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쿨투라 신인상 미술평론 부문 당선작] 불가지론의 내러티브로 엮어내는 미디엄의 여정: 양혜규론
[제18회 쿨투라 신인상 미술평론 부문 당선작] 불가지론의 내러티브로 엮어내는 미디엄의 여정: 양혜규론
  • 최영건
  • 승인 2024.01.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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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을 향한 내러티브들의 역동성

깨우친 자들이 모든 것에 대해, 전부를 정리해 보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따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계몽주의자들의 시대에 장프랑수아 마몽텔은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전서』에 참여하며 서사에는 관객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남긴다. 그에게 서사란 연출되어야 하는 일종의 무대를 동반하는 것이었고, 역설적으로 이 관점은 공연되고 전시되기 전의 원형archetype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 원형적 서사에 살과 피와 힘줄이 더해지며 공연되고 전시되는 것이다.

이런 원형과의 관계는 서사와 전시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서사란 그것이 실제로 스스로의 ‘무대’를 전제하든 그렇지 않든, 어느 때에나 전시되는 것으로서의 수행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된다. 작가는 스스로의 원형을 전시‘하는’ 존재이자 그렇게 스스로 전시‘되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지닌다. 스토리에 몸을 더하여 그것을 전시하는 작업이란 한편으로 신비적이고 원시적이다. 기록되어 전시된 최초의 이야기란 신화이며 이야기를 선보이는 일은 본디 신-신화-신자의 원형 구조를 배태하기 때문이다.

모든 관람자는 신을 신앙으로만 접하는 신자와 같이, 확장된 상태로서만 그 근원적 뼈대와 교차될 수 있다. 확장 이전의 원형을 단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전시의 수행성은 늘 동적이다. 이 상상과 믿음의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당연히 미술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모든 좁은 의미의 전시들에서도 반복되는 일이다. 특히나 어떤 작품들은 이 불가지론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그중에서도 신화적 모티프는 미술의 영토에서 원형으로서의 강력한 메시지를 수행한다.

예컨대 한반도의 전통 설화와 무속 신앙은 오늘날 이곳에서 쉼 없이 새로 태어나며 동시대성을 수행하는 주요한 내러티브이다. 양혜규는 초기부터 내러티브와 그에 따른 문학의 영역에 깊이 연계된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이다. 특히나 2010년대 이후로는 전통 설화, 무속 신앙의 신화적 모티프에 형체를 부여하며 내러티브의 현현에 주력해 왔다. 양혜규에게 신화적 모티프를 지닌 내러티브란 서로 다른 것들에게서 발견되는 보편적 원형을 지시하는 단서다. 이 내러티브들은 가닿을 수 없는 원형을 더듬어 서로를 연결한다. 양혜규에 의해 그 연결성이 가시화되는 것들이란 디아스포라적 입장에서의 조국과 타국이기도 하고, 피식민자와 식민자이기도 하며, 인간과 신, 땅과 하늘이기도 하다.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범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이나 서로의 대칭으로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되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닮음은 양혜규가 초점을 맞추는 보편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단서이다. 작가의 말을 빌려, 세계 전역에는 서로 전혀 다른, 그러나 구조적으로 닮아 있는 내러티브들이 산재한다. 양혜규의 작품들이 증언하듯, 내러티브는 문학과 미술의 영역을 엮어내며 보편적 원형을 가리켜 보이는 유구한 지표이다. 우리는 그 원형에 도저히 다다를 수 없지만, 문학과 미술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능한 무대로 끌어들여 피와 살을 입힌다. 무대는 연결을 위한 장이다.

양혜규 작업에서 미디엄의 본질은 연결이라는 수행성이며, 이 수행적인 역동성은 단일하지 않기에 비로소 보편과 공명할 수 있다. 보편은 원형을 함의하기에 언제나 신화적이다. 양혜규의 작업이 직접적 연관이 없는 순간에조차 어떤 신화적 분위기를 풍기곤 하는 것은 양혜규가 모색해 온 원형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존재, 가장 근원적인 존재를 신이라는 개념으로 지시할 수 있다면, 양혜규의 응시 속에서 내러티브는 신에게로 향하는 역동성이 된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 역동성에 형체를 부여한 매개들이다.

〈소리나는 가물(家物)〉 설치 전경. 사진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 적의와 사랑 사이 미디엄의 내러티브

양혜규는 초기부터 서사성과 밀접하게 연계된 작품 활동을 지속해 온 작가이다. 특히 초기의 작업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은 바 있다. 피식민자의 일원이자 식민지의 주민이었던 뒤라스의 작업은 이편과 저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은 순간 생성되는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증언한다. 뒤라스의 작업이 드러내는 “단일 텍스트의 폐쇄성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은 다중성과 교차를 현현한다. 양혜규는 한국에서 뒤라스 영화제를 기획하고, 뒤라스의 『고통』을 전유하며 뒤라스의 집 주소를 제목으로 삼은 〈생 브누아 가街 5번지〉(2008)를 발표하며, 2010년 개인전 《셋을 위한 목소리》에서는 전시공간에 펼쳐진 자신의 설치 작업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 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Shadowless Voice over Three〉에서 뒤라스의 영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작품의 일부로 삼는 등 뒤라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2010년 그는 뒤라스의 소설 『죽음에 이르는 병』의 번역본(역자 정희경)에 스스로 에필로그를 덧붙인 동명의 아티스트 북을 발간하기도 한다.

양혜규와 뒤라스의 작업은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체험으로부터 비롯하여, 반복적 순환과 복제를 통해 단일한 진술을 자기반성적 형식으로 재현한다. 이런 작업들에서 양혜규가 보여주는 단일 재료의 다중적 구성은 뒤라스나 마르셀 푸르스트, 사뮈엘 베케트의 글쓰기와 같은 형식주의적 실천과 공명하며, 단일한 실체로서의 주체의 부재를 상연한다. 주체의 부재는 탈중심화를 꾀하며 그 빈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을 가리켜 보인다. 이후의 행보를 통해 양혜규는 바로 그 빈 장소로부터 다시금 더듬어낸 바를 보편과 원형, 신화와 신이라는 개념으로 지시해 보이는 듯하다. 오늘날 양혜규 작업의 독보적인 정체성은 서사성과 관련된 이런 행보와 맞물려 있다.

2011년 브레겐츠 미술관에서의 《복수도착》전에서 양혜규는 드물게 음악을 활용한다. 1913년 발표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러시아의 원시적 민속 종교 제전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이교적인 제의를 모티프로 삼은 발레 음악은 공연 역사상 가장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스트라빈스키의 친구 니콜라스 뢰리히의 표현처럼 범인류적인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가장 원시적인 제의의 단순하고도 명징한 구조가 범인류라는 보편에 대한 상상과 추적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복수도착》전에서 발표된 〈전사 신자 연인〉은 33점의 광원 조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전사가 싸우는 자, 연인이 사랑하는 자라면 신자는 믿는 자이다. 전사가 적의를 함의한다면 연인은 사랑을 함의하는 이름일 것이다. 전사와 연인의 사이 신자가 배치되어 있는 이 제목은, 적으로부터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란 미지에 가까운 타자에게 다만 믿음으로 가 닿으려 하는 갈망임을 전한다.

양혜규는 2013년부터 ‘소리 나는Sonic’ 연작을 통해 무속신앙의 기물과 연계를 맺는다. ‘소리 나는 춤Sonic Dance’ 연작이나 ‘소리 나는 인물Sonic Figure’ 등으로 세분화되는 이 연작은 무속 신앙의 방울을 엮고 그에 바퀴를 단 퍼포머티브한 조각들이다. 이들은 무속의 신비적 상징성을 통해 일상 기물의 층위를 초과하고, 또는 달리 말해 일상 기물이 지니는 접속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무속 신앙에서 방울은 무당이 굿을 하며 신을 맞이할 때 부채와 함꼐 흔드는 무구巫具이다. 흔히 칠성방울이나 무령巫鈴이라 불리며 방울소리에는 신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방울은 일상의 표층을 도약하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일종의 믿음으로만 감지될 수 있는 존재와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가 된다.

가장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것에 대한 추적은 자매나 형제와 같은 혈연이라는 단서로도 드러난다. 양혜규의 〈소리 나는 춤-이복 자매Sonic Dance-Half Sister〉나 〈소리 나는 춤-쌍둥이 자매Sonic Dance-Twin Sister〉, 〈소리 나는 춤-쌍둥이 형제Sonic Dance-Twin Brother〉 같은 제목들에 담긴 것은 쌍을 이루는 존재들에 대한 내러티브다. 자매와 형제, 쌍둥이란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나 관객이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모습뿐이다. 결국 저 하나의 추상적 덩어리는 그를 마주한 관객 스스로와 쌍을 이룬다. 저 모습이 나와 쌍둥이이거나 나의 혈육이라면 필연적으로 나는 저것을 닮아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방울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과 교감하는 저 모습에 스스로를 투영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작품은 움직임을 따라 소리를 내는 방울들을 통해서 역동성을 획득한다. 그 유선형 곡선을 드러낸 덩어리 형태는 사람의 웅크려 꿈틀거리는 몸을 닮았다. 부드러운 막을 깨고 태어나려는, 나를 닮은 몸이다.

〈소리 나는 인물-활달한 스트레쳐Sonic Figure-Vigorous Stretcher〉는 두 다리를 가볍게 벌리고 선 인체의 형상을 지닌다. 두 팔이 있어야 할 토르소 부분을 이룬 것은 고정되지 않는 긴 술들이다. 방울로 감싸인 이 동적인 모습들은 바퀴를 통해 굴려지는 순간 수많은 방울들로 일제히 소리를 낸다. 이는 하나의 유기적 생물이 신을 부르고 교감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무속 신앙의 제례가 신에게 가닿듯, 양혜규가 연출한 ‘소리 나는’ 순간 역시 잠시 동안 신에게 가닿는무대를 열어 보이는 것이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₂ & H₂O》전을 통해 주목받은 ‘소리 나는 가물家物’ 연작의 〈다림질 가위〉, 〈게걸음질 드라이기〉, 〈솥겹 솥〉, 〈조개 집게〉는 그 이름 그대로 가위와 드라이기, 주전자형 냄비와 가스버너, 집게의 모습을 지닌다. 성인의 키보다 조금 더 클 정도로 크기가 키워진 이 일상의 ‘가전 기기’들은 온통 금색과 은색, 붉은색 방울들로 감싸인 채다. 이들은 그렇게 신이라는 보편과 이어지려 하는 미디엄의 역동성을 현현한다. 모든 이들의 일상에 있을 법한 흔한 기물의 보편성이 신이라는 기표의 개념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양혜규의 작품들이 지닌 매개로서의 성격은 ‘중간 유형The Intermediate’ 연작을 통해 한층 분명하게 ‘intermediate’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중간 유형’의 영제인 ‘intermediate’에서 ‘Inter’란 사이를, ‘Mediate’란 매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인류사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짚풀 공예의 편재성을 전면화한 이 작품군은 〈중간 유형-여성형 원주민Female Natives〉(2016) 같은 인체의 형상 또는 〈중간 유형-엘 카스티요에 부쳐〉(2015)나 〈중간 유형-보로부두르에 부쳐〉(2015)와 같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종교적 건축물들을 거쳐, 이후 〈중간유형-서리 맞은 다산의 오발 이무기〉(2020)를 통해 한국의 전통 설화에 다다른다. 이들은 서로 다른 개별적 형상들인 동시에, 근본적으로는 짚으로 엮인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한편으로 이들을 이루는 바로 그 짚이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이라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인공의 짚으로 이루어진 짚풀 공예는 보편과 원형에 대한 모색 역시 그에 대한 인공적이고 산업적인 재현과 연계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짚풀과 방울 등의 사물들이 구체적인 물성을 통해 교차의 지평과 그 과정이라는 내러티브를 가시화해 보인다면, 양혜규는 반대의 방향에서 내러티브 자체에 물성을 부여하는 작업에 주력하기도 한다. 물성이 내러티브를 태동시키고 내러티브가 물성을 태동시키는 순환적인 구조가 양혜규의 작업들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칠성방울이 그 물성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과 지금 여기를 교차시키는 미디엄이라면, 이무기나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설화의 서사적 원형은 양혜규에 의해 바로 그런 물성을 부여받는다.

 

3. 신이 되지 않은, 인간이 되지 않은

‘중간 유형The Intermediate’ 연작 가운데 2020년 작인 〈중간 유형-서리 맞은 다산의 오발 이무기〉나 2023년 작인 〈중간 유형-탄소 맞은 수컷 칠발 이무기〉는 이무기라는 신화적 미지에 형체를 부여한 작업들이다. 이무기는 용이 되기 전의 중간적 존재로, 이 기이한 신은 신이지만 아직 승천하여 용이 되지 못했으므로 진정한 신이라 불리기 어렵다. 용이 되기 위해서는 차가운 물속에서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한다. 물속에 사는 이무기는 호수와 연못, 강 등 담수에서 헤엄치는 모든 생물을 지배한다. 용처럼 비와 태풍, 벼락, 우박, 먹구름을 모두 관장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그저 구름 정도를 불러온다. 이 무기들끼리는 서로 어딜 다스릴지를 두고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설화 속에서 용은 신성한 존재로서 침범해서는 안 되는 권위를 지니나, 이무기는 사람을 해치는 사특한 존재로 그려져 영웅에 의해 사냥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무기는 신이지만 신이 아닌 듯 취급되기도 하는 중간적 존재이다 .

이무기가 그렇듯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구원한 동아줄 역시 하늘과 땅에 걸쳐져 있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양혜규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₂ & H₂O》전은 많은 관람자들에게 ‘한국적 정서’에 대하여 떠올리도록 만들었으며 그중에서도 〈소리 나는 동아줄〉은 한국의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연상시키는 작업이었다. 이에 관해 작가는 〈소리 나는 구명 동아줄〉과 관련하여 이 설화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한다.10 이무기가 승천의 가능태라면 동아줄은 바로 그승천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이다.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오른 뒤 오누이는 해가 되고 달이 되는 동시에 여전히 오누이라는 인간성을 지니며 인간이자 신인 반신이 된다. 설화 속의 동아줄은 구체적 물성을 갖지 않는 표상이다. 양혜규는 미디엄을 지시하는 이 표상을 방울로 이루어진 동아줄의 물성으로 가시화한다.

이무기 전설과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서로 다른 내러티브는 두 세계를 잇는 교차의 서사라는 점에서 보편적 원형을 함의한다. 보편적 원형으로서의 신화적 모티프가 지닌 신비는, 그것이 어느 한 지역과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고서 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양혜규의 눈길은 바로 그 신비의 정 가운데를 응시한다. 기록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서사가 반인반신인 길가메시에 관한 수메르의 신화이듯, 경계를 허물며 연결되는 일에 대한 인간의 유구한 탐구는 신에 대한 믿음의 방식과 구조적으로 깊이 연계된다.

양혜규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에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레퍼런스로서 명시된 바 있다는 점을 밝히며, 다만 이에 대하여 한국적이라는 평이 주어졌을 때는 깜짝 놀랐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설화는 한국의 설화인 동시에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고 이해되는 보편성을 담지하는 내러티브인 까닭이다. 하늘로 연결되는 사물이 동아줄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는 점이나, ‘잭과 콩나무’처럼 때로는 반대의 방향에서 그 매개가 비롯된다는 점 등에서 저마다의 내러티브는 차이를 지니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매개라는 사실은 공통적이고 보편적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관람객의 몫이란게 있다. 한국성이니 보편성이니, 내가 쉽게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이 설화가 담보하고 있는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작업과 연결 지을 수 있었다11.”

양혜규의 말을 빌려, 보편을 응시하려 하는 일이란 ‘믿음’이라는 말로서 가리켜져야만 하는 작업이다. 믿는 이를 신자라고 부를 때, 앞서 양혜규의 〈전사 신자 연인〉에 의해 신자는 연인의 사랑과 전사의 적의 사이에 놓이는 존재여야만 했다. 믿음이란 사랑과 적의 사이에서 늘 어딘가로 향해 가려는 미디엄이다. 끝내 어느 한 축으로 기울어져 정형화되지 않는 미디엄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덧없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석이 있다. 사람의 손길로 만들어진 반신 이무기는 이무기의 형체를 현현하고 있으나 끝내 용이 되지는 않은 채이다. 신을 부르는 칠성 방울의 울림은 우리를 따라 잠시 동안만 이어지다 그치기를 거듭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은 다만 그 덧없음을 감내하는 쉼 없는 여정일 따름이다. 설화와 무속 신앙의 내러티브란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어지고 펼쳐진 그런 믿음의 여정 자체일 것이다. 서로 하나가 아닌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서로 닮은 어떤 보편의 단서들이 그 여정의 길목에 있다.

양혜규의 작품들에게는 종종 난해하고 모호하다는 평이 주어지곤 한다. 작품들은 비밀을 풀어헤치는 해설이 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밀 그 자체를 현현하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정체와 의미를 알아채기 어렵다는 말들에도 불구하고 그 방울 달린 존재들, 짚으로 엮인 것들, 붙잡히지 않는 찰나로 이뤄지는 것들에 우리가 이끌린다면 그것은 그 비밀에 우리가 이미 연루되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으로 지시될 수 있는 비밀의 가장 큰 신비는 거기에 있다. 신화적 내러티브란 결코 충분히 해석될 수 없는 불가지론의 비밀을 더듬기에, 그리고 그 비밀은 바로 이 모든 것을 연루시킨 채이기에, 늘 우리를 미디엄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1 ‘수행적’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존 오스틴으로 그는 언어철학적 의미에서 언어란 사실관계를 묘사하거나 한 가지 사실을 주장할 뿐 아니라, 말하는 대상에 대해 행위하며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행위를 이행하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수행 개념을 정립한다. 이후 주디스 버틀러는 ‘수행성’과 ‘표현성’이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수행적 행위는 이미 주어진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 그 자체의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표현성이 주어지고 정해진 정체성을 전제한다면 수행성은 비고정적이며 역동적이다. 에리카 피셔-리히테, 김정숙 옮김, 『수행성의 미학』, 문학과지성사, 2017, 43-51쪽

2 서사학에서 스토리(story)와 서사(narrative)는 스토리가 서사에 선재하는 개념으로 분류된다. 우리는 구체적 수단을 통해 스토리를 서사로 구성하며, 이때 스토리는 서사의 ‘원형’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말로 표현되든, 무대화되든, 영화화되든,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매개될 때 발생하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서사이다.” H. 포터 애벗, 우찬제 옮김, 『서사학 강의』, 문학과지성사, 82쪽. 마몽텔의 무대론이나 사르트르가 진실한 스토리는 없다고 여긴 것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스토리(원형)에 대한 인식을 함의한다. 이 글에서 ‘원형’, ‘뼈대 구조’, ‘스토리’, ‘서사’ 등의 개념은 이러한 서사학 이론에 기초한다.

3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를 뜻한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8세기경 우루크를 지배한 왕이며 신화에 따르면 3분의 1은 인간, 3분의 2는 신인 존재다.

4 불가지론이란 인간은 그 유한성에 의해 한계를 지니기에, 신의 무한성이나 사물의 진정한 본질 등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 불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관점이다.

5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한정되어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 비시대적이고 비현실적인 자라고 정의한다. 이 시간의 어긋남은 동시대인이 그저 노스탤지어에 젖어 있는 자라는 의미가 아니며, 누구나 자신의 시대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감벤에게 동시대성이란 과거를 통해 자신의 시대와 거리를 두며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시대에 들러붙는 독특한 관계를 뜻한다. 조르조 아감벤, 양창렬 옮김,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난장, 2010, 70-72쪽.

6 양혜규는 자신의 작품에서 ‘손잡이’란 연결의 매개라는 점을 밝히며, 식민성과 매개에 대하여 언급한다. “중간에서 연결시켜 주고 있음에도 많이 소외되고 자꾸만 잊히는 존재인 거죠. 그와 같은 존재가 식민 역사에도 있었어요.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모르는 침략자는 언제나 일종의 현지 문화 번역자에게 의존했어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를 연결하는 번역자도 어찌 보면 ‘손잡이’인 셈이죠.” 양혜규, 「망각의 손잡이」, 《W Korea》, 2019. 11. 4.

7 Leslie Hill, Marguerite Duras: Apocalyptic Desires, London & New York: Routledge Chapman & Hall, 1993, p. 85.

8 정옥희, 『이 춤의 운명은』, 열화당, 2020, 111-117쪽.

9 양혜규는 인터뷰를 통해 이들에 대하여 기계나 디바이스(장치)보다는 가전 기기(Appliance)라는 용어를 쓰기를 선호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양혜규 인터뷰, 「틈새의 우주로 뛰어든 예술가-양혜규와 김보라」, 《보그(Vogue)》, 2020. 9. 21.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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