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우로보로스는 미치지 않았다: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2021)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우로보로스는 미치지 않았다: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2021)
  • 이지혜
  • 승인 2022.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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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미친 사람인가?

  클로이 자오 감독, 〈노매드랜드〉(2021)에 등장하는 노매드Nomad(유랑자)들과 주인공 펀은 언뜻 제 살을 깎아 먹고 있는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서 굳이 거지꼴을 자처하며 철새처럼 계절과 세상을 길항하기 때문이다. 

  제 살을 깎아 먹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에게 종종 ‘미쳤다’라는 표현을 쓴다. 어쩌면 노매드들은 ‘집이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제 살을 깎아 먹는 자’와 같다. 머리를 산발하고, 누더기가 된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닌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문신을 하거나, 정신이 빠진 듯한 눈빛으로 세계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노매드들을 노매드가 아닌 사람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매드가 아닌 타자들, 이른바 ‘집 있는’ 주체들에 의해 ‘집이 없는 사람’으로 불린다. 또 미친 사람처럼 여겨지는 게 다반사다. ‘집 있는’ 주체들은 펀이 집에서 행색을 고치고, 추위에 떨거나 배를 곯지 않고 살길 바란다. 그러나 석고보드 공장의 폐쇄와 남편의 죽음으로 거주지였던 네바다주를 떠나며 노매드를 자처한 펀은 말한다 “거주할 곳이 없는 것과 집이 없는 건 다르다”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펀을 미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점, 선, 면으로 건축해 한 자리를 공고하고 튼튼하게 지키는 ‘집’의 소유 여부다. 

  점( · )과 선(—)

  집을 얻기 위해선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지역을 고르는 일이 선행된다. 또 삶의 질을 높이는 각종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집이란 마치 ‘점’처럼 어느 한 부분에 방점을 찍어 ‘거기’에서 안정적으로 ‘잘 머무르기’ 위해 있기 때문이다. 노매드가 아닌 자들에게 집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많이 가진 상태를 만드는 것, 무無에서 유有를 이뤄내는 것, 즉 하나의 ‘점’을 창조하는 것이다. 〈노매드랜드〉의 노매드들에게도 ‘점’은 있다. 바로 캠핑카다. 그들에게 집으로 표현되는 캠핑카는 유有에서 유有를 생성한다. 그들의 캠핑카는 이미 이전의 삶에서 떠나며 가져온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펀에게도 사실 머물 집, 즉 점이 있다. 그녀의 점은 바로 폐차 위기의 밴을 개조한 캠핑카 ‘선구자’다. 펀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로 가득 찬 선구자는 자동차이긴 하지만 자동차의 기능을 잘하지는 못한다. 노·장년 여성 펀처럼 너무 많이 늙고 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정과는 거리가 먼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집 있는 주체들의 소망처럼 자주 자리에 정주定住하는 자동차다. 영화의 중·후반부 펀은 고장 난 자동차를 수리하기 위해 결국 정비소를 찾고 거액의 수리비를 요구받는다. 사람들은 차라리 자동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사라고 말하지만 펀은 그럴 수 없다. 그녀는 대중교통을 타고 걸어서 언니 돌리의 집까지 간다. 그곳에서 만난 형부이자 부동산 업자인 조지는 부동산의 가치에 대해 역설力說하다 펀을 함부로 재단한다. 그리고 작은 마찰을 빚는다. 그날 밤 돈을 빌려주며 ‘여기서 함께 살자’는 돌리에게 펀은 말한다. 자신은 이 방에서 지낼 수 없는, 더는 침대에서 잘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이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 초반부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구도의 씬을 또 한 번 마주하게 된다. 바로 칼의 반려견이 묶여있던 야영장의 사무실을 떠오르게 하는 전경이다. 돌리와 펀의 포옹 직후 쇼트는 집을 배경으로 개와 펀을 수평으로 배치했던 것처럼 돌리와 펀 두 인물을 똑같이 수평에 둔다. 펀은 전과 같이 화면 밖을 향해 걸어 나가고, 돌리는 묶여있던 개처럼 집의 현관을 향해 돌아간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개를 두고 돌아서는 펀은 다소 머뭇거렸고, 돌리를 두고 돌아설 때의 펀은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돌리는 노매드가 아닌 사람 중 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유일한 주체였다. 둘의 대화를 통해 유추하건대 돌리에게 유랑민이 된 펀은 어쩌면 미국의 초기 개척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펀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했지만, 이 장면이 보여주는 둘은 서로를 평생 이해 못 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돌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특히 중요하다. 펀이 네바다주를 쉽게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자꾸 고장 난 자동차를 빌미로 정주하는 이유가, 자동차 외에 다른 곳에 머물 수 없는 이유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잘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방이 없어야 안정할 수 있는 것 이는 바로 정주에 대한 ‘상실’이다. 

  그러므로 정주가 안정이라는 것도 편견이다. 어떤 의미에서 정주는 불안정을 의미할 수 있다. 점과 점의 사이를 이으면 선이 되고, 집과 집의 사이를 이으면 거리가 되며, 거리에서 머문 순간과 순간들을 이으면 시간이 된다. 점을 떠나온 것들은 수평을 달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다시 점을 찍고, 또다시 점을 찍으며 선을 만들어 나간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 점이 아닌 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을 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노매드가 떠나가는 유수히 많은 길은 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펀은 선 가운데 선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노매드랜드〉는 점에서 수평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된다. 펀과 선구자가 지나온 시간은 그녀만의 거대한 기억 덩어리가 되어 그 자체로 기의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집이 되었다. 즉 그녀의 선구자는 남편과 일자리를 연거푸 상실한 이후의 시간을 함께해 준 움직이는 기표다. 그러므로 그녀는 집이 있는 자들과 집이 없는 자들 사이에 미끄러져 들어가 내부도 외부도 아닌 공간 즉 공백에 위치한 이방인이 되었다. 확실한 건 펀은 점 위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제 달려야만 한다.

  말장난을 하나 해보자. 노매드 사이에 공백을 집에 넣고 띄어 읽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매드Nomad는 노 매드No Mad가 된다. 알고 있는 것처럼 ‘미치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사실 이 원고 초반 질문은 여기에서 발생했다. 

  고대 신화 속에도 제 살을 먹어 미쳤다고 불렸던 존재가 있다. 우로보로스uroboros다. 그러나 이 뱀은 미치지 않았다. 신 우로보로스는 우주를 원형으로 휘감고선 자기 꼬리를 입에 물었다. 우주에는 수많은 물상이 실존하고 이 물상들은 대체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삶과 죽음, 밤과 낮, 나와 타인 등 수많은 것들의 사이를 우로보로스는 길항하며 하나의 덩어리로 묶는다. 어딘가에 편입되어 살기보다 스스로 모든 것을 끌어안아 세계가 되기를 택한 것이다. 따라서 존재란 자기 꼬리를 먹는 뱀처럼 무수한 반복과 회귀 속에서 실현된다. 펀이 정주하지 않고 선구자와 달리기로 택하며 철새처럼 세계를 오가는 것은 무한한 반복과 회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주체와 타자다. 일반적으로 주체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 주체 앞에 놓인 것들은 주체가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읽히기도 한다. 조지와의 일을 통해 혹은 집을 권유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주 대상화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인간의 삶을 논하며 타자에 대한 ‘초월’을 말한다. 초월이란 타자의 존재가 주체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a에서 b로 이행하며 고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사실 주체가 아닌 타자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아직도 노매드들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가? 

  장‘면’들

  네바다주 한 폐쇄된 도시의 잿빛 절망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펀이 떠나기 전 내리는 창고 셔터의 이미지를 통해 은유 된다. 펀은 아버지가 물려준 단풍 모티브의 중고 접시 세트와 남편의 낚시 서랍 등 몇 가지 살림만 챙겨 어두운 캠핑카에 올라탄다. 펀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했던 〈아마존〉에서의 일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주지가 있었던 네바다주 근처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거주지가 있는 지인들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정주의 삶, 즉 단기적이어도 움직이지 않는 삶을 제안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그 제안을 거절한다. 곧 혹독한 추위가 몰려올 예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네바다주 근처를 배회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펀의 유랑이 촉발되는 첫 번째 계기는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야영장 동료 칼의 뇌졸중과 그녀의 남겨진 반려견이다. 62세 노·장년 여성이었던 칼은 자신보단 비교적 어린 펀에게 더 늦기 전에 따뜻한 애리조나 쿼츠사이트로 떠나라고 권유한다. 이 장면 직후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자식들에 의해 동부로 옮겨진다. 그 과정에서 칼의 반려견이 유기된다. 야영장의 직원은 어떻게든 일을 구해 야영장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하는 펀에게 칼의 반려견을 데려가기를 권유하고 펀은 이를 거절한다. 다음 원사에서 클로이 자오는 펀과 칼의 남겨진 반려견을 하나의 수평으로 담아낸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펀은 눈이 쌓인 테이블 다리에 줄이 묶인 검은 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다. 그리고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간다. 이제 장면 안에는 검은 개와 단색조의 건물, 그리고 굳게 입을 다문 사무실 문만 회화처럼 붙박여있다. 이때부터 펀은 뒤돌아보지 않고 ‘선구자’와 함께 조금씩 거리를 달린다.

  선구자의 사전적 의미는 말을 탄 행렬에서 맨 앞에 서서 최초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을 뜻한다. 과거의 말은 현재의 자동차다. 말을 움직이는 것은 다리이고,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퀴이다. 그러나 말과 자동차는 다르다. 말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만, 자동차는 자유의지가 없다. 따라서 자동차의 의지는 자동차를 조작하는 펀의 의지다. 노·장년 시기에 접어든 여성 펀은 자급자족의 삶을 추구하지만, 젊은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인 능력도 신체적인 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노매드를 자처한 펀에게 바퀴라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에 화답하듯 펀은 캠핑카의 이름을 선구자로 짓는다. 그러나 자동차의 이름이 ‘선구자’라는 것은 애초에 관객을 속이기 위한 클로이 자오의 명민한 기망이다. 앞서 말했듯 선구자는 ‘말’을 탄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구자’는 엄밀히 따지면 캠핑카의 이름이나 이름이 아니다. 사실 펀 자기 자신이 붙인 이름이자 의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동차를 집으로 택한 펀이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가 된다. 자동차는 이동할 때 의미가 있다. 이쯤에서 우로보로스가 자기 꼬리를 문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뱀은 수평의 이미지를 가진다. 그러나 꼬리를 삼킴으로 원으로 변모한다. 결국 점과 점은 선이고 선과 선은 원이 원은 하나의 면을 가진다. 니체는 시간은 영원하며 원형圓形을 이룬다고 보았다. 시간 속에는 필연적으로 허무가 존재한다. 펀의 허무는 삶의 공동체였던 남편 ‘보’를 잃었다는 ‘상실’에서 온다. 또한 그 기억의 공간이었던 ‘거주지’를 잃은 것에서 온다. 그러므로 펀의 원이자 면 위는 텅 비어있다. 

  그러므로 칼이 그려준 지도에 있는 RTR(고무바퀴 유랑족을 위한 모임)은 영화 초반의 펀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RTR의 수장 밥의 설명에 의하면 그곳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그때의 펀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급자족에 만족했고, 필사적으로 남편과의 시간을 지키고자 했다. 잔인하지만 상실은 온전히 개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상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타인에게 위로받을 수는 있지만, 타인이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첫 번째 유랑의 촉발 이후 머물게 된 RTR에서 펀은 자신과 비슷한 허무를 겪은 사람들과 데이브, 스웽카를 만나게 된다. 사실 RTR은 유랑민에게 최소한의 생존 법칙을 알려주는 곳이기도 했지만, ‘찢긴 상처’를 공유하고 마음껏 흩어졌다 다시 만나기도 하는 무위의 공동체이기도 했다. 펀은 스웽카와 기억과 상실을 공유하며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암 말기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주는 스웽카를 목도한 이후 손가락의 반지를 바라보며 자신의 상실과 허무를 비로소 인정하고 똑바로 바라보게 된다.

  허무를 인정하기 위해선 의지가 필요하다. 파편화된 쇼트 속에서 펀은 낡은 캠핑카에 스웽카가 남겨준 흰 페인트를 칠한다. 그리고 선구자답게 자동차를 운전한다. 〈노매드랜드〉는 상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펀의 의지를 대자연의 풍광에 의탁해 장면에 켜켜이 기록한다. 새벽을 달려 긴 동굴을 빠져나온 펀은 광활한 숲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쳐본다. 야생동물을 만나고, 옷을 발가벗은 채 개울의 수면 위에 가만히 떠 흘러가는 그대로 나신의 몸을 내버려 두기도 한다. 이 장면들에서 펀은 그대로 세계와 물아일체物我一體 된다. 그리고 삶을 지탱할 힘을 얻는다. 

  니체는 자기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자기 극복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라고 말했다. 힘에의 의지는 생성과 변화의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원형 안에서 모든 사물과 인식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되는 행위를 바로 영원회귀라고 정의했다. 

  〈노매드랜드〉에서 ‘영원회귀’를 나타내는 것은 시간이다. 다시 개인의 삶을 점으로 지칭할 수 있다면 이 삶들이 이어져 시간이 된다. 영화에서 ‘시간’은 돌멩이와 파충류를 모티프로 재현된다. 실제로 펀은 살아있는 큰 뱀을 몸에 휘감아 보기도 한다. 화석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막의 국립 공원에서 같은 처지의 유랑민 데이브와 함께 공룡 모형 앞에서 사진도 찍는다. 펀은 유랑민들과 함께 지구로부터 24광년 거리에 있는 직녀성을 본다. 1987년에 직녀성을 떠난 별빛을 보고 목성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이 폭발하며 뿜어낸 플라스마와 원자가 땅을 기름지게 하고 우리의 일부가 된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대우주가 있다면 대우주를 구성하는 소우주가 있다. 그러나 소우주는 통상적으로 인간, 즉 인간의 정신을 지칭한다. 직녀성의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시간이다. 은하가 생성되고 별이 사라지며 빛이 달려가는 모든 순간에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펀이라는 소우주를 구성한 것도 펀의 삶을 구성했던 것도 시간이다.

 

 


이지혜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화콘텐츠전공 박사수료,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경희 문화콘텐츠·영화비평연구회 소속.

 

* 《쿨투라》 2022년 2월호(통권 9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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