 나로서는 이런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긴 시간 동안 끔찍하게 진행되었으나 지금도 사죄하지 않고 있는 아메리칸 원주인에 대한 대학살 때문이고, 둘째는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고향에서 잘 살고 있는 이들을 강제로 잡아와서 몇백 년 동안 노예로 부려먹고 지금도 엄청난 차별을 행하고 있는 흑인 노예제와 차별 때문이다. 이 두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인데,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한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고,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다. 

〈그린 북〉은 ‘흑백 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흑백 갈등, 또는 흑백 차별이라는 용어는 사용하면 안 된다. 차라리 백인에 의한 흑인 차별, 또는 백인에 의한 흑인 차별 때문에 발생한 갈등 등으로 정확히 원인과 갈등 양상을 알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린 북〉의 시대적 배경은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인 존 에프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개혁적인 정서가 강한 1962년이고, 내용은 실화를 소재로 한다. 뉴욕에 살고 있는 두 인물이 주인공인데, 주먹 잘 쓰고 허풍 좋은 이탈리아계 백인 토니 발레롱가와, 교양 있고 지적이며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인 흑인 돈 셜리 박사가 그들이다. 기도로 일하던 나이트가 공사 때문에 휴업하게 되자 토니는 남부 순회 공연을 하는 돈의 운전기사가 된다. 영화의 첫째 재미는 백인과 흑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바꾸어 놓은 데 있다. 하층민인 백인, 상위층인 흑인을 1962년이라는, 흑인 차별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에 설정해 놓은 것. 단지 경제적 지휘만 그렇게 설정한 것이 아니라 교양이나 지식, 삶에 대한 태도 등에서도 백인이 낮고 흑인을 매우 고상하게 설정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 차별이 강하게 남아있는 남부를, 백인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클래식을 전공한 흑인이 순회 공연을하니 아이러니하면서 사실적인 영화적 재미가 발생한다. 

ⓒCGV 아트하우스

영화의 둘째 매력은 흑인 차별이 영화에 생생하게 그려진 데서 발생한다. 돈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차별을 남부에서 받는다. 돈은 유색 인종만이 사용할 수 있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호텔에서만 묵어야 하고, 기분이 우울해 술 한잔 하러 갔다가 백인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야 했고, 흑인은 밤에 돌아다닐 수 없다는 법을 어겼다며 경찰에 연행되었고, 엘리트 백인들을 위해 연주를 하면서도 그들의 화장실조차 사용할 수 없다. 심지어 원하는 옷을 살 수도 없고, 공연 직전에 도착한 연회장에서도 흑인이기 때문에 식사할 수 없다. 영화에는 이런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영화의 미장센이 훌륭하다는 평가는 196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살려놓아 돈의 차별을 눈에 쉽게 들어오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영화적 동일시 역시 이런 재현에 힘입은 바 크다.

토니는 돈과 어울리기 어려운 인물이다. 가난한 그는 흑인에 대한 차별 인식이 강함에도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흑인의 운전기사가 되었다. 단지 운전기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디가드도 되어야 하고, 잔심부름도 해야 하는, 자존심을 구기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돈이 당하는 차별을 보면서 마음이 변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는 돈의 차별이 너무도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왜 참기만 하는지, 그럼에도 대우 좋은 북부에 있지 않고 험하고 돈도 적은 남부로 공연 가는지 결국에는 이해하게 된다. 영화의 셋째 매력은 그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토니가 부인에게 편지를 쓸 때 돈이 코치해 주고, 토니의 거친 말투와 성격을 돈이 이해하면서 돈과 토니는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 영화가 로드 무비면서 버디 무비처럼 읽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끝부분에서 매우 허름한 흑인 전용 호텔에 토니도 함께 묵을 때, 지친 토니를 대신해 돈이 운전해 토니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래서 영화가 끝이 났을 때, 〈그린 북〉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버디 무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CGV 아트하우스

영화의 넷째 매력은 돈이 흑인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로버트 케네디에게 전화해 경찰서에서 풀려난 두 사람은 심하게 말싸움을 한다. 토니는 돈에게 오히려 자신이 흑인의 삶을 살고 있고 돈은 성좌에 있다고 하자, 돈은 자신은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성답지도 않다면서, 홀로 있다고 울부짖는다. 영화 속 돈은 형제들과도 단절되어 있고, 흑인들과도 연대하지 못한다. 흑인 전용 호텔에 묵으면서도 흑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항상 홀로 위스키를 마신다. 그럼에도 그는 교양 있는 방식으로 비열한 흑인 차별에 대처하면서 인내하고 또 인내하지만, 마지막 공연에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폭발해 공연을 하지 않고 나와 흑인 전용 식당에서 식사 후 연주를 한다. 처음에는 그의 전문 분야를 연주하지만, 이내 다른 이들이 올라와 경쟁적으로 즉흥 재즈 연주를 하자 돈 역시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이 장면에서 흐르는 “Backwoods Blues”에 맞춰 흑인들이 함께 즐기는 장면, 비로소 돈이 흑인들과 하나가 되는 이 장면은 단언컨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켄터키의 들판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흑인들을 바라만 보던 돈은 이제 마음을 열고 흑인의 정체성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그린 북〉은 좋은 영화임에 분명하다. 화려한 스타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도 아니지만, 영화가 끝나면 잔잔한 웃음이 입가에 떠나지 않는다. 거창하게 휴머니즘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흑인 차별이라는 결코 다루기 쉽지않은 소재를 그렸음인지 보고 나면 마음 한편에서는 불편함이 남는다. 왜 그런 것일까? 먼저 이 영화가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화 속 차별을 볼 수 없는 시대이기에(?) 과거의 차별을 노골적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백인 보디 가드가 마치 메시아처럼 흑인을 구해줄 수 있게 설정되어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결정적으로 〈그린 북〉이 2019년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흑인 차별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드러낸 영화라기보다는 과거의 차별을 그려 이제는 성찰하는 미국 이미지를 영화가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실제 토니의 아들 닉 발레롱가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팩트가 왜곡되었다는 논란이 발생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참, 제목이 〈그린 북〉인 이유는 유색 인종만을 위한 여행 가이드북이 그린 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린은 그린 카드의 그린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강성률 _ rosebud70@hanmail.net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저서로는 〈한국영화에 재현된 가족 그리고 사회〉, 〈영화 색채 미학〉, 〈영화 비평 – 이론과 실제〉, 〈영화는 역사다 – 한국영화로 탐험하는 근현대사〉 등이 있다.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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