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허무는 힘: 이지은 〈비밀의 언덕〉
[제18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허무는 힘: 이지은 〈비밀의 언덕〉
  • 정새별
  • 승인 2024.01.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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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어린이가 서사를 이끄는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영화는 생각보다 많이 개봉하지 않는다. 티켓 구매력이 있는 주 소비층이 동일시하기 쉬운 인물을 내세우는 편이 흥행의 안전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어린이 배우와 소통하고 협업하는 일이 제작자들에게 낯설기 때문일까. 어쩌면 어린이의 감정, 생각, 심리 또는 또래문화를 적확하게 구현하기란 어렵다고 판단하는 조심스러움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든, 그것은 어린이와 어른이 다른 존재라는 구분을 전제한다.

드물게 어린이가 주역인 영화가 만들어질 때도, 어른과 아이의 대비 구도가 명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집〉(2019), 〈홈〉(2017), 〈벌새〉(2018)와 같은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이나 아동학대 등 본인이 손쓸 방도가 없는 어른의 질서 아래에서 무력하게 상처받고 방황한다. 즉 아이는 보호와 연민의 대상이며, 어른은 상황의 책임자다. 분명 영화의 ‘서사적 주체’는 어린이지만, 그가 놓인 상황을 초래했거나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주체’로서의 어른이 최초/최후의 심급으로 존재한다.

〈비밀의 언덕〉의 명은도 자꾸만 어른의 세계와 충돌하는 아이이다. 명은의 부모는 반장에 선출되거나 글짓기 대회에서 상장을 받아온 명은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기는커녕 잔소리를 늘어놓고, 분리수거를 하고 불쌍한 이웃을 도우려는 명은의 기특한 행동을 되려 타박한다. 명은은 그런 부모님을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비밀의 언덕〉은 어른과 아이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분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어린이의 순수성과 어른의 세속성이라는 양분된 관념을 해체하고 어른과 아이를 연속선상에 두는 성취를 이룬다. 지금부터 〈비밀의 언덕〉이 어린이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비밀의 언덕〉의 방식이 더 옳거나 지향할 방향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밀의 언덕〉의 새로움이 어른과 아이에 대한 세심한 고찰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고, 적어도 그 가능성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자세만큼은 옳거나 지향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1.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을 만큼의 고난

명은은 자신을 속상하게 만드는 부모님에게 나름의 저항을지속한다. 그는 반장직을 무르라는 엄마의 엄포를 무시하고 반장으로서 열심히 학급 활동을 이끈다. 밤늦게까지 혼자 분리수거를 하고, 나중에는 집을 나와 할아버지, 삼촌과 살며 불쌍한 이웃을 돕기도 한다. 이렇듯 명은에게 닥치는 시련은 명은의 힘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만큼만 주어진다.

물론 명은을 가장 깊은 갈등으로 몰아넣는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부모의 직업이 창피하다는 점이다. 확실히 부모의 직업은 아이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아이가 감당 가능한 수준에 있다. 사람의 고민과 상처에 경중을 따지는 일은 조심스러워야 하겠지만, 신체적 폭력(〈4등〉(2015), 〈벌새〉)이나 가족의 해체(〈우리집〉, 〈홈〉)에 비해 젓갈 가게에서 일하는 부모님이 창피한 문제는 비교적 조촐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는 한가하다고, 누군가는 버릇없다고도 여길 만한 명은의 고민은 그를 순수하고 가여운 피해자의 위치로부터 얼마간 떨어뜨려 놓는다. 이는 명은이 감당해야 하는 아픔의 정도가 작기 때문이 아니라, 명은의 문제에 대한 원인이나 해결책이 전적으로 어른에게만 달려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명은이 부모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는 데에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 경쟁의식을 부추기는 교육 시스템, 부모의 무심함 등 어른의 책임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민규와 혜진이라는 또래 인물로 인해 명은의 태도는 단순하게 정당화되기 어려워진다. 명은의 오빠인 민규는 엄마가 젓갈 장사를 하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혜진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는 “아가씨 골목”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솔직하게 말한다.

다시 말해, 명은의 문제는 그가 스스로 해결책을 고민하고 선택할 지점을 남겨놓는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시스템이 함께 변화해야 하겠지만, 당장 바꿀 수 없는 체계 안에서 조금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직접 결정할 가능성이 명은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은은 부모님이 창피하다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첫 번째 해결책은 부모님의 직업을 속이는 것이다. 명은은 자신이 부모님의 직업을 속인 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는 직업 조사 숙제라고 거짓말해서 회사원과 사진을 찍고, 친구의 집에 일부러 놀러 가 친구의 엄마와 함께 쿠키를 만드는 사진을 찍는다. 가짜 가족 사진첩을 만들어 회사원과 친구 엄마를 각각 자신의 아빠와 엄마라고 자랑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명은은 가정환경조사서 속 부모님 직업란에 ‘젓갈 가게’라는 단어를 똑바로 쓴다. 문제에 대한 두 번째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모님의 직업을 더 이상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 변화의 기점에 어른의 질책이나 가르침은 없다. 명은을 질책하는 사람이 있다면 겨우 한 살 오빠인 민규이고, 명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또래 친구인 혜진이다. 혜진이 세상의 편견에 떳떳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며 명은은 자신을 돌아본다. 무엇보다 명은은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솔직하게 쓴 글이 대상을 타게 되자 불현듯 그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수상작은 신문 등에 공개될 예정인데, 가족들이 그 글을 보면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진 것이다. 결국 명은은 대상을 받지 않기로 결심한다. 명은은 직접 시청에 전화해 대상 취소를 부탁하고, 담임선생님 애란의 설득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아이의 문제는 애초에 어른만이 타개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되거나 어른의 조언을 필요로 한다. 〈우리집〉에서 유미, 유진 자매는 또다시 원치 않는 이사를 가야 하고, 하나는 부모님의 이혼을 막지 못한다. 〈홈〉에서 서류상 고아가 된 준호는 동생의 친아빠인 원재의 입양 결정에 따라 가족을 얻을 수도, 고아로 남겨질 수도 있다. 〈4등〉에서는 체벌을 일삼던 수영 강사가 ‘폭력이 아닌 아이의 간절함이 성과를 낸다’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직접 준호에게 일러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러한 서사는 아이를 보호하고 바른길로 인도할 어른의 책임을 강조한다. 영화가 아이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은 어른을 반성하게 만드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나아가, 여러 영화는 그 반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나이에 비해 성숙하게 묘사하거나 그들에게 각종 고난을 부여한다. 〈우리집〉의 하나는 직접 온 가족의 식사를 요리하고, 〈홈〉의 준호는 원재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4등〉에서는 준호가 수영 강사에게 맞는 장면과 준호의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이 수차례 등장해 마음을 아프게 하고, 〈홈〉의 준호는 학교폭력을 당하며, 〈우리집〉의 아이들은 길을 잃고 밖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상황에 놓인다. 성숙하고 착한 아이들의 고난과 상처는 이들에 대한 연민을 더욱 증폭시키며, 어른의 무책임함에 대한 미안함과 분노를 끌어낸다.

확실히 현재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매우 제한적이며, 따라서 아이들을 돌보고 지킬 어른의 책임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어른은 다 자랐는가? 더 이상의 성장이나 변화의 여지가 없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키를 지니고 있는가? 어린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어린이가 고민하는 문제는, 어른이 고민하는 문제와 다른가?

이런 맥락에서, 〈비밀의 언덕〉의 애란이 대상을 받지 않겠다는 명은의 결정을 되돌리려다 결국 그 결정을 존중하는 서사는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 애란은 명은의 수상이 “학교가 걸린 문제”라고 설득한다. 여기에 명은은 “제가 쓴 거잖아요. 학교가 무슨 상관이에요?”하고 항변한다. 애란이 “이거 쓰라고 한 사람이 누구야? 너 맞춤법도 선생님이 다 고쳐줬어”하고 받아치지만, 명은은 이렇게 말한다. “대상 받은 건 제가 혼자 다 했어요.” 명은은 스스로 쓰고, 출품하고, 상을 거부한다. 명은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이미 스스로 찾은 상태이고, 어른은 단지 그 마음을 헤아려주는 자리에 놓여있다. 애란은 “명은이의 솔직한 마음에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할 거야”라고 조언하다가도, 이내 “억지로 솔직해질 필요 없어. 솔직한 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야"하고 말한다.

대상을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 중에 정답은 없다. 어른인 애란도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일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선택을 아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다만 그 선택에 대해 “중요한 거는 솔직한 거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을 하더라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라는 격려를 건넨다. 어른은 모든 정답을 알고 있지 않다. 아이의 선택과 결정을 오롯이 존중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비밀의 언덕〉은 바로 그 지점을 이해하는 영화다.

(주)엣나인필름 제공.

2. ‘좋은 어른’의 자리를 마련하기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어린이에 대한 어른의 역할을 단순히 회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화는 명은의 선택을 결정짓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위치가 아닌, 명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해하고 지지하는 위치에 애란을 둠으로써 어른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긍정한다. 〈비밀의 언덕〉의 두 번째 특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이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는 영화 중 상당수는 어른의 부재나 무관심이 아이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보여주기 위해 의지할 만한 어른을 제거한다. 〈우리집〉에서 유미, 유진 자매의 부모는 며칠씩 아이들만 두고 집을 비운다. 〈홈〉에서 원재는 준호의 아버지가 되길 포기한다. 〈벌새〉에서 은희가 유일하게 마음을 연 어른인 영지 선생님은 사망한다.

〈4등〉의 경우는 반대로 부모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개입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보여준다. 수영 대회에서 1등을 꼭 하고 싶다는 준호에게 광수는 체벌을 하지 않는 좋은 코치가 되어주는 대신, “니 혼자 해봐라. 금메달 딴데이”라는 말만 던지고 떠난다. 부모나 코치의 케어 없이 혼자 연습하면 금메달을 딸 거라는 그 ‘예언’이 적중하는 결말은 어른의 간섭 자체에 회의감을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도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아이 곁에 의지할 만한 어른을 남겨두지 않는다.

반면 〈비밀의 언덕〉에서 명은은 지속적으로 다양한 어른과 관계 맺으며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할아버지는 명은의 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은 불우이웃 모금에 명은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애란은 명은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준다. 명은에게 잔소리만 하던 부모님도 마지막에는 명은의 성취에 따뜻한 미소를 보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특히 중요하다. 명은은 새 학년에 올라가면서 애란이 아닌 새로운 담임선생님에게 가정환경 조사서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제 명은이 부모님의 직업을 속이지 않기로 한 점이 기특한 것과는 별개로,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아이를 차별하고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게다가 명은의 새 담임선생님은 테니스 라켓을 들고 삐딱하게 앉아있다. 권위주의적인 사람이 아닐까 불안하던 순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조사서를 뒤집으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가정환경이 아니라 “다만 너희들이 궁금”하다며 조사서 뒷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자유롭게 써보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명은에게 좋은 어른을 남겨준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어른의 부재나 부정적인 어른의 존재를 지적하던 중에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인지를 이야기하는 데는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이때 〈비밀의 언덕〉이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좋은 어른’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정답을 알고 있는 도인道人이 아니라, 아이와 나란히 함께 걸어가는 길벗이다. 〈비밀의 언덕〉은 명은의 주도적인 선택과 결정을 충분히 보장하면서도, 그러한 주체성은 어른의 지지와 보살핌이 함께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나아가, 영화는 어른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때 아이가 더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모님의 직업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한 명은의 성장에 자족하지 않고, 그가 부모님의 직업을 말하든 하지 않든 괜찮은 환경을 제공하는 선생님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젓갈 가게에서 일하는 부모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아이에겐 너의 부모가 아닌 너를 알고 싶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이렇게 〈비밀의 언덕〉은 부재하는 어른의 자리가 메꿔지거나 나쁜 어른이 사라지길 기다리기 이전에, 우리가 이미 어떤 아이의 곁에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3. 어른도 여전히 아이임을 인정할 때

기존의 영화는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를 줄곧 분리해 왔다. 마치 물로 태어난 아이들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름 분자로 바뀌어 더는 물과 섞이지 못하는 세계로 올라가 버린다는 듯이. 영화 속에서 어른들은 생계유지나 이혼, 재산 분할 같은 세속적인 문제에 치여 아이들의 예민한 감성을 버거워한다. 이를테면 〈우리집〉에서 유미, 유진 자매의 집주인은 집 문제에 관해 질문하는 유미에게 “어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선을 긋고, 〈우리들〉(2016)에서 선의 부모는 “요즘 애들 다 그래요”, “애들이 일 있을 게 뭐 있어”와 같은 말을 한다. 모두 아이들에게도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어른들의 잘못된 태도를 꼬집는 연출이지만, 한편으로 어른들의 문제가 아이들의 문제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4등〉에서도 아이는 세속적이고 폭력적인 어른과 완전히 대치하는 관계로 설정된다. 〈홈〉과 〈남매의 여름밤〉(2019)에는 아이를 이해하는 어른이 등장하지만, 같은 처지를 공유하는 어른은 아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순수함과는 멀찍이 떨어져 굳어버린 잿빛 시멘트처럼 묘사된다.

반면, 어린이와 어른의 동행에 따스한 햇볕을 비추는 영화 〈비밀의 언덕〉은 어른 또한 여전히 아이라는 사유로 나아간다. 명은의 고민이나 문제점은 다른 어른들의 고민이나 문제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명은이 부모님의 직업을 속인 것처럼, 애란도 학교에 지각할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감추고 싶어 한다. 또한, 애란은 특활 시간 활용에 관한 명은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한다. 애란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는 명은의 얼굴은 같은 아이디어를 교장 선생님에게 건의하는 애란의 얼굴로 바뀌고, 두 사람의 모습은 진한 분홍색의 옷과 함께 매우 비슷하게 겹쳐진다. 명은이 담임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것처럼 애란도 교장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 명은이 시내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탔을 때 학교 밖에는 축하 현수막이 걸린다. 현수막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애란은 아마 명은과 혜진의 이름만큼이나, 그 밑에 담당 교사로 쓰인 자신의 이름을 오래도록 보았을 것이다.

명은의 삼촌 진우와 아빠 성호도 마찬가지다. 명은이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타와도 성호가 “우수상이네? 최우수상을 타야지”하고 깎아내리는 것처럼, 진우는 이른바 ‘막노동’을 하며 사는 자신에게 “그게 일이냐”며 핀잔을 주는 아버지에게 여러 번 시달린 눈치이다. 명은이 친구들에게 자신보다 비싼 간식을 돌리는 경수를 보며, 또 자신보다 더 큰 상을 받는 혜진을 보며 풀이 죽는 것처럼, 성호는 친구와 젓갈 가게 손님이 자신보다 아내의 능력을 치켜세우는 말을 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그러니까 〈비밀의 언덕〉에서 어른과 아이는 대비되거나 대치하는 관계이기보다는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관계이다. 어른도 아이들처럼 여전히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고, 그래서 자신을 포장하기도 하고, 괜히 남 탓도 해보고, 그러다 싸우기도 하며, 종종 후회한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어른은 여전히 성장할 수 있는 존재다. 명은이 최우수상도, 우수상도 아닌 입상을 받고 와서 다시 이를 자랑할 때 성호가 웃으면서 “우리 딸 대단하네”하고 칭찬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어른은 아이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아이를 이끄는 존재도, 아이의 단계를 졸업하고 변화를 멈춘 고정된 존재도 아니다. 어른은 아이와 다르지 않다.

나 또한 글을 쓸 때의 솔직함에 대한 고민으로 명은과 연결되어 있다. 나의 글은 언제나 활자와 활자 사이의 여백에 진실을 숨겨 놓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일 때도,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일 때도 있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쓰면 세상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까 봐 두렵고, 내가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할까 걱정된다. 그래서 진짜 쓰고 싶은 문장을 지우고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문장들을 채워나간다. 그러고 나면 나의 글이 한 톨의 거짓에 오염되었다고 느끼곤 한다. 쓰고 싶은 것과 쓸 수 없는 것이 일치하는 딜레마 앞에서 나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기 바쁘다. 〈비밀의 언덕〉에서 혜진은 자신이 상처받게 되더라도 솔직한 글을 쓰기로 다짐했고, 명은은 가족들을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솔직함을 포기했다. 두 아이의 선택을 모두 긍정하는 영화를 보며 위로받은 나는 한 뼘 더 자란 아이가 된 것이 아닐까.

대개의 영화가 아이와 어른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순수하거나 예민한’ 시선을 바라며 어린이를 내세우는 반면, 〈비밀의 언덕〉은 아이와 어른 사이의 차이를 지워내고 오히려 그들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어린이를 필요로 한다. 어른들이 행동하고 깨닫는 것은 아이들이 행동하고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이들에게서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습, 관습, 문화, 법, 언어 등에 익숙해지기까지의 시간을 상대적으로 덜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지, 어른과 아이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순수하고 따라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생각은 그리 온당하지 않다. 어른에게서 아이의 가능성을 떼어놓는 순간 미래는 고여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아이일 수 있고, 아이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어른의 변화 가능성이 열린다. 수직적인 성장이 아닌 모든 방향으로의 성장을 꿈꿀 수 있다. 여전히.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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