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어떤 술래잡기의 기록―테리길리엄,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
[제13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어떤 술래잡기의 기록―테리길리엄,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
  • 양진호
  • 승인 2019.09.0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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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주간’이 시작되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일상’이라는 불치병 환자에 대한 유쾌한 수술이다. 그는 재치와 냉소로 삶의 표면을 가위질하여 곪아 있는 깊은 곳을 태연하게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환부에서 아무것도 제거하지 않은 채 현실을 봉합하여 환자를 관객에게 돌려보내곤 했다. 꿈속에 그리던 여자를 찾아 중세 기사가 되어 떠나는 미래 도시의 소시민(〈브라질〉, 1985), 회사 건물을 해적선으로 만들어 국제금융이라는 대양을 향해 나아가던 노인들(〈몬티파이튼-삶의 의미〉, 1983), 지겨운 일상의 저편과 자신을 연결시켜 줄 연산 시스템을 발견해낸 컴퓨터 천재(〈제로법칙의 비밀〉, 2013). 이들은 모두 흥미롭게 얽혀 있는 세계를 헤매다 우리의 현실 어딘가로 폐기된 환자들이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주인공 토비도 그들 중 하나인 것 같지만, ‘신이 없는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노인 기사가 테리 길리엄의 필름 속에 들어와 만들어 놓은 세계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영화는 성주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성주간의 중반부를 장식하는 최후의 만찬은 죽음이라는 비극의 정점에 이르기 전 예수가 제자들에게 베푼 연회다. 예수는 살아 숨 쉬는 신으로 우리에게 왔지만, 로마 제국과 율법학자라는 권력을 무너뜨릴 정치적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속 권력이 파괴할 수 없는 우리의 내면에 고통 받는 자들의 영원한 안식의 제국을 만들고자 했으며, 그곳과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디딤돌로서 자기 자신의 육신을 내놓았다. 예수는 이 만찬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선고했으나, 그 죽음은 전쟁과 혐오라는 현실로부터 우리를 단단하게 보호해주는 ‘믿음’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내면이 아닌 현실 세계에 왕국(권력)을 만들어 냈을 때 예수는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게 되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새로운 예수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돈키호테는 그런 우리들 중 하나였던 작가 세르반테스가 소환한 페르소나였고, 테리 길리엄이 자신의 세계에 불러들인 예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감독의 ‘최후의 만찬’이라고 여겨도 괜찮을 것이다. 사막 위에 펼쳐진 꿈의 무대를 순례하다가 부자 알렉세이의 축제에서 비극적 운명과 마주하는 돈키호테(하비에르)와 산초(토비)의 여정은 곧 감독의 여정이다. 제작자와의 갈등과 자금난 등의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혀 오다 막다른 곳에 이른 테리 길리엄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죽음을 선고하려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현실의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이 복잡한 거짓말들은 이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가? 감독은 자신이 공들여 세우고 허물어 왔던 그 어떤 꿈보다도 견고하고 세련된 무대를 만들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끄집어낸 오래된 질문을 그 위에서 처형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는 ‘시간’이라는 추격자가 따라 붙고, 그들을 피해 환상의 골목을 열어줄 동료들이 우리와 동행한다. 이제 그가 만들어 놓은 한 편의 술래잡기에 동참하려고 한다.

  2. 첫 번째 조력자 : 집시

  테리 길리엄은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영화를 25년 동안 구상하고, 만들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그에게 있어 돈키호테 서사는 프로이트가 언급했던 로마의 유적지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성소였던 라만차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망망대해’처럼 느꼈던 한계와 경계가 없는 세계와 닮아 있다. 현실 원칙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이 세계는 파괴되고, 그 폐허에는 법과 언어가 폭력적으로 진입하여 자신의 도시를 건설한다. 그러나 멸망한 뒤 몇 백 년에 걸쳐 발굴되고 복원된 로마처럼, 우리와 처음 연결되었던 꿈의 세계 역시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계기들에 의해 발견되곤 한다. 테리 길리엄이 돈키호테에 대해 천착한 것은 바로 이 미치광이 노인의 세계만이 자신의 ‘망망대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토비는 현재 상업 광고를 찍고 있지만 한 때는 자신의 환상에 무모하게 빠져들던 영화감독이었다. 내면의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냈을 때 그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상상력의 발원지인 ‘망망대 해’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정신뿐이었다. 그런 그 에게 불법 복제된 영화 CD를 파는 집시가 다가왔으며, 조악한 가방 안에 토비의 데뷔작 〈돈키호테〉가 담겨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토비가 열어젖힌 세계의 안내자로서 마중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가 토비의 현실적 장벽들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집시는 토비가 현실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그를 더 깊은 꿈으로 잡아끌어 버리는 역할 에만 집중한다. 회사 사장의 함정에 빠져 토비가 경찰서로 끌려갈 때, 경찰차에 함께 타고 있던 집시는 경찰의 목을 조르고 토비의 탈출을 돕는다. 모험의 시작 지점이 된 이 사건으로 인해 토비는 ‘도망자’가 된 것이다. 집시는 첫 번째 조력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것은 토비를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유토피아로 진입시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었다. 데뷔작을 찍었던 로스 수에뇨스에 돌아와 기뻐했음에도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망상으로 치부하려 했던 토비에게, 집시는 “그러면 네 진짜 현실은 어디에 있지?”라고 되묻듯이 그를 흥미로운 무대들로 데리고 다닌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의 추격을 벗어나기 어려워졌을 때 집시는 구두장이 하비에르 영감과 역할을 교대하고 꿈의 귀퉁이로 숨어든다.

  3. 두 번째 조력자 : 구두장이 하비에르

  영화는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를 통해 관객들이 자기 자신임과 동시에 자신과는 무관한 생명체로 완전히 변3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체의 바깥에 있는 세계는 그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세계이다. 감독은 대상이 자신과 무관한 무엇인가로 변모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대상에게 카메라를 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감독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여야 하는 것이다.

  구두장이 하비에르는 토비의 첫 번째 영화적 대상이다. 그를 통해 토비는 내면에 간직했던 진짜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데뷔작을 찍은 이후 광고 감독이 된 토비는 대상에 대한 신비한 경험을 잊고 대상을 ‘어떻게’가 아닌 ‘무엇’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의 필름 안에 담기는 것들은 오직 상품으로서의 가치만 지닌다. 대상의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감독의 손에 쥐어져 있으므로 대상은 자기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렌즈 안에서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대상뿐만 아니라 토비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광고 감독으로서의 그의 세계는 광고주들과 회사 사장이 보장해주는 지위를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의 명령에 따라 스탭들이 움직이고 카메라가 돌아가며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단지 광고주가 위임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토비가 대상의 ‘실재’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세계는 토비를 완전하게 자기의 시간 속에 가둘 수 없었다. 그의 돈키호테는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를 깨뜨릴 ‘어떻게’라는 관점으로서 언제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 만난 것은 데뷔작에서 돈키호테 역할을 담당했던 구두장이 하비에르 영감이 었다. 나이에 비해 혈기가 넘치고, 사악한 마법사가 만든 가짜 현실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여 여인들을 구 출해내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긴 여정의 끝에 정혼자인 둘시네아가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는 그는 현실 속 토비의 모습을 역전시킨 거울상이다. 젊은 편인데도 모험을 두려워하고, 탐욕스러운 사장으로부터 그의 아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적당한 섹스 파트너로 삼는 것에 만족하며, 일상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속물인 지금의 토비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하비에르가 토비보다도 더 핍진하게 토비의 환상에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돈키호테로 부르지 않으려 하는 토비에게 그는 ‘산초 판사’ 역할을 부여하여 그를 환상 속에 붙든다. 하지만 하비에르가 현실 속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명과 나이, 사는 곳과 직업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여정의 중간에 만난 사악한 기사와의 싸움에서 이겨 상대의 투구를 벗겼을 때 그가 마을에 함께 사는 이웃임을 한눈에 알아봤으며(그들은 하비에르를 마을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이 모험극을 꾸몄다), 토비가 “당신은 내가 쓴 대본을 보고 연기했던 구두장이 영감일 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즉, 그의 내면에는 모험가와 구두장이라는 두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두장이로서의 삶은 아무런 희망과 즐거움이 없는 건조한 것이었으므로, 하비에르는 자신을 생기 있고 자유롭게 해주는 세계의 명령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세계의 문을 다시 연 것 역시 토비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하비에르와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서 길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잊힌 상태였다. 대상에게서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순간 그의 상상력은 생기를 잃어버렸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그가 찾아간 로스 수에뇨스에는 토비 자신에게 유토피아를 선물 받았던 하비에르가 있었고, 이제는 토비가 하비에르에게 자신을 구원해줄 세계를 돌려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으로부터의 탈주를 돕는 하비에르의 역할은 영화의 중반부에서 히로인 ‘안젤리카’ 가 우연하게 등장함과 동시에 서서히 옅어진다.

  4. 세 번째 조력자 : 안젤리카

  로스 수에뇨스의 허름한 술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던 소녀 안젤리카는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과거의 토비가 발견해낸 또 하나의 영화적 대상이다. 하비에르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일상에서 탈출할 기회를 은밀하게 바라고 있었고, 토비는 식사 중에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단번에 그녀 안에 있는 둘시네아를 발견하게 된다. 안젤리카는 〈돈키호테〉의 촬영이 끝난 뒤에 하비에르처럼 자신의 역할에 완전히 빠져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상을 봉인해버렸다. 그녀의 아버지 라울은 오랜만에 마을로 돌아온 토비에게 “네 영화를 찍은 뒤 많은 게 변했어. 그 애(안젤리카)는 부서져버렸지”라고 쏘아붙인다. 안젤리카는 자신의 꿈을 쫓아 마드리드로 떠났고, 라울은 홀로 남아 딸의 오래된 사진을 매만지며 그녀의 순수했던 시절을 회상할 뿐이다. 라울은 〈돈키호테〉 촬영 당시에도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자기 딸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세계로 데려가지 못하게 경고했다. 그는 토비의 스탭이 아닌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찍고 있는 감독 테리 길리엄에게,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영화적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대상의 내면에서 현실과는 무관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라울의 예상대로 안젤리카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천사’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례길을 따라 자신의 영화 속으로 들어와 버린 토비의 입장에서는 안젤리카를 찾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안젤리카라는 이름의 히로인은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영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2010)에도 등장한다. 매일 농부들의 쟁기질을 카메라에 담으며 일상의 반복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던 사진사 이작은 어느 부잣집 안주인의 의뢰를 받고 젊은 나이에 죽은 그녀의 딸 안젤리카를 찍게 된다. 그녀의 사진을 현상해 홀로 바라보던 도중에 이작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웃는’ 안젤리카의 모습에 매료되고 만다. 그는 안젤리카의 손을 잡고 마을을 떠다니는 꿈을 꾸다가 놀라 잠에서 깨며,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점점 말라가는 그를 보다 못한 집주인이 의사를 불러 치료를 맡기지만, 안젤리카의 영혼은 그 순간 이작을 강하게 유혹하여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 버린다. 두 안젤리카는 애인을 ‘멈춘 시간’으로 데려간다. 시간은 이 세계의 개별자들의 삶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숫자들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을 인지하게 해주지만,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현재에서 잘려나가 시간 바깥에 폐기되어 있다. 멈춘 시간, 삶을 지배한 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만 우리는 천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로스 수에뇨스의 안젤리카는 시간 바깥에 연인을 영원히 묶어 놓을 수는 없었다. 토비의 여정 속에서 시간은 현실과 아주 가까이 닿아 있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비에르와 토비는 안젤리카와의 우연한 만남 이후에 곧 토비 회사의 사장 부인인 제키를 숲에서 만나게 되고, 그녀를 따라 들어간 러시아 부자 알렉세이의 성(별장)에서 토비는 광고 감독이라는 자신의 현실적 위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돈키호테 배역은 여전히 하비에르가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젤리카는 토비의 서사에서 둘시네아로 존재해야만 했고, 둘시네아는 돈키호테의 연인이어야 했다. 토비는 성안에서 산초 판사 혹은 속물적인 광고 감독의 배역을 연기해야 했으므로 그녀를 알렉세이로부터 구출하는 것 역시 토비의 몫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토비에게 “당신은 알렉세이의 몫(안젤리카 자신)을 훔칠 용기가 있어?”라고 쏘아붙인다. 그러나 자기 환상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던 토비는 자신의 광고 상품을 대하는 것처럼 “네 몸값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라고 소리치며 주머니에 있던 스페인 금화들을 뿌린다. 현실의 바깥에서 힘겹게 찾아낸 ‘망망대해’의 조각들은 그렇게 쉽게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5. 네 번째 조력자 : 토비

  주판치치는 칸트의 ‘숭고das Erhabene’에 대한 설명에서, “숭고의 감정에 압도된 어떤 사람에 대해 무관심한 관찰자가 되는 것으로도 바로 이 감정이 즉각 익살극으로 변모되기에 충분하다”4라고 언급한다. 알렉세이의 성에 초대받은 관객들도 자신의 숭고한 세계에 빠져든 노인을 비웃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주간 연회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이벤트로 알렉세이가 기획한 쇼에서 하비에르는 사악한 마법사의 마법에 걸린 이교도 여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눈을 가린 채 목마에 타고 우주로 떠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다. 하비에르는 이것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연극임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현실과 맞선 것만은 분명하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노인을 향해 관객들은 비웃음을 퍼붓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하비에르는 거울 속 자신을 ‘멍청한 늙은이’ 라고 부르며 저주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 시퀀스에서 자기 방 문턱을 닦으며 토비에게 “손님은 주인의 환대에 보답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돈키호테 역할을 포기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토비와 안젤리카는 하비에르가 안간힘을 쓰며 짊어졌던 돈키호테라는 페르소나의 죽음을 목도하고 숭고의 감정에 압도된다. 토비가 스스로 돈키호테가 되기를 거부해왔던 이유는 환상과 현실간의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서사 속에서 자신을 대신할 다른 무엇인가로 분열되어 있어야만 그 세계를 유지할 수 있다. 만약 그가 규칙을 어기고 스스로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면 현실 속의 토비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과 환상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돈키호테가 되기로 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의 역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둘시네아(안젤리카)를 시간이 멈춘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탈 를 감행한다. 그러나 안젤리카는 곧 위병들에게 잡혀 자기 방으로 돌아가게 되고, 토비는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또다시 집시의 도움을 얻어 안젤리카의 방에 숨어들지만 그녀의 방에는 자신이 ‘상사의 아내’임을 거듭 강조하는 제키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쫓아온 하비에르를 토비가 위병으로 오인하고 난간 아래로 떨어뜨려 죽였을 때 길었던 이야기는 종장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6.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

  알렉세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게 된 안젤리카는 탐욕스러운 주인으로부터 해방되고, 토비는 하비에르의 시신을 나귀 등에 싣고 안젤리카와 함께 로스 수에뇨스로 돌아간다. 초라한 결말이지만, 어쨌든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를 구해 보금자리로 귀환하는 것이므로 여행은 거기서 끝나야 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토비와 안젤리카의 로맨스가 시작된다면 그들로서는 충분히 행복한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 가까운 곳에 이르러 토비는 갑자기 “모험을 떠나기 좋은 날이구나. 난 뼛속 깊이 느낄 수 있다”라 는 대사를 읊는다. 그러자 세 명의 거인들이 그의 앞에 나타나고, 토비는 안젤리카에게 “오지 마라. 너에게는 위험하다”라고 소리친다. 그것은 앞선 순례 길에서 그가 하비에르에게 줄곧 들어 왔던 명령, 즉 겁 많은 산초를 꾸짖는 돈키호테의 외침이었다. 왜 여행이 끝났는데도 토비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둘시네아는 안젤리카가 아니라 산초가 되어야 했는가.

  테리 길리엄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시나리오들을 더 많이 써나가며 오직 돈키호테 서사가 세상에 영화로 나올 날만을 기다렸던 25년 동안 파산 지경에 이르기도 하고 주연 배우들을 잃기도(캐스팅 취소와 사고 등등) 했으며, 가까스로 완성한 영화를 제 작자와의 불화 때문에 칸영화제에 그랑프리 경쟁작 으로 올리지도 못하게 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런 영화 제작 환경에 대한 환멸 때문에, 그는 영화 밖으로 나오기를 주저하며 고된 여정을 마친 주인공을 다시 서사의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도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행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아무도 모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해변에서 얼굴을 검게 태우고 비포장 도로에서 발에 상처를 입히며, 무거운 눈꺼풀 뒷면에 숨어 있는 밤하늘의 별들을 찾아 나가는 동안 현실에서는 전쟁이 멈추지 않고 글로벌 자본은 더 많은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몬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어떠한 답도 찾아낼 수 없다. 원점 회귀일 뿐인 이 허무한 행위를, 감독은 왜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관객들에게 힘겹게 권하는 것인가? 그것은 영화가 ‘부재하는 것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이 경쟁들은 대부분 연장전 없이 끝난다. 그러나 주체를 획득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의 내면에는 현실을 닮은 허구의 경기장들이 끝없이 생겨나고, 거기서 그들은 처음으로 스스로가 원했던 경기들을 펼치게 된다. 한 번도 자기 자신이 었던 적 없는 이들을 절실하게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 잔혹한 경제적 현실로 환원된 거룩한 유령들5이 무덤에서 일어나 삶에 대해 아무런 감각도 없는 우리를 점령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영화관에서 치르는 신성한 의식이다. 감독은 스스로 유령이 되어 관객들의 내면으로 침투해 그들의 현실을 완전히 뒤바꿔놓으려고 한다. 영화가 ‘실패한 현실’이 라면, 현실은 ‘실패한 영화’이다. 돈키호테가 된 테리 길리엄은 우리를 실패한 현실로 데려다 놓고 “모험을 떠나기 좋은 날이구나. 난 뼛속 깊이 느낄 수 있다”고 외치고 있다. 이로써 시간과 우리의 술래잡기는 스크린 바깥에서 또다시 시작되고 마는 것이다. 그는 마침내 영화 자체가 되어 우리 대신 그 질문 속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의 환상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포개진 시선의 고정점에서 우리는 이 세계가 말끔하게 가려 놓은 뒷면에 난 균열을 발견하고, 그 촉감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나타나는 모험의 무대에서 우리는 산초나 둘시네아의 역할을 수행하며 돈키호테가 된 테리 길리엄을 즐겁게 보좌한다. 이것은 세상이 영화가 되는 순간이다.

 


1 성주간(Hloly Week, 聖週間) 또는 고난주간苦難週間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을 묵상하는 교회력 절기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고난주일)로 시작하며, 성토요일 밤(부활 성야)으로 마친다. 가톨릭에서 성주간은 성 토요일까지이다. -위키백과
2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1997, 234쪽.
3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의 맨살-하스미 시게히코 영화비평선』, 박창학 역, 이모션 북스, 2015, 25쪽
4 알레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10, 240쪽.
5 『공산당 선언』 이후 수년이 지나 원숙해진 마르크스가 정교화한 “정치 경제학 비판“의 근본적 가르침은, ‘모든 거룩한 괴물을 이렇듯 잔혹한 경제적 현실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 자신의 유령을 낳는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오영숙 외 옮김, 울력, 2004, 185쪽.

양진호
1985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재학 중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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