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쿨투라 신인상 소설 부문 당선작] Oui
[제17회 쿨투라 신인상 소설 부문 당선작] Oui
  • 이준상(소설가)
  • 승인 2023.03.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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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르르릉. 가끔 C4탄에서는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기폭 장치와 폭약을 잇는 전선이 반쯤 벗겨진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파자드는 대학교 시절 기계과 수업을 한두 번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통신병이 됐다. 명칭은 통신병이었지만, 실제 전장에서 그들은 각종 전기, 전자 장비와 총기, 폭탄 기기들까지 모두 도맡아 수리하곤 했다. 하필 그날의 유일한 통신병이었던 파자드는 징집되지 얼마 되지 않은 병사들 틈에서 이동 중이었다.

“파자드, 이거 뭐야? 소리 왜 나는 거지? 쇼트 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어리숙한 병사 하나가 파자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50kg이 넘는 통신 장비를 등에 업고 뒤뚱거리며 고장 난 C4탄 앞으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도 방금 자신이 있던 곳에서는 무전 통신 장비를 고쳐달라고 난리였다.

C4탄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파자드에게 불길한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잠시만, 우리 불량 몇 개인지 확인했었나?”

자세히 보니 고장 난 C4탄은 하나가 아니었다. 아침에 뇌관이 불량인 폭약만 따로 구분해서 모아놨는데, 후임 중 누군가 착각하여 그걸 매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지난 2시간 동안의 일은 헛수고가 되는 것이었다. 파자드는 한숨을 쉬었다. 적군들이 몰려온다는 공포감보다도 똑같은 일을 또 해야 한다는 귀찮음이 그를 무시무시하게 덮쳤다.

“재수 없게 정말….”

파자드는 담배 한 개비를 주머니에서 꺼내 매몰된 폭탄 건너편으로 터덜거리며 걸어갔다. 담배를 입에 물기도 전에 그 소대의 유일한 양품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통신이 들려왔다. 그때까지도 파자드는 모르고 있었다. 정말 재수가 없는 부분은 매몰된 불량 폭탄이 아니라, 그 무전기가 불량이 아니라는 것임을.

“공습 경보, 공습 경보. 교량 위 3소대 즉시 퇴각. 즉시 퇴각 바람.”

의외로 무전기 속 목소리에서는 침착함이 느껴졌다. 분명 문장을 이루는 글자들에는 다급함이 기저에 깔려 있었는데, 목소리 톤에는 차분함이 가득했다, 차분함보다는 나태함이었을지도. 마치 우체국에서 다음 손님 번호를 부르는 정도의 권태로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무슨 일이냐고 되물어보기도 전에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고, 파자드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교량을 폭파하려던 시도를 대신하듯, 하늘 어디론가부터 수십 개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허둥지둥대던 풋내기 병사들은 각자의 죽음을 맞이했다. 파자드가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 그는 불타는 교량 위 같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깜깜한 밤에,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파자드는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숨이 붙어 있는 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불량인 줄 알았던 C4탄 중 하나가 운 나쁘게 터지는 바람에 파편이 그의 옆구리와 가슴을 관통했지만, 적군의 포탄만큼은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자드는 얼마 안돼 자신이 적군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량 반대편서부터 확인 사살을 하러 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나태했다. 방아쇠를 당기던 그들의 표정은 귀찮음이 가득하여 노곤해 보이기까지 했다. 총알을 이마의 정가운데에 박는 행위인데도 그저 매일 아침 얼굴에 로션을 바르는 동작처럼 지루해 보였다.

파자드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 그는 이미 움직일 수 없었고, 오직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운 나쁘게도 그 총알은 파자드의 머리 대신 윗가슴을 관통했다. 총잡이의 귀찮음이 그의 조준선을 흐트러뜨렸고, 나태한 총알은 결국 파자드의 숨을 끊어놓지 못했다. 총잡이는 파자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시체만이 가득한 곳에서 몇 시간 정도가 더 흘렀을까, 동이 틀 무렵이 돼서도 파자드는 여전히 죽지 못했다. 그는 구해줄 사람이 없는 것보다, 죽여줄 사람이 없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2

자명종이 여러 번 울렸는데도 알버트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늦은 시간에 잠들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의 청력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 말도 알버트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다. 그는 팔십이 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일관되게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했다. 그나마 어릴 적에는 어머니, 결혼 이후에는 아내의 잔소리 덕분에 제시간에 집을 나설 수 있었지만,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는 어디든 지각하기 일쑤였다. 물론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지각할 일도, 깨워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날 이유도 전부 사라졌다. 그래도 그의 자명종은 늘 오전 8시 30분이 되면 울렸다.

오늘도 알버트는 열 시가 다 돼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부엌으로 가서 수돗물 한 잔으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는 여전히 영국 수돗물의 텁텁한 석회 맛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통장 잔고 또한 마른 식도처럼 메말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그의 아침 일상은 언제나 같았다. ‘아무것도 안 하기’. 그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지루하게 깨어 있었다. 항상 똑같은 의자에 앉아서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침실과 페인트가 반쯤 벗겨진 창문 밖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게 다였다. 다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스스로 뻔한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는 생각은 예컨대 이러했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지?’와 같은 생계 걱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람?’과 같은 빈정거림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질문은 머릿속을 맴돌고, 대답은 혀끝을 맴돌았다. 사나운 세상이 주는 모멸을 이겨낼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황망한 소망들을 숨죽이며 내비치고, 죽음을 갈망하는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언제나 그랬다.

오늘은 아주 조금 달랐다. 의자가 미세하게 덜컹거리기에 봤더니, 지역 신문 한 면이 의자 다리 한쪽 밑에 끼어 있었다. 몇 주는 더 지난 신문이었지만 알버트에게는 새로웠다. 구겨지고 뜯긴 신문 쪼가리 틈에서 선명한 사진 하나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폴리스 라인으로 막혀 있는 지하철역 승강장의 모습이었다. 처음엔 끔찍한 살인사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투신자살에 관한 기사였다. 그 위 헤드라인은 이번 사건으로 올해 들어 리버풀 스트릿 역에서만 아홉 번의 자살 소동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알버트는 알 수 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아니, 그건 소외감이었다. 그 아홉 명 가운데 본인이 없다는 것에 대한 박탈감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소속감이 절실했다.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를 원했던 그에게 있어 지하철 승강장에 몸을 던진 이들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다.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읽은 그는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와 똑같이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 로션을 발랐다. 그리고 하나의 의례처럼 값싼 향수를 자신의 정수리에 뿌렸다. 평소 외출할 때와 다름없이.

 

3

짙은 오줌 지린내가 코를 찌르는 계단이었다. 그 냄새는 지하 1층으로 향하는 첫 번째 에스컬레이터에서 유독 심하게 났다. 모두가 인상을 한 번씩 찌푸리거나, 냄새를 피해 빠르게 에스컬레이터를 걸어내려 가곤 했지만, 알버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각이 둔해진 그의 코 때문인지, 퇴행성관절염이 심해진 고관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버트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구부정하게 서서 한 손으로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꽉 눌러 잡은 그의 모습은 몹시 위태로웠다. 여든 살의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행색을 보면 그는 아흔 살을 족히 넘긴 사람 같았다.

센트럴 라인은 런던의 지하철 노선 중에서 가장 오래된 노선이었다. 특히 리버풀 스트릿 역은 주변에 빈민가와 폐공장이 많았고, 다양한 길거리 예술가들이 출퇴근하는 통로이자 오랜 노숙자들이 머무르는 쉼터였다. 그래서인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수십 가지의 냄새가 동시다발적으로 났다. 개성 강한 그래피티 아티스트 사이에서 클래식한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알버트는 그 냄새를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아침에 직접 정수리에 뿌린 향수 냄새도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알버트는 서쪽 방향으로 가는 승강장에 들어섰다. 승강장 바로 옆쪽에 있던 20대 남녀 한 무리로부터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른 저녁부터 거하게 취한 그들은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거북한 시선을 보내면 바로 성내며 달려들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한 무리의 짐승들처럼. 최전선에 있는 이들은 뭔가 더 위협적이었다. 한 명은 머리카락이 전혀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허리까지 오는 장발이었는데, 그 둘 모두 190cm는 훨씬 넘어 보였다. 무리를 지키기 위해 외부인을 경계하는 일종의 문지기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협도 알버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흐릿해진 알버트의 시력 때문인지, 문지기 녀석들도 너무 약한 이들에게는 쉽게 흥미를 잃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이듦에 대한 일말의 질서나 존중일 수도. 어찌 됐든 알버트는 그 무리 가운데를 손쉽게 가르며 지나갈 수 있었다.

그는 승강장 가장 끝을 향해 가서 빈 의자에 앉았다. 센트럴 라인 특유의 퀴퀴하고 답답한 지하 공기 냄새가 났고, 작은 쥐 한 마리가 낡은 철로 사이사이를 거침없이 쏘다녔다. 그러나 역시나 알버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작은 쥐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알버트가 한숨을 길게 내쉬자 쥐는 그제서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의 농축된 한숨은 쥐를 내쫓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기간, 꾹꾹 눌러온 무거운 시간을 날숨 하나에 담아낸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기가 옹알이하듯 알아 듣기 힘든 단어가 가득했다.

“이렇게 떨어지면 내가 딱 열 번째일 텐데. 그럼 내일 기사에 내 이름이 나오려나. 죽고 나면 소피는 나를 찾아올까. 그럴 거면 안 죽는 게 낫지 않나. 아냐, 그래도 뛰어 내려야지. 조금 더 편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방법은 무슨 방법, 죽는 게 다 똑같지. 여기서 뛰어내리면 기차가 연착될 텐데.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피해 줄 필요는 없잖아. 근데 이 상황에 뭔 오지랖이야. 죽을 때까지 오지랖이야 아주. 그러니까 다들 떠났지. 그건 나한테 지금 중요하지 않아. 뛰어내릴지 말지나 정하자고.”

혼잣말이지만 둘이 하는 대화였다. 어느새 알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벤치에서 일어나 승강장 끝 철로로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한 발 더 앞으로 내딛을지 말지 고민하는 알버트 등 뒤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실컷 혼잣말을 하다 보니 알버트의 정신은 살짝 혼미해졌고, 그는 그 목소리를 수년 전 죽은 아내의 목소리로 착각했다. 휘청거리던 그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승강장고개만 살짝 뒤로 돌렸다. 누군가 무릎을 살짝 굽힌 채로 알버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보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가방에 먼저 눈길이 갔다. 가방 재봉선을 따라 깔끔하게 수놓인 자수가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청파랑 히잡에도 비슷한 무늬가 있었다.

알버트는 소녀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그의 손가방을 쏘아봤다.

“아, 괜찮으신가 해서요.”

소녀가 움츠러들며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알버트는 그제서야 그녀가 불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 그의 혼잣말도 역시 불어였다는 뜻이었다.

“불어를 할 줄 아나?”

“아, 네.”

“허, 이것 참. 여기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알버트는 리버풀 스트릿 같은 허름한 역에서 누군가와 불어로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낯선 사람과는 딱히 영어로도 말을 하지 않았다.

“영어를 할 줄 모르세요?”

“그게 뭐가 중요한가?”

알버트는 쏘아붙이듯 되묻고 나서,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끝 앞을 내려다봤다. 그의 구두 뒷굽은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있었지만, 앞코는 철로 위 공기 중에 떠 있었다. 그는 승강장에서 철로까지의 높이가 얼마나 될까 가늠해봤다. 마치 짙은 푸른색의 물웅덩이를 보고 나서도, 수심을 가늠하지 못하여 무작정 뛰어내리려는 조급한 다이버 같았다.

“지금 좀 위험해 보이세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것도 중요하진 않지.” 알버트가 혼잣말하듯 대답했다.

“아니, 그러다 떨어지실 것 같다고요.” 소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졌다.

“바로 그거지, 이 날만을 위해 이렇게 살았다고. 아니면 이렇게 될 줄만은 모르고 그랬을지도.”

알버트는 깊은 상념에 빠진 채 소녀의 질문에 답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소녀가 목소리를 다시 낮추고, 알버트를 타이르며 물었다. 그의 위치는 여전히 아슬아슬했고, 빠져버린 상념의 수심은 짙은 푸른색보다도 깊었다.

“그것 참 반갑구만. 반가운 질문이야.” 알버트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버트. 망할 영국 놈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내 이름은 알베흐야. 알베흐 안토니오 르콩트. 망할 영국 놈들.”

알베흐의 마지막 글자를 발음할 때 프랑스어 특유의 목 긁는 소리는 30년 전에 비해 많이 희미해졌지만, 영국을 향한 그의 증오심은 건재했다.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아시아요. 아시아 파자드.”

“불어를 참 잘하는구만, 아시아.”

정말이지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얼핏 들어도 알버트나 르콩트, 안토니오 따위보다 아시아라는 단어는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작은 메아리들이 응축된 듯 명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들으니 아시아의 고운 이름이 더욱더 아름답게 들렸다. 알버트에게는 아시아라는 단어도 특별했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을 딸 소피의 얼굴이 드리워졌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알버트는 딸을 떠올리며 다시 회상에 빠졌고, 그때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왜 죽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아시아가 정적을 깨려는 질문을 던졌지만, 알버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소피의 어린 시절을 회상 중이었다. 비좁은 파리 소극장에서 아홉 살 정도의 소피가 하얀색 튈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었다. 피아노 콩쿨 예선 무대쯤 됐을 텐데, 소피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긴장된 표정으로 모차르트의 소나티네를 연주했다. 알버트도 비슷한 자세로 꼿꼿이 등을 세우고 소피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콩쿨 무대에서 소나티네를 연주하던 50년 전 소피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을지 상상해봤지만, 그 무엇도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불어를 정말 잘하는가 보군. 전부 들었소?” 알버트가 물었다.

“가족 분들은 없으세요?”

이번엔 아시아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른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글쎄, 있었긴 했었나?”

“다들 돌아가셨나요?”

대답 없는 물음표만 주고받는 대화였다.

“이제는 그것도 잘 모르겠어. 이 나이쯤 되면 그런 것도 다 무의미해지는 법이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알버트의 여동생은 15년 전쯤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소피를 제외하면 알버트의 마지막 남은 혈육이었다.

“예순 넷이었던 게 얼마 전 같은데, 그로부터 20년 정도 지났나?”

알버트의 자가 의문형 문장 내용은 보기보다 꽤 정확했다. 그는 올해로 정확히 여든 다섯의 나이를 지나고 있었다.

“정정하시네요!”

“그러든 말든.”

알버트는 계속해서 염세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일관된 대답을 했다. 동시에 역내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열차 지연에 관한 방송이었다. 옥스퍼드 서커스 역에서의 인명 사고를 전하는 역무원의 목소리는 내용에 비해 과도하게 침착했다. 반대로 승강장 초입에 모여 있던 문지기들은 지나치게 시끄러워졌다. 사람이 철로에 깔리든, 열차에 치이든 상관없이 일정에 차질이 생겨 분노하는 듯 보였다. 누군가 발을 헛디뎌 철로에 낀 건지, 다른 사람이 밀어버렸는지, 스스로 철로에 뛰어든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맘때쯤 철로에 사람이 깔리는 사고는 이상할 정도로 비일비재했다.

“이러고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 혼자는 아닌 것 같네요.”

“역시나 연착이 되긴 하는군.”

알버트의 시선은 열차 알림 패널을 향했고, 혼잣말은 그의 입가를 헛돌았다. 아시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그녀의 말을 무시한 것이었겠지만, 치매가 서서히 진행 중인 알버트의 의중은 그의 청력만큼이나 흐릿했다. 알버트의 발끝은 여전히 철로 위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사람이 깔렸다는 방송을 듣고 나서도, 그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승강장 뒤에서 누가 밀지 않아도 혼자서 툭 하고 철로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떨어지고 나면 또 다른 열차 지연 방송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역 이름만 바뀐 채로. 아시아의 불안은 커져갔다. 자신과 대화하던 사람이 눈앞에서 열차에 깔려 죽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하며, 조금씩 알버트에게 접근했다.

“저 사람은 뛰어든 걸까요? 아님 떨어진 걸까요?”

알버트가 듣는 둥 마는 둥 간신히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그의 몸이 승강장 안쪽으로 강하게 이끌렸다. 비틀거리는 약한 몸 때문인지, 아시아가 그를 살짝 잡아당겼을 때 그는 거의 내동댕이쳐졌다. 안전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는데도 그가 너무 쉽게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아시아는 괜한 억울함을 느꼈다.

“이쪽으로 오시라고요! 불안해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알버트는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고쳐 잡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휘청거리는 자세로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외투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미안하게 됐네, 아시아. 그렇지만 날 잡아끌 필요는 없어. 그거 역시 자네의 욕심이지.”

어색한 정적이 잠시 동안 이어졌다. 알버트의 단호한 말투에 아시아는 침묵했고, 놀랍게도 알버트가 도리어 미안함을 느꼈다. ‘뛰어내리더라도 자기 자신을 속으로 자책하기까지 했다.’

“이 역에서 나가도 다시 갈 곳이 없어서 말이야.”

“지낼 곳이 없으세요?”

“글쎄, 있더라도 갈 돈이 없다고 해야겠지.”

“저한테 지금 20파운드 있어요. 이걸로는 별 도움이 안 될까요?”

아시아는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분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감정이 억울함이든 미안함이든, 그녀는 알버트를 도와주려는 따뜻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것 참, 고맙구만. 20파운드.”

알버트는 실제로 큰 고마움을 느꼈지만, 자신도 모르게 평소의 비꼬는 말투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왜 그러는 거예요?”

“아니, 고맙다고. 고맙다고 말한 거야. 그리고 설령 내가 여기서 뛰어 내리더라도 신경 끄도록 해. 팔십 먹고 굳이 애써서 죽으려는 내가 이상해보이겠지만.”

알버트는 언제나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이었고, 사과하기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아시아에게도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고맙다는 말도 성내며 했다. 목소리를 높이다 보니 자살을 선택하려는 한 노인으로서 자격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살’이라는 선택 앞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것이 일종의 미흡함으로 작용한다.

“돈이 없어서 그러세요?”

“돈이 있든 말든, 이건 내 선택이라고. 내가 선택한 거야.”

“선택은 존중해요.”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모든 것은 선택이고, 자유였다. 알버트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자유를 탐닉하고 자존을 갈망했다. 나이가 들수록 자유의 폭은 점점 더 좁아졌고, 소소한 것에도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려는, 어린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아시아는 알버트의 선택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그렇지만 왜 이런 누추한 곳에서 기차와 철로 사이에 몸을 끼우는 고통을 감수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승강장 반대편에서 비니를 뒤집어 쓴 사람이 비틀비틀거리며 걸어왔다. 키가 아주 작은 사내였다. 얼굴빛이 불긋불긋하고, 알 수 없는 액체가 그의 후드티 가슴팍을 모두 적셔 놓은 것으로 봐서 만취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가 비틀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 방향이었다. 게다가 두 눈을 감고 걷고 있었다.

“저 사람은 저러다가 기차에 치여 죽을까요?”

아시아가 반쯤 걱정되는 마음으로 물었다.

“좀 전에 날 살려주려고 잡아당긴 사람치고는 말이 좀 거칠구만.”

“기차에 치이면 아프겠죠?”

“글쎄, 그거까진 모르겠는데.”

“저러다 떨어지면 그냥 죽을 텐데. 영국인들은 이런 거 도와주지도 않는다고요.”

“확실히 말이 잘 통하는구만.”

영국인을 욕하는 것은 알버트에게 가장 쉬운 친구 제안이었다. 그는 30년 넘게 영국에 거주하면서도 어떠한 소속감도 느끼지 못했다.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버티는 삶을 지내다 보니 영국에 대한 혐오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그는 영국인들의 뚝딱거리는 발음, 맛없는 맥주, 습한 날씨, 지저분한 정원까지 다른 종류의 악평을 매일같이 쏟아냈다.

“여기서 죽진 마세요.”

“그럼 자네는 어디 죽기 좋은 곳이라도 찜해뒀나?”

알버트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적어도 여긴 아니에요.”

이번엔 아시아가 점점 그녀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고작 죽는 것 하나에 어디까지 가려고?”

“전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고요.”

알버트는 말없이 아시아를 쳐다봤다.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말투 이면에 강력한 신념이 깃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택은 중요하니까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슨 선택?”

“이왕 한 번 죽는 거면 잘 골라야죠.”

“여기서 돈 안 들이고 죽는 것보다 더 좋은 곳도 있던가?”

알버트는 또다시 습관처럼 돈을 들먹였다. 아니, 가난을 들먹였다. 슬슬 이 점이 아시아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왜 자꾸 돈돈 하세요. 어차피 죽고 나면 돈은 아무 쓸모없다고요.”

“바보 같으니라고. 아직 자넨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알버트는 다루기 어려운 할아버지였다. 일단 아시아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며 입을 뗐다. 돈이 쓸모없다는 말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20대 초반,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다가 빈털터리가 된 채로 강제 전역을 했던 그였다. 처참한 과거를 생각하니 한탄스러운 마음이 속에서 들끓었다. 그러자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육성으로 나와 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다 빈털터리라고. 하나 남은 자식도 지 엄마랑 떠나고, 시골 요양 시설에서도 훈공은커녕 총알받이 노숙자 취급이나 하고, 달랑 한 달에 150유로 지원금 따위로 뭘 할 수 있냐고. 그걸 50년 동안 똑같이 한다고 생각해봐. 그래도 돈이 쓸모가 없나. 이래도 자네는 이 낡아 빠진 기차를 타고 살고 싶나. 죽고 나서도 난 물병 하나에 2파운드 하는 땅덩어리 위에서 계속 살고 싶지 않단 말이네.”

마지막 문장까지 끝내고 나서도 알버트는 자신이 방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한 것인지, 속으로 생각한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알버트의 언성이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높아질 때마다 둘의 대화에는 정적이 생겨났다. 그때, 옥스퍼드 서커스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들어왔다. 열차가 오랫동안 지연이 됐는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열차에서 내렸다. 승강장 초입에서 시끄럽게 굴던 젊은이들을 포함해 열차를 기다리던 이들이 이어서 출발했지만, 아시아와 알버트는 가만히 승강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열차를 타지 않고 남은 사람은 이 둘과 비틀거리던 만취한 사내뿐이었다.

“어딜 가는 길에 내가 붙잡았나 보군.”

그 말을 듣자 아시아가 자신의 수제 가방에서 무언가 꺼냈다. 알 수 없는 서류 뭉치였다.

“유품 정리사를 만나러 가요. 코벤트 가든에 깔끔하게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곧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알버트가 비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는 피카딜리 라인이 아니야, 그쪽으로 가려면….”

“그래도 할아버지처럼 바보 같이 죽진 않을 거예요.”

알버트의 말을 자르며 아시아가 말했다.

“똑똑한 방법이 있다면 좀 알려주게. 난 변변찮은 학교도 못 나와서, 제대로 배워먹은 게 없어서 말이야.”

더 이상 알버트는 그녀의 말에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비웃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비웃을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는 봤을 거잖아요.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

“60년 전에 그랬지.”

“저는 3년 전이에요. 저희 아빠가 그랬거든요.”

“그거 유감이군.”

“총알을 일곱 발이나 맞고, 수류탄 파편에 맞아도 죽지 않고, 불타는 철근 사이에서 7시간이나 벌벌 떨다가 죽었어요.”

유감이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알버트는 가족의 전사를 통보받는 절망과 전우의 죽음을 목격하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힘들었겠구만.”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요. 죽는 사람들 보면 하나같이 다 고통스러워해요.. 잘 죽는 거 따위는 없어요.”

“전쟁에선 그렇지.”

“아니요, 다 똑같아요. 우리 엄마도, 삼촌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전부 다요.”

“안타깝지만 잘 사는 것 따위도 없네.”

언뜻 듣기에도 거북한 내용의 문장이었다. 아시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혈육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점은 알버트와 같았지만 그녀의 상황이 더 처참했다. 여든 다섯의 노인이 혼자가 되는 것과 스무 살의 나이에 가족을 모두 잃는 것은 같을 수 없다. 게다가 가족 모두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었다는 점이 아시아를 더욱 암울의 늪으로 빠지게 했다.“안락사를 할 거예요. 스위스에 안락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과정은 복잡하지만, 전쟁고아는 지원 등급이 높아요. 이제 마지막 서류만 남았어요. 할아버지도 이런 더러운 기차에 치여 죽느니, 그 편이 훨씬 나을 거라고요.”

알버트는 안락사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다. 편안한 죽음에 대한 개념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전장, 공장 그리고 병원에서만 보낸 터라 그는 아시아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오 스위스. 그래, 예전에 살았었지. 아주 잠깐. 그 냄새 나는 바지 공장.”

“어차피 죽고 나면 돈은 다 필요 없어요. 죄다 산 사람의 욕심이에요.”

“아니, 그런데….”

“네?”

“그게 뭐라고 했지? 안… 안락….”

“안락사요?”

“그래, 그거.”

“내가 내 손으로 편히 죽는 거요. 모르세요?”

“그걸 스위스에서 할 수 있다는 건가?”

“네, 보통은요. 까다롭긴 해요. 호주에서도 하는데, 나이 제한이 있어요.”

둘은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둘 다 가족을 잃었지만, 잃은 나이가 달랐고, 둘 다 전쟁을 겪었지만 방식이 달랐다. 그러면서도 둘 모두 죽음을 직접 선택하기를 원했다. 한 명은 철로에 뛰어드는 것, 다른 한 명은 안락사. 죽음이라는 같은 선택을 했지만 그들의 동기는 달랐다. 알버트는 삶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고, 아시아는 죽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 알버트는 삶을 고민했고, 아시아는 죽음을 고민했다. 노인은 편안한 삶을, 소녀는 편안한 죽음을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는 같은 죽음이더라도 철로에 뛰어들겠다는 알버트의 고통스러운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안락사를 선택한 소녀도 자살을 선택한 노인의 결정을 막을 수 있는 법이다. 다만 죽음의 방식이 정당화의 대상인지 불분명할 뿐이다.

“호주라. 뉴질랜드는 가봤는데. 오타고라고 들어봤나? 20대에 난 배도 많이 탔었어.”

알버트가 말을 이었지만, 둘의 대화는 계속 헛돌았다.

“글쎄요. 근데, 저기 저 사람 불안해 보이는데요?”

대화를 어떻게든 이어가려는 아시아의 시선은 불안하게 휘청거리는 사내에게 머물렀다. 조금 전 만취해서 걸어가던 사람이었다. 그가 쓰고 있던 비니는 이미 내팽개쳐져 있었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 점점 승강장 끝 철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열차가 곧 들어온다는 역내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어요.”

“그래.”

차분한 알버트의 대답에 비해 아시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동시에 취객은 다이빙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승강장 철로를 향했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니까요!” 아시아가 소리쳤다.

“그게 나한테 뭐가 중요한가….”

알버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성의 없어 보였지만, 그는 온 신경을 만취한 사내에게 쏟았다. 이미 알버트의 감각은 많이 희미해졌지만 그의 청각과 시각은 몰입해있었다.

“저기요!” 기차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아시아가 그를 말리기 위해 뛰어갔다.

센트럴 라인 열차가 무자비할 정도로 빠르게 승강장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만취한 취객은 안전한 곳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다만 그를 승강장 안쪽으로 끌어당긴 것은 아시아가 아니라 알버트였다. 덩달아 넘어진 알버트는 헉헉대며 큰 숨을 내쉬었다.

열차의 문이 열렸다. 방금 있었던 긴박한 상황도 말끔히 무마시킬 만큼 많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렸다. 지하철 문은 한 번에 닫히지 못하고 삐거덕삐거덕 소음을 내며 반쯤 닫혔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했다. 내린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앞으로만 걸어갔다. 승강장은 하나같이 피곤에 절어 있는 표정과 출구를 찾아 두리번대는 눈동자들로 가득했다. 지친 하루의 끝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무리하고픈 발걸음도 함께였다. 모두가 지나치는 길목 한 가운데에 알버트와 만취한 취객만이 누운 채로 멈춰 하나의 섬처럼 고여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밀물처럼 밀려온 사람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열차도 썰물에 휩쓸리듯 빠져나갔다. 열차가 지나간 뒤에도 취객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닥에 엎드린 그의 옆에 검은색 허리 가방이 나란히 던져져 있었다. 그 가방 윗면에 커다랗고 선명한 로고가 보였다. ‘Oui’라는 프랑스어였다. 알버트가 염세적으로 던진 질문, 그러니까 이게 나한테 중요하냐는 반복된 질문에 마땅히 대답을 하듯, 그 한 단어만이 꼿꼿이 존재를 드러냈다. 알버트는 넘어진 채로 가방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말랐지만 단단한 손이었다. 오늘 리버풀 스트릿 역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이준상 옥스퍼드대학교 재료과학과 박사과정 재학(2019-), 작사가(2022-)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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