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쿨투라 신인상 소설 부문 당선작] 사랑의 언어와 죽음의 존재론적 의미: 〈그대를 사랑합니다〉
[제12회 쿨투라 신인상 소설 부문 당선작] 사랑의 언어와 죽음의 존재론적 의미: 〈그대를 사랑합니다〉
  • 진은경
  • 승인 2019.03.2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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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롤로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사회는 고령화사회로 진입했다. 이와 함께 다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노인 주제 콘텐츠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영화 분야에서도 노년영화가 속속 등장한다. 대표 사례로는 〈집으로〉 (이정향, 2002), 〈죽어도 좋아〉(박진표, 2002), 〈마파도〉(추창민, 2005), 〈워낭소리〉(이충렬, 2009), 〈그대를 사랑합니다〉(추창민, 2011),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2014), 〈장수상회〉(강제규, 2015), 〈춘희막이〉(박혁지, 2015),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2016), 〈덕구〉(방수인, 2018), 〈비밥바룰라〉(이성재, 2018)와 같은 영화가 있다. 이 작품들은 부부간의 사랑과 애정, 노인의 성 문제, 노인의 고독과 가족관계, 노인성 질병인 치매 문제, 고독사, 죽음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이 다양한 주제는 노년의 사랑이야기가 관통한다.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친다. 그 중에서 누군가는 짧게 스쳐 지나가고, 누군가는 머물기도 한다. 인생에서 그저 스쳐가는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내 마음의 한 귀퉁이를 차지해 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찾아온 사랑은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다. 여기 모든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다시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남자와 사랑을 영원히 지키고자 하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오직 사랑으로 삶이 변화한 이들의 이야기,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이다. 이 영화는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추창민 감독의 작품이다.

  추창민 감독은 〈죽이는 이야기〉(1997), 〈태양은 없다〉(1998), 〈행복한 장의사〉(1999)에서 조연출을 하였으며 〈사월의 끝〉(2000), 〈마파도〉(2005), 〈사랑을 놓치다〉(2006),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7년의 밤〉(2018)의 작품으로 그의 이름을 서서히 알리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는 코미디부터 사극, 드라마, 로맨스, 스릴러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특히 로맨스 영화 두 편을 연출했다. 〈사랑을 놓치다〉와 〈그대를 사랑합니다〉이다. 〈사랑을 놓치다〉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젊은이들의 사랑이미지를 그려냈다면,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는 노년의 사랑을 동화적 상상력으로 카메라에 촘촘하게 담아낸다. 최근까지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영화, 드라마, 연극으로도 재탄생되어 관객들에게 여운을 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년 네 명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입만 열면 까칠, 눈만 마주치면 버럭 대는 우유배달부인 노인 김만석(이순재)이 주인공이다. 그는 폐휴지를 모으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송씨(윤소정)를 만나면서 설레는 사랑을 시작한다. 또 다른 커플은 아이다운 순진함과 사랑스러움으로 무장한 치매노인 순이(김수미)와 주차관리인을 하면서 그녀 곁에서 평생을 함께해 온 남편 군봉(송재호)이다. 그들은 서로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끼며 사랑한다.이 영화는 극중 김만석(이순재)-송씨(윤소정), 장군봉(송재호)-아내 순이(김수미)의 커플을 중심으로 두 가지 시선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만석과 송씨의 커플은 다섯 가지 사랑 언어로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2. 5가지 사랑의 언어, 그대를 사랑합니다.

  게리 채프먼Gary Chapman은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사랑의 표현 방식을 5가지로 정의했다. 그는 사랑은 ‘인정하는 말, 선물, 봉사, 함께하는 시간, 스킨십’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도 5가지 사랑의 언어가 나타난다.

  먼저 사랑을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상대를 인정하는 말들로 채워져 호감이 생긴다. 그리고 서로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인정하는 말은 다섯 가지 기본적인 사랑의 언어 중 하나이다. 인정하는 말 속에는 구체적으로 격려, 칭찬, 친절, 용서 등의 방언이 있다. 이러한 방언들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표현으로 작용한다. 이 영화에는 까칠함의 대명사인 김만석의 언어가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5가지 사랑의 언어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캐릭터다.

  아내의 죽음 뒤에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하는 만석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이 찾아 온다. 눈 내리는 새벽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난 만석과 송씨, 그는 우유를 배달하고 그녀는 폐휴지를 모아 생활한다. 첫 만남에서 그들은 어느 누구처럼 낯설고 서로에게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다. 그들의 첫만남에 대한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봐, 나 땜 에 짜빠진 것 아니지? 나 아니지? 어디 다친데 없어?”(만석), “네”(송씨)의 대화로 그들의 만남은 만석의 까칠한 반말로 전개된다. 이들의 두 번째 재회에서는 “이런 날은 쉬지 머 하러 나왔어. 저 까짓것 주서서 몇 푼이라고 된다고. 밥 먹여 줄 식구나 자식 없어?”(만석), “네, 그럴 처지가 못 된다고요.” (송씨)라고 말한다. 만석은 빙판길에 서 있는 송씨의 리어카를 보고 같이 끌어주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서히 호감의 언어로 바뀐다. “괜찮으세요”(송씨), “안 괜찮어. 허리 불러질 뻔 했네. 수고해.”(만석), “운전 조심하세요.”(송씨), “임자나 조심해서 다녀.”(만석)라는 서로에 대한 친절과 격려하는 말들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서로를 인정하는 말은 관계를 향상시킨다. 그 관계의 향상으로 인해 그들은 차츰 서로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사랑의 언어는 선물이다. 선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송씨와 첫 만남에서 만석은 팔다 남은 우유 하나를 준다. 우유를 준 이유는 만석이 우유를 배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만석은 우유배달부일까. 새벽에 배달을 하는 직업이라면 신문도 있다. 그럼에도 왜 그는 꼭 우유배달부여야만 했을까. 이 영화에서 ‘우유’는 만석에게 특별한 상징이다. 만석의 아내는 죽기 전 그에게 우유를 사달라고 했다. 매번 화를 내고 거절하던 만석은 아픈 아내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러나 끝내 아픈 부인은 우유를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아내가 떠난 후 그는 우유배달부가 되었다. 그에게 ‘우유’는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만석에게 ‘우유’란 곧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이미 떠났지만 그는 항상 아내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반면, 그에게 우유는 ‘미련’이기도 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였다. 그가 이러한 우유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시작했다는 것은 큰 사건이다. 이는 오랫동안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아내를 마침내 떠나보내려 하는 그의 마음을 뜻한다.

  이후에도 만석은 송씨에게 계속해서 남은 우유를 모아서 가져다주기 시작한다. 처음 송씨에게 우유를 줄 때 만석의 마음은 단순한 연민 또는 동질감이었다. 나이가 많음에도 새벽부터 나와 추운 날씨를 견디며 폐휴지를 줍는 송씨의 처지가 어쩐지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른 감정이었다. 왠지 모르게 송씨에게 우유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여러 개의 우유를 봉투에 넣어 가져다주었다. 그런 만석의 행동에 송씨는 무척이나 고마워한다. 그녀가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만석은 또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결국 매일매일 남은 우유를 갖다 주기 시작한다. 어느새 만석은 우유를 받고 미소 짓는 송씨의 모습을 보는 것이 하루의 낙이 되었다. 이렇게 만석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이 시작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자꾸 주고 싶어 한다. 그 다음 선물로는 만석은 송씨의 생일 선물로 머리핀을 사준다. 송씨도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만석에게 가죽 장갑을 준다. 만석이 선물한 머리핀은 ‘여성성’을 지닌다. 송씨는 나이를 먹고 늙어가면서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만 석은 송씨에게 그가 여성, 그것도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꽃무늬 머리핀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여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은 꽃이었다. 이렇게 꽃을 머리에 다는 것으로 송씨 스스로 여성스러움을 깨닫길 바랐던 것이다. 만석의 선물이 ‘잃어버린 여성스러움’이라면 송씨의 선물은 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뜻한다. 송씨는 오랫동안 만석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가 추운 날씨에도 장갑을 끼고 다니지 않고, 손이 아프도록 오토바이 손잡이를 잡고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송씨는 그를 위해 손을 따뜻하게 할 수 있고 아프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장갑 을 선물한다. 이처럼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사랑은 더욱 진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도 하고 봉사도 한다.

  세 번째 사랑의 언어는 봉사이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아우르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가장 분명한 그림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이다. 만석은 송씨에게 팔고 남은 우유를 준다. 송씨는 만석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준 우유의 가치를 알기에 매번 소화시키지 못하고 탈이 나는데도 꿋꿋이 받았다. 우유는 만석의 마음일뿐 아니라 실제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송씨에게 필요한 건 사랑도 있지만 조금 더 현실적인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경제적인 ‘돈’이다. 따라서 만석이 선물한 우유는 사랑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소득도 안겨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유로 물질적 소득을 얻는 것이 뭐가 있을까. 바로 폐휴지 줍기이다. 우유를 다 먹고 나면 폐휴지가 생기고 그것을 모아서 팔면 돈이 된다. 따라서 만석이가 주는 우유가 그녀에게 결핍된 것들을 채워주는 도구이며 봉사인 셈이다.

  문득 이 영화에서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김춘수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의 시 구절처럼 송씨는 이름이 없이 성만 있었다. 그녀는 만석에게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는 거라며 징용 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결국 이름도 없이 살았어요. 사람들이 송씨니까 ‘송씨야, 송씨야’ 불렀어요.”라며 털어놓는다. 만석은 그런 송씨에게 ‘이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주민등록증까지 만들어준다. 신분, 즉 이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딘가에 소속됨을 뜻한다. 지금까지 이뿐의 삶은 불안정했다. 이름이 없는 이뿐에게 기댈 곳이라곤 없었고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이뿐’이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그녀의 삶에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안정감이 생겼다.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주민등록증이 생기고, 그로 인해 금전적 혜택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지어준 것이 ‘만석’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살피게 됐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반려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이따금씩 애착이 가는 물건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소속감이 생긴다. 그러면서 자신을 보듬어 줄 존재가 생긴다. 이것이 만석이가 이뿐을 향한 사랑의 봉사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봉사하고 의지하게 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자꾸 보고 싶어진다.

  네 번째 언어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함께하는 시간의 핵심은 ‘함께’다. 그것은 곁에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같은 방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함께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함께한다는 것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오직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뿐은 만석이 써준 연애편지를 읽지 못해 약속 시간에 늦은 후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녀는 오랜 세월동안 글을 모르는 까막눈으로 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것을 고칠 의지가 별로 없었다. 그녀에게 이렇게 늦은 나이에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석을 만나면서 마음이 달라진다. 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았고 지금이 새로운 것을 배우기에 전혀 늦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석과의 소통, 즉 ‘사랑’을 위해서는 글을 배워야만 했다. 글을 알아야 만석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그에게 받은 애정에 보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처음 배운 글자는 ‘김만석’ 이름 석 자였다. 만석은 그녀가 글을 배우고 삶을 변화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해준 가장 큰 디딤돌이었다. 그동안 외면해왔던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데이트를 시작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경청해 주면서 함께하는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다섯 번째 언어는 스킨십이다. 안아 주고 어루만져 준 아기들은 오랫동안 신체 접촉 없이 방치된 아기들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건강하다. 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사랑이야기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스킨십 장면이 없다. 특이하게도 감독은 만석과 이뿐의 스킨십 장면을 직접 연출하지 않는 대신, 그들의 필수 이동수단인 오토바이와 리어카를 사용한다. 오토바이와 리어카는 만석과 이뿐의 대체물인 것이다. 그녀가 힘들게 끌고 가는 리어카를 만석이가 함께 끌어준다거나, 오토바이가 다니는 길에 전등을 켜거나 만지는 장면으로 구체화한다. 또한 그들의 스킨십은 ‘오토바이 소리’와 ‘가로수의 빛’으로 상징화한다. 만석의 오토바이 소리는 그녀의 아침을 깨워주는 그의 사랑의 메시지다. 그렇다면 가로수의 빛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로수의 빛 역시 오토바이 소리와 마찬가지로 이뿐의 만석에 대한 사랑이다. 폐휴지를 주우러 다니는 그녀는 매일 새벽마다 우유배달을 다니는 만석을 위해 항상 집 앞 가로등을 켜놓는다. 빛은 만석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다.

  그녀는 고향으로 떠나면서까지 새로 이사 온 꼬마 아이에게 새벽에 가로수의 불을 켜 줄 것을 부탁하고 떠난다. 그 아이는 이뿐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만석에게 “여기 살던 할머니가 부탁하셨어요. 배달 오토바이는 어둠에 위험하다고.”라고 전한다. 만석은 그녀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결국 그들은 이별하지만 만석과 이뿐의 사랑은 다섯 가지 언어로 물들어 간다. 그들의 사랑 언어는 ‘인정하는 말, 선물, 봉사, 함께하는 시간, 스킨십’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3. 긍정적 시간의 시작으로서 죽음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 시몬느 보부아르는 『노년』이란 저서에서 ‘노년의 시간’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부아르는 노인이란 지위가 주체적으로 취득한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봤다. 고대의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부담스러운 존재로 변했다. 자본주의 문화는 젊음을 찬양할 뿐 나이 들어감을 기리지 않는다. 노인은 결국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이 소외의 감정은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격발시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년 삶의 질은 계층에 따라 격차가 두드러진다. 특히 하층계층 노인은 직업을 잃으면 쓸모없는 잉여의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고 보부아르는 분석했다. 그러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는 보부아르가 주장하는 노인과는 다른 노년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보부아르가 말하는 ‘주어진 노년’이 아니라 쟁취하는 주체로서 노년을 보여준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을 시작하는 노년과 사랑을 끝맺으려는 노년을 통해 주체적 행동하는 노년의 시간을 보여준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장군봉이다.

  평생을 택시기사로 열심히 일한 주차관리인 군봉은 아내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유순하고 가정적인 남편이다. 그는 치매에 걸린 아내 순이를 돌보며 아내와의 사랑을 끝까지 간직하고 지키려고 한다. 아내 역시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 하지만 매일 남편을 볼 때마다 “오늘은 뭐했어? 이야기 해줘”라고 말하며 남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치매로 모든 기억들을 송두리째 뺏겨버린 순이는 그림을 그리며 환상과 상상 속에서 사랑을 이어간다. 어느 날 아내가 말기 암이라는 소식을 알게 된 군봉은 자식들을 부른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 부양을 걱정하며 서로에게 미룬다. 군봉은 나이가 들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어버리는 처지를 자신이 평생 몰던 고물 택시와 닮았음을 깨닫게 된다.

  “(한때는) 가족이었는데 (지금은) 다시 부부가 되었다”라는 군봉의 대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을 드러낸다. 방이 좁더라도 여러 식구가 함께 모여 북적거리며 웃음꽃을 피우던 시절, 그들은 풍족하진 않지만 행복한 가족이었다. 자식들이 가정을 이뤄 떠난 후, 부부는 세상에 ‘단 둘 뿐’이 된다. 군봉에게 아내는 한 때는 연인이었고, 한 때는 갓 결혼한 새색시였으며, 한 때는 세 남매의 엄마였다. 그리고 이제는 화장실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되어 버렸지만, 그 옛날 백년해로를 약속한 이후 50년이 넘는 세월의 모든 순간 ‘부부’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강요하는 메시지는 없다. 나이가 들면 한 순간에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늙었다는 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몫은 자연스럽게 자식들에게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린 자식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부담감과 거부감이다. 이는 참 가슴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자식들도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이 생기기 전에는 효자, 효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끌어야 할 ‘가정’이 생기면 늙은 부모는 저 뒤편으로 밀려나게 된다. 자식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마냥 부모를 섬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욕할 수도 없다. 그들에게는 지금 눈앞에 있는 자녀들이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자 사정이 있을 자식들을 탓할 수 없다. 인생을 찾아 떠난 자식들은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또 다른 가정을 꾸리고 기존의 가족은 분리되고 해체된다. 그리고 그 자식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정성으로 키운 그들의 자식들은 예전의 그들이 그랬듯 새로운 가정으로 떠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군봉은 자신의 처지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군봉은 방에 일부러 가스 불을 피워 놓고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군봉의 죽음을 보며 ‘호상’이라 말한다. 만석은 그것을 듣고 “세상에 호상이 어디 있냐”라고 물으며 화를 낸다. 군봉의 죽음 이후에 송씨와 만석의 두려움은 커져갔다. 그들은 결국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별을 택하려 한다. 그러나 이내 깨닫는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라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택한다. 이 영화에서 군봉의 죽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들의 말처럼 자식들을 고생시키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사랑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삶의 끝에서 그들의 인생에 남은 것은 돈도, 자식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후회 없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랑했다. 누군가는 평생을 함께 있던 ‘당신’과, 또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알게 해준 ‘그대’와 사랑을 하고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전 그들의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죽음이 가지는 존재론적 의미는 이러한 긍정적 시간의 시작에 있다. 존재론적 죽음은 그것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연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의 과정이며, 봄이 다시 오면 새로운 탄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러한 믿음은 만석의 죽음에서 재확인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만석이 죽으면서 이뿐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는 죽어서도 잊지못할 애틋한 사랑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원작에서는 느끼지 못한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만석과 이뿐이 재회하는 상상장면은 그의 죽음이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것이 원래 속했던 곳으로 회귀함을 말하고, 이러한 죽음 속에서 긍정적 시간이 시작됨을 믿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죽음은 떠남이며 사망이고 부정성이다. 이 부정성이 도착하는 곳은 알려 져있지 않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떤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 즉, 주어진 것들에서 출발하는 문제로 설정된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라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죽음은 무규정성의 물음으로 다시 현재적 사건이 될 수 있다. 현재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순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시작으로 긍정하는 그 무엇, 곧 자아와 관계한다. 자아는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한다. 현재라는 시간을 통해 자아는 익명적인 역사의 운명을 벗어나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자기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이렇듯 만석과 이뿐, 군봉과 순이는 현재, 자신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관념들의 주체로 나타나는 만석과 이뿐, 군봉과 순이 또한 그들이 맺는 관계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성을 가진다. 특히 죽음은 이러한 무규정적인 관념들에 한계를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하나의 존재에 대한 규정일 뿐이다. 둘이 여럿의 시작이듯 하나의 끝에서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시작은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만석과 이뿐, 군봉과 순이는 긍정적 시간의 시작으로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의 죽음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고 살 것인가’의 물음으로 바뀐다. 

  4. 에필로그

  ‘어떻게 사랑하고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만석은 드디어 용기를 낸다. 그는 이뿐의 생일날 케이크를 사고 축하노래를 불러준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고백한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이다. 이 고백을 들은 그녀는 평생 들어보고 싶었던 말이기에 눈물만 흘린다. 특히 만석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영화 속 백미로 작용한다. 만석은 ‘당신’은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나간 아내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기에 ‘그대’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그대’란 상대방을 친근하게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로 이 영화에서는 사랑하는 대상을 이르는 말이다.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에서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빠진 주체가 하는 말, 즉 그의 담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바르트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른 여러 주제들은 “사랑해”의 스펙트럼이며, 그래서 모든 사랑의 담화는 결국은 “사랑해”로 수렴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하는 핵심, 사랑의 담화이다.

  바르트는 주체가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은, 〈고백〉이나 〈선언〉의 경우, 대상으로부터 어떤 응답-거부를 포함하여 대답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어쩌면 사랑을 고백한 만석은 이뿐이의 대답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라고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군봉과 순이도 서로에게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이들의 사랑 응답은 오로지 관객의 상상으로 작용한다.

  만석: 내게 웃음을 찾아 준 당신,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뿐: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당신. 그대를 사 랑합니다.
  군봉: 모든 것을 잊어도 나를 기억하는 당신, 그대 를 사랑합니다.
  순이: 평생 아낌없이 주기만 한 당신. 그대를 사랑 합니다.

  이처럼 그들이 듣기를 원하는 대답은 자신이 한 말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말, “그대를 사랑합니다.”일 것이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언어, 죽음과 같은 관념들은 그 자체가 가지는 모호함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성을 가진다. 만석과 군봉의 사랑과 죽음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뿐과 순이와 ‘함께’하는 긍정의 시간으로 바뀐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사랑이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사랑하고 살 것인가?’에 대한 사랑의 물음으로 시작해서 마침표로 ‘그대를 사랑합니다.’로 끝난다. 그리하여 이 마침표는 그대(관객)에게 새로운 시작점이 된다.

 


진은경
1974년 마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비교문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주요 논문으로는 「영화 〈옥자〉에 나타난 생태학과 에코페미니즘」(2018), 「식당을 매개로 한 한일 영상텍스트 연구」(2017), 「『엄마를 부탁해』와 〈피에타〉에 나타난 모성의 양가성 연구」(2014),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 나타난 에코페미니즘」(2006),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과 영화 〈헨리와 준〉의 비교연구」(2005)가 있다. 건국대학교, 고려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명지전문대학, 삼육대학교에 출강. 주요 관심사는 에코페미니즘, 사랑, 일상성이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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