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쿨투라 신인상 문화평론 부문 당선작] '인디'의 추억: 1996년에 대한 회고
[제7회 쿨투라 신인상 문화평론 부문 당선작] '인디'의 추억: 1996년에 대한 회고
  • 오영진
  • 승인 2014.03.2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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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들은 마르크스주의보다 버블 검을 더 좋아한다. 그게 행복하니까.” 
(1) 이브 아드리앙(1973)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당시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 실은 필연적인 관계임을 깨닫는다. 모리 요시타카는 이것을 스트리트의 연표1)라 불렀다. 이를 테면 1974년 일본 내에서 세븐일레븐 1호점 개점과 같은 해 간행된 푸코의 『말과 사물』 의 병치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24시간 편의점의 탄생이 예고하는 프리터적인 삶-시간-노동은 근대적 훈육기술의 힘을 매끄럽게 빠져나가지만 생체권력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포획될 위험에 처해있다. 반면, 『말과 사물』은 지식장에 배치된 경험의 근본적 존재양식으로서 ‘에피스테메’를 취급하며 생명, 노동, 언어의 관계를 다루었던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것들의 병치를 통해서 예상치 못한 의미를 알아간다. 그렇다면 지식장과 스트리트, 양자 간 긴밀한 관계를 오직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는 우리의 일상적 삶이야말로 사상의 격전지이며,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이라고 귀뜸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이 사건과 사건 사이 인과에 대한 명쾌한 논리적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것은 같은 시·공간 속에서 미묘하게 병치되는 요소들에 대한 경험적 생생함의 진술을 요구한다. 이때 느껴지는 아리송한 긴장이야말로 관련 없는 요소들의 진정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관련 없지만 관련이 있다. 경험은 우연적인 것들로 가득찬 잡다함의 총체이다. 이 우연을 필연으로 해독할 임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한국의 1996년이라는 시?공간 속 ‘인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 1996년, 몰락과 생성의 서사

1996년 8월 ‘연대사태’는 운동권 몰락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17년이 지난 오늘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길 꺼리는 경향이 있다. 뼈아픈 패배였으며, 그 원인이 운동권 스스로에게 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2) ‘연대사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운동권의 폭력성으로 인식되어, 대중들이 이들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고2였던 필자는 TV를 통해 불타는 바리케이트와 자욱한 검은 연기, 화염병과 뜯어진 보도블럭 등의 이미지를 다소 생소하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연례적인 행사였던 조국통일범민족대회를 철저하게 진압한 배경은 첫째, 김영삼 정권 기간 93년 서해 훼리호, 94년 성수대교 붕괴,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발 등으로 이어졌던 대형참사와 가파른 물가상승으로 인한 민심이반을 무마하기 위해, 둘째, 당시 민간통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한총련이 정부의 통일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렇지 않더라도 통일정책에 있어 무능력하던 김영삼 정부가 정부주도의 ‘창구단일화’의 기세를 집권 후반기에 잡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이에 대중의 눈높이를 무시하고 교조적 태도로 조직을 운용하던 한총련이 힘으로 맞서면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다. 어느 측의 과실인지 여전히 공방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경찰 1명 사망, 수백명의 부상자를 낳고, 5800명 연행, 450명의 구속자를 낳았다. 결국 이 사건은 별다른 항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이후 대학생의 정치참여를 불능으로 만들고 만다. 연세대의 경우 이 사건 후 바로 비운동권계 학생회가 들어선다. 이후 대학가 문화에서 학생회 조직은 정치성을 잃고 학생들의 민원을 대리 해결해주는 준행정적인 집단으로 그 의미가 축소된다.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1996년을 기억하는 한 방식일 것이다. 다가올 경제위기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나라 곳곳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직전에 ‘정치’영역의 ‘거대한 이야기’가 무너지기 시작한 몰락의 해인 것이다.

하지만 1996년은 누군가에게는 생성의 서사가 시작하는 해이기도 하다. 홍대 근처에서는 그들만의 ‘작은 공동체’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라이브 연주 클럽 ‘드럭’에서 활동하던 혈기 넘치던 펑크/얼터너티브 밴드들이 그들의 첫 컴필레이션 앨범 제목을 “Our Nation”(1996. 10)이라고 지었다. 같은 해 5월 “스트리트 펑크쇼”를 기획하고 출현해 한낮의 신촌 거리에서 펑크 사운드와 슬램의 향연을 대한민국 최초로 소개한 그룹들이다. 이들이 출현은 지극히 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클럽 ‘드럭’(1994-)은 애시당초 록이나 레게음악을 틀고 병맥주를 파는 곳으로 구상되었다. 홍대 앞에서 이런 종류의 가게는 장사가 나름 되는 편이라 흔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사장 이석문은 클래시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 둘 펑크 키드들이 이곳에 몰려들게 되면서 95년부터 본격적으로 라이브 연주를 하는 곳으로 성격을 바꿔나가게 된다. 지금은 인디씬의 원로가 되어버린 ‘크라잉 넛’의 경우, 밴드를 하겠다고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연주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저 망가뜨리고 부술 뿐이었다. 사장이 화가 나서 고함을 쳤다고 한다. “너희들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크라잉 넛이 대답했다. “우리는 록스타다!”

90년대의 인디씬에는 이런 종류의 신화가 많았다. 그 내용은 대개 그들이 밴드를 결성하는 순간까지도 악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 밴드 멤버보다 밴드의 이름이 먼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펑크 사운드를 구사한 것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드럭’을 무대로 공연을 했던 ‘언니네 이발관’의 경우를 보자. 리더였던 이석원은 하이텔에서 모던 록 소모임을 만들어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모던 록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던 중 KBS FM 「전영혁의 음악세계」란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에 나가, 모던 록 장르의 음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그 당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던 ‘언니네이발관’이란 밴드의 리더라고 소개하고 만다. 문제는 이러한 사기극이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이 가상의 밴드 이름 아래로 당시로서는 아마추어였던 뮤지션들이 모였고, 언니네이발관은 불과 2년만에 정규앨범을 발매하는 밴드로 발전한다. 델리 스파이스같은 밴드도 이런 방법으로 멤버를 모았다고 한다. 누구나 기타를 칠 수 있다는 신화가 인디씬을 지배하였다.

펑크 음악의 유행은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그동안 한국대중음악의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 음악은 줄곧 있어 왔다. 60-70년대에는 미8군 기지 주변의 나이트 클럽을 위주로, 80년대에는 극장이나 고등학교 강당 등을 대관해 주류음악에서는 들을 수 없는 록·메탈 음악이 이어져 왔다. 또한 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포크’ 계열의 노래패가 크게 유행한 사실이나 신촌 등지의 라이브 클럽에서 ‘블루스’를 구사한 소위 ‘언더그라운드’ 계열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90년대의 인디씬이 이들과 차별되는 지점은 이들이 철저하게 아마추어리즘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헐렁한 티셔츠나 청바지를 입고 3코드나 4코드만으로도 그럴듯한 곡을 만들 수 있다는 펑크/얼터너티브의 방법론은 관리가 어려운 장발 코스튬과 하이테크닉이 필요한 기타리프나 솔로잉을 거부한다. 엉터리 연주와 조악한 사운드는 그 자체로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90년 중후반 새롭게 탄생한 한국의 인디씬은 섹스피스톨즈와 너바나의 유령이 약간은 늦게 도착해 떠도는 곳이었다.

‘드럭’은 불법적인 공간이었다. 96년의 식품위생법은 일반음식점 용도로 신고된 공간에서는 2인 이상의 라이브 공연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공연을 위해서는 술을 팔며 손님이 춤을 출 수 있는 유흥업소로 신고를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적자로 운영되는 클럽입장에서 세금이 높은 유흥업소로 전환할 수는 없었다. 이는 한국에서 라이브 음악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기껏해야 손님을 위해 백그라운드 연주를 하는 것이 라이브 연주의 일이었던 것이다. 인디씬의 지속적인 요구로 99년에야 클럽에서의 공연은 합법적인 공간으로 인정받는다.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럭’의 풍경에 대해서 적어본다. 매일 저녁이면 ‘드럭’ 근처에는 펑크 키드들이 몰려와 길바닥에 주저앉곤 했다. 드럭 주변은 이들로 그득했고, 그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와 소음이 거리를 점령하였다. 펑크스타일의 머리를 연출하기 바쁜 아이들 때문에 왁스 냄새가 항상 화장실에 가득했다. 2층에 있던 그곳은 용변을 보기보다는 머리를 가꾸는 데 사용되는 곳이었다. 지하층으로 내려가 5000원의 입장료를 내면 공연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무대라고 해봐야 단壇도 없이 철제로 된 얇은 칸막이뿐이었고, 조명은 알전구 2개 정도였다. 공연 도중 누군가 생수병의 물을 뿌리는 바람에 뜨겁게 달궈진 알전구가 종종 깨지곤 했다. 연주자의 객기로 그렇게 된 경우, 사장은 공연을 중단시키고 뮤지션에게 꿀밤 한대 쥐어박고는 알전구를 갈아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당시 드럭에서는 그러한 사고마저도 하나의 퍼포먼스로 받아들이고 기뻐했다. 객석은 마룻바닥이었는데, 관객들이 하도 뛰는 통에 대부분 꺼져 있었다. 그 꺼진 틈에 수북히 담배꽁초가 쌓이는 데도 도무질 치우질 않았다. 공연이 시작되면 서로의 몸이 아플 정도로 슬램을 해댔다. 그 작은 공간에서도 과격하게 노는 구역과 비교적 얌전한 관객들을 위한 구역의 구분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서로 땀냄새를 맡으며 초면에 담배를 나눠폈으며, 이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크라잉 넛의 ‘말 달리자’는 초기 드럭의 이런 야생적인 분위기가 아니면 탄생되지 않았을 노래다. 어찌된 일인지 드럭이 입주했던 건물은 당시 입주자들이 모두 떠나 비어있었다. 드럭의 무정부적인 분위기는 이후 닥쳐올 파국적 경제상황을 예비하고 있었던 같다. 1996년 12월 12일 한국은 세계에서 스물아홉 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됐으나 1997년 12월 국가부도위기를 맞이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불과 1년만의 일이다. IMF 사태 이후 건물 1층은 드럭의 펑크키드들이 싼값에 입주해 펑크족 관련 용품을 파는 곳이 되었다. 어른들이 떠난 자리에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2. 프리섹스도 여관비가 있어야 하는 법

펑크키드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가고 있을 무렵, 이들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었다. 공중파 방송이나 패션 잡지들은 이들이 당대 젊은이의 열정과 분노를 대표하는 것처럼 소개했으며, 일각에서는 이상한 아이들의 등장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악화된 경제사정을 반영하듯 대중음악계에서는 슬픈 곡조의 발라드풍 노래가 대히트했지만, 이들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구는 것이 흥미롭게 보였을 것이다. 펑크키드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지식담론의 구도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클럽 ‘프리버드’에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밴드가 무심코 뱉은 멘트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프리섹스도 여관비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68년 서양의 록 담론이 피상적으로 90년대의 한국에 수입되면서 생기는 괴리를 잘 표현한 것이었다. ‘프리섹스’로 대변되는 무책임하고 낭만적인 자유이념와 당시 경제적 곤란에 처한 젊은이들의 궁핍 사이엔 위화감이 있었다. 70년 후반에서 80년대 출생이었을 그들은 스무 살이 되는 순간부터 곧바로 돈과 싸워야 했던 세대다. 한국에서 미성년자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상품으로 파는 행위-‘원조교제’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90년 초반부터 영화나 패션, 록, 성소수자문화를 위주로 한 대안적 문화운동이 담론적 차원에서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문화론의 요구를 개진한 잡지들이 『리뷰』(1994), 『상상』(1993), 『오늘예감』(1994), 『문화/과학』(1992) 등이다. 특징은 문화의 구체적인 변화보다도 담론이 더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은 일찍이 80년대의 함성을 90년대의 문화적 다양성과 취미의 고양으로 바꾸려 했다. 80년대 운동권의 후일담 정서를 가득 담은 시집,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도 이 시점에 등장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숫자, 50만부가 판매되었다. 이들이 주로 힘을 발휘하던 매체는 문학이나 영화쪽이었는데, 음악쪽의 인디씬이 있기 전, 영화쪽의 독립영화씬은 90년 초반부터 제작과 담론 양쪽에서 모두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92년 설립된 민간 시네마테끄 ‘문화학교서울’은 영화이론과 제작을 동시에 발아시키는 장소였다. 당시에 독립영화계를 지배하는 신화는 누벨바그적인 것으로, 영화이론을 탐구하는 것이 곧 영화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모두들 가지고 있었다. 매일 매일 늦은 밤이면 영화 한 편을 놓고 몇 시간이고 토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당히 지적인 취향이 아니면 견뎌내기 어려웠을 코스였다. 90년 초반 한국 독립영화계는 장 뤽 고다르와 트뤼포의 유령이 약간은 늦게 도착해 떠도는 곳이었다.

‘獨立’과 ‘Indie’, 한자냐 영어냐의 차이일 뿐 의미는 같다. 하지만 한국 영화의 ‘독립’과 음악의 ‘인디’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독립’이 80년 운동권의 새로운 개척지의 느낌을 갖는다면, ‘인디’는 80년대에 십대를 보낸 세대들의 아지트였다. 전자가 실천을 염두에 둔 이론에 중점을 두고 그 움직임을 이어갔다면, 후자는 라이프 스타일로 곧장 흡수했던 것이다. 때문에 펑크키드들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저항의 정치학이니 세기말의 데카당스니 하는 규정들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음악은 우선 누구나 할 수 있고, 즐겁게 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980년대 사회 변혁 운동의 대안으로서 채택된 록담론은 실제 인디의 분위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된 것인데, 인디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은 주장이나 기록이 없다보니 양자 간 거리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인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음악 평론가가 아니라 문화 평론가라는 신종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3)이라는 박준흠의 지적은 록담론을 주도하는 필자들이 ‘음악’을 모른다고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인디’와 유리된 채 전개되는 록담론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프리섹스도 여관비가 있어야 한다”는 비웃음으로 나타난다. 인디씬 초창기의 노래 가사들은 사회에 대한 말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대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대한민국 펑크키드
그렇지 우린 겉모습만으로 양아치가되어 거리를 거닐지
그렇게 한껏 찢어진 두 눈으로 그 모두가 우릴 밀어내려 하네
나에게 나와 함께하는 것이라곤 낡은 기타 하나가 나의 전부
너와나 우리 가진 것은 없지만 무릎 꿇지 않는 대한민국 펑크키드
후회는 없어~ 후회는 없어~ 내 지금에 삶에 후회는 없어4)

난 그냥 내 나름대로 살고 싶은데
넌 이런 날 잘못 됐다고 얘기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괜찮아 처음부터 나는 원래
난 원래 난 원래 나는 원래 그랬잖아
내가 언젠 내가 언젠 제 정신인 적 있었니
아무래도 아무렇게 돼도 난 상관이 없어
내가 언젠 내가 언젠 네 마음에 든 적 있었니
언제나 난 이유없이 잠 못 이루고
늘 가슴만 너무 빨리 뛰고 있었네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난 안 할래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걸
결국에 난 어리석고 게으른 아들
아무래도 난 괜찮아 처음부터 나는 원래5)

 

3. 조악함이라는 스타일

80년대의 영미권의 ‘인디’는 대학가나 클럽의 로컬성을 강조하여 그들만의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시스템을 만들어낸 데에서 기인한다. 우리의 경우도 대중음악계에 ‘인디’가 준 충격은 이들이 통상적인 음반제작시스템을 따르지 않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제작 유통했기 때문이다. 데모테잎->음반사 오디션->매니지먼트->방송->행사공연으로 이어지던 방식을 母클럽공연->클럽 레이블 컴필레이션 작업->타 클럽공연투어->라디오로 바꾸었다. 초창기에는 동세대였던 경인방송의 조경서 PD나 잡지 『핫뮤직』의 성우진 평론가 등이 이들의 음악이 유통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영세한 클럽을 기반으로 음반작업을 하다보니 초창기 인디씬의 음반은 조악한 사운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밴드들의 녹음 경험 부족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충분한 스튜디오 숙련 시간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중상급의 스튜디오는 시간당 20만원대 이상의 녹음비용을 요구했었다. 지금과 같이 홈레코딩이나 디지털 레코딩 환경은 2000년 이후에나 보편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때문에 아마추어에 가까운 뮤지션이 평소 자신의 느낌을 살려 정확히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Our Nation』 1집만 들어보더라도 크라잉 넛의 펑크사운드는 기타 디스토션에 눌려 드럼 소리가 뭉개져 있고, 보컬의 발음이 명확히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조악한 사운드는 그 자체로 특유의 멋이 있었다. 보컬의 한국어가사가 명확하지 않은 것 때문에 도리어 이국적인 느낌으로 들렸다. 지금도 ‘코코어’같은 밴드의 음악을 들어보면 당최 무슨 가사인지 알 수 없게 만들려는 듯 고의적으로 엉성하게 발음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대중음악이 멜로디와 가사를 위주로 즉 보컬 위주로 흘러간 것에 대한 불만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보컬의 지위가 전체 사운드에 1/n로 참여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밴드는 보컬에게 가창력이 아니라 어떤 분위기를 즉 읊조리거나 울부짖는 역할을 할 것을 요구했다. 조악함이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드럭 이후 생겨난 또 다른 펑크 레이블 ‘스컹크 헬’에서는 아예 마이크 몇 개만 댄 채 원테이크 라이브로 녹음을 하는 방식으로 『3000 Punk』라는 소속 밴드들의 편집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는데, 제목처럼 3000원에 판매했다. 조윤석의 밴드 ‘미선이’같은 경우는 1998년 발매했던 첫 앨범을 제법 돈을 들여 2002년 리마스터링해서 내놓게 되는데, 각 파트의 사운드가 확연히 명확하게 들리는 바람에 팬들이 집단적으로 거부감을 보였다. 잘 들리지 않아서 생기는 신비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조악함이라는 스타일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 조금은 엉뚱하지만 97년 일어난 ‘빨간 마후라’ 스캔들을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십대들이 포르노를 제작해 본의 아니게 유통한 일이다. 수사 초기 경찰은 이 포르노 제작에 조직 폭력배가 관여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엔 단 한명의 어른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의도치 않게 음란물을 유통시키게 된 것 말고는 이들이 받아야 할 죄는 사실은 없었다. 이들은 이후 청소년 보호법에 의해 수사받고 보호감찰의 대상이 되었다. 이 비디오에 출현한 여자 아이의 인격을 살해했다는 점에서는 유감이지만 이 영상물이 엄연히 오프닝을 가지고 있는 포르노라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그저 우발적으로 섹스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섹스를 대상으로 삼아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이 비디오에 오프닝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감히 이에 대해 논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빨간 마후라’ 사건을 십대의 다소 과격하고 조악한 자기표현에 법이 월권하여 관여한 것으로 본다면 어떨까? 이와 관련하여 90년대에 활동했던 문화연구자 고길섭은 국가보안법의 논리가 청소년보호법의 논리로 연장되고 있음을 지적한 적이 있다.6) ‘빨간 마후라’ 비디오는 청계천이나 세운상가 등지에서 수십번 복사된 탓에, 최종적으로 입수하게 된 판본에서 이들의 섹스 장면은 색감을 잃어버려 흑백화면처럼 보였다. 또한 대각선으로 늘어지다가 뒤집히는 아주 기이한 장면마저 연출했는데, 마치 백남준의 작품같았다. 그 흑백의 색감 속에서 여자아이가 목에 두른 스카프만이 유독 빨갛게 도드라졌다. 이것이 이 비디오가 오프닝의 타이틀 “비디오를 보다”에서 속칭 “빨간 마후라”로 불리게 된 이유다. 당시 충무로의 일부 촬영감독들은 이 질감을 일부러 연구하려 한 적도 있었다. 불법성 여부를 떠나 그 독특한 질감이 매우 신기하다는 것이다. 이 조악함이야말로 당시 청년들의 초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아주 쾌활한 분노

초기 ‘드럭’은 너바나의 광팬들이 모여 카피밴드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공간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어설프지만 독창성 있는 자작곡을 표현하는 밴드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는 펑크에 대한 선망의 결과가 아니라 펑크가 발아될만한 조건 위에서 자연스럽게 마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구의 경우에도, 60년대 ‘히피’가 풍요의 산물인 반면, 70년대 ‘펑크’는 빈곤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돈 없고 갈 곳 없는 청년들이 모이니 펍이나 클럽 같은 아지트에서 그저 쾌활하게 때려 부술 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선 펑크문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극단적인 취향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스펙터클 속에서 일련의 ‘상황들constructed situation’을 만들어 “부드럽게 운영되고 평온하게 만드는” 매스 미디어의 일상적 흐름을 붕괴시킨다. ‘드럭’의 펑크키드들도 애당초 펑크=저항이라는 주입된 도식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펑크로부터만 출발했을 뿐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드럭을 기반으로 했던 밴드 “No Brain”의 1집 앨범7)의 표제가 “怒”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약 5년간 이들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아무 생각 없는 아이들에 가까웠는데(No Brain), 이제 분노하는 아이들(怒 Brain)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여준 쾌활한 분노는 패션이나 포즈pose가 아니었기에 파괴적이었다. 아래는 당시 한국 펑크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러닝타임(8분16초)을 보여준 「아주 쾌활한」의 가사 전문이다. 

문민정부 좃까는 소리
문민정부란 그 소린
개한테나 줘 버려라
김영삼 신이 선택한 이제는
니가 니가 돈 벌어 먹기 바쁘구나
국민을 위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더니
이제는 니가 니가
돈 벌어 먹기 바쁘구나
니가 어떻게 하든지 난 잘 모르겠다만
너는 정말 잘 못하고 있어
씨발 청와대
씨발 노동부
씨발 안기부
씨발 청와대
씨발 노동부
씨발 안기부
씨발 청와대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쾌활하지 쾌활하지
미래를 꿈꾸는 건가
아주 아주 쾌활하지
미래를 꿈꾸는 건가
아주 아주 쾌활하지8)

전반 1분 30초간 제법 시원하게 욕을 머금은 보컬라인이 등장한 이후, 거의 7분여간이나 기타리스트 차승우의 스피디하고 블루지한 기타 솔로가 전개된 곡이다. 특히 6분 즈음에는 그와 같은 전개에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아리랑’의 멜로디가 간섭하여 흥겨움을 배가시킨다. 이 자유분방함은 3코드나 4코드 따위의 펑크록의 방법론조차도 우리들의 펑크엔 필요없다고 외치는 것 같다. 펑크 키드들은 이렇게 자생적으로 형성된 펑크를 ‘조선 펑크’라고 불렀다. 그 무엇도 따라하지 않는 독창성이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들은 초창기 남의 곡을 카피한다든가 말도 안 되는 영어가사로 노래하는 행위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현장의 중요성이 포착되어 재빨리 다큐로 제작되기도 했다.9)

한국 대중음악의 인디씬이 본격적으로 형성된지 17년이나 흘렀다. 필자는 한국대중음악의 변두리 역사로서 혹은 펑크/얼터너티브 음악의 유입사의 차원에서 논하고 싶지 않다. 이 17년이라는 세월은 음악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1996년 이후 생겨난 인디씬은 여러모로 세대론적 감각을 담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88올림픽의 여운을 가지고 간단한 아르바이트로도 배낭여행을 떠났던 세대도 아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정치운동을 꾸렸던 세대는 더더욱 아니다. 경제와 정치 양쪽 모두 몰락하는 시기, 숨어 있기 좋은 방을 찾아 모여든 일군의 무리들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만한 기회가 스스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한 줌도 안 되는 이들을 추억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여기 No Brain의 뮤직 비디오 ‘청년폭도맹진가’(2000)가 있다. 이 비디오야말로 당시 인디씬의 흥분을 생생히 담고 있다. 특별한 연출없이 당시 드럭이나 야외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을 그대로 찍어냈다. 이 곡은 기타리스트 차승우가 군대에서 배운 군가의 방법론을 펑크록으로 탈취해온 작품이다. 이들은 펑크라는 이름 하에 모였지만, 딱히 펑크족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도 않다. 대신 체육복, 교복, 목발, 붉은 악마, 펑크룩을 입은, 어느 학교에서나 볼 법한 바보, 얼간이, 왕따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를 점령하고 행진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로 거리가 가득 찬다.

아마도 1996년은 한국의 문화사 안에서 아마추어리즘의 가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이래로 정치의 영역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정 매체의 마니아로만 머물지도 않는 정체불명의 괴상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인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2000년대 네트워크의 힘을 빌려 더욱 폭발한다. 물론 그 결과가 매우 우려스러울 정도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러한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해진다. 이것이 1996년, ‘인디’를 추억하며 얻은 결론이다. 필자의 주장은 ‘인디’는 한 세대의 정신적인 원형으로 삼을 만한 사건이며 그래서 보다 의미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화하는 순간에서만 의미가 되고, 정치화하는 순간에서만 정치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최근 주말마다 열리고 있는 국정원 여론조작사건 규탄 촛불집회에서 5만여명의 시민들이 김광석의 “일어나”(1994)를 다 같이 부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 노래를 “모두 일어나라”는 저항적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김광석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해가 1996년이다. 누군가에게 1996년은 많은 것을 잃었던 해이고, 그만큼 많은 것이 다시 시작된 해일 것이다. 이를 한국문화사의 맥락에서 ‘96년 체제’라고 불러본다면 무리가 될까? 이렇게 잃고 얻음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아직 사상이 되지 못한 ‘인디’에 대해서 다시 또 고민해본다.

 


1) 모리 요시타카, 『스트리트의 사상』, 그린비, 2013
2) 당시 한총련(한국대학회 총학생회 연합)은 광복절을 맞아 평양을 방문한 2명의 대학생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는 것을 맞아 대규모 행진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국의 불허와 함께 경찰은 행렬을 저지하며 둘러쌌고, 2만여 명의(규모에 대해서는 확정할 수 없다.) 대학생들이 연세대 교내에 고립되는 상황에 처했다. 대치상태 초반에는, 수도와 전기가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교내로 진입한 경찰병력을 학생들이 효과적으로 막아내었다. 하지만 전국에서 증원된 경찰병력과 군사작전에 가까운 진압으로 인해 결국 9일만에 사태는 마무리된다.
3) 박준흠, 『대한인디만세 - 한국인디음악 10년사』, 세미콜론, 2006. p. 13.
4) 18Cruk, "대한민국 펑크키드"(1999)
5) 코코어, "아무래도"(1998)
6) 고길섶, 「문화시대와 국가권력의 이동 - '국가보안법'에서 '청소년보호법'으로」, 『진보평론』 제 2호, 1999.
7) 1996년 결성, 한 장의 스플릿 앨범과 싱글을 내고, 5년만에 1집 앨법을 발매한다.


오영진 1980년생. 2010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박사과정 수료. 현재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 국제문화대학 한국언어문학과 강의교수.

 

 

* 《쿨투라》 2014년 봄호(통권 3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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