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미완의 우로보로스—김기덕론
[제1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미완의 우로보로스—김기덕론
  • 임정식
  • 승인 2009.03.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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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그라미 안과 밖

  김기덕은 이제 과거형이다. 야생의 푸른 피는 흐름을 멈추고, 도시를 향한 구애의 손짓이 허공에서 나부낀다. 한 발은 동그라미 안에 두고, 한 발은 동그라미 밖으로 내딛고 있다. 안에 있는 것도, 밖으로 완전히 나간 것도 아니다. 조금 불편해 보인다.

  김기덕 영화는 3불不의 영화였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온했다. 폭력성, 남성 중심주의, 선정성 따위가 스크린에 넘실거렸다. 그는 동시대인의 성감대를 마음껏 유린했고, 한국 영화의 완고한 문법을 파괴하면서 모반을 꿈꿨다. 무엇보다 우리 내면의 응달에 잠복해 있던 타자, 제우스에 의해 지하 세계에 처박혔던 괴물인 티폰을 호출했다.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김기덕의 무기는 단순했다. 반추상과 이미지라는 화살뿐이었다. 그래도 거침없었다. 충무로의 심장을 향해 거듭 활을 쏘아 댔고, 집중 포화를 맞았다. 푸른 피를 뚝뚝 흘렸다. 그러나 김기덕은 살아남았다. 그토록 격렬한 비판을 견뎌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김기덕은 충분히 포효할 만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승리의 월계관을 쓰기에는 아직 이르다.

  지난해 봄, 김기덕이 순해졌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열네 번 째 영화 〈숨〉이 개봉된 후였다. 김기덕이 착해졌다는 말은 처음이 아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때도, 〈빈집〉이 나왔을 때도, 〈시간〉이 개봉됐을 때도 그런 풍문이 나돌았다. 그런데 착해졌다는 건, 순해졌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얼핏 상찬 같기도 하고, 야유 같기도 하고, 백기 투항한 적장에게 주는 면죄부 같기도 하다. 그럼 김기덕의 무엇이 변했고, 어떻게 달라진 것일까.

  〈시간〉과 〈숨〉이 전환점이다. 순치된 짐승의 눈빛이다. 심장을 불끈거리게 만들던 야생성이 사라졌다. 김기덕에 대한 수식어들은 수정돼야 한다. 과거형으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상전벽해의 변화는 아니다. 변했으되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은 듯 달라졌다.

  영화의 서사 구조는 그대로다. 순환과 반복을 거듭한다. 여전히 사회적 타자인 인물들, 비틀린 멜로 드라마적 설정, 소통과 화해에 대한 갈망도 변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변화도 눈에 띈다. 여성의 능동성, 주체성이 화면 안에서 꿈틀거린다. 수동적이고 소외된 존재였던 여성이 햇빛 속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여성이 비로소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된 것이다.

  김기덕은 겨울 벌판을 들짐승처럼 혼자 쏘다녔다. 살을 저미는 듯한 한천寒天의 어둠 속에서, 그는 오래 외로웠으리라. 하여 도시를 향해, 대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한 줌 온기를 지닌 불빛을 찾아 타박타박 걷는다. 〈시간〉과 〈숨〉이 그 이정표다. 김기덕은 야생의 푸른 피를 버리고, 도시에 몸 붙여 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겠는가. 세월은 무상하고, 삶은 가혹하다.

  2. 순환과 반복, 뫼비우스의 띠

  우로보로스라는, 상상 동물이 있다.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푸른 뱀이다. 입과 꼬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꼬리가 머리이고, 머리가 꼬리다.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원형 혹은 타원형일 것이다. 우로보로스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결혼하고,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그러면서 머리는 머리대로 있고, 꼬리는 또 꼬리대로 있다. 같으면서 다르고, 끊어질 듯 이어진다.

  〈숨〉에서 여자(연)는 사형수 남자(장진)를 만나러 간다. 감옥을 반복해서 방문한다. 감옥의 안과 밖, 현실과 일탈의 순환이다. 시간도 되풀이된다. 여자는 면회실에 사계절을 천연색으로 압축해서 펼쳐 놓는다. 현실과 감옥은 두 겹의 순환 구조를 이룬다. 〈숨〉은 제목부터 상징적이다. 인간은 들숨과 날숨의 순환과 반복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시간〉도 다르지 않다. 새희는 성형수술을 하고 성형외과를 나오다가, 세희와 부딪친다. 세희는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한다. 새희는 그냥 사라진다. 이 시퀀스는 마지막에도 반복된다. 제3의 여자는 성형수술을 하고 성형외과를 나오다가, 세희와 부딪친다. 세희는 또 말한다.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제3의 여자는 그냥 사라진다. 동어반복이다. 동시에 동어반복이 아니다. 시간의 속성이다. 〈시간〉이 또한 그렇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무의미한 듯 반복되지만 똑같지는 않다. 시간이 존재를 낳는다. 

  성형수술도 본디 그렇다. 생살을 찢고, 째고, 가르고, 꿰매어 형상을 바꾼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세희는 새희가 되고, 새희는 제3의 여자가 됐다. 변했나? 그렇다. 그러나 또한, 아니다. 세희, 새희, 제3의 여자는 동일 인물이다. 동시에 다른 인물이다. 우로보로스는 스스로를 죽이고, 또 재생한다. 성형수술은 과거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복제하는 행위다. 그럼 복제된 우로보로스의 정체성은 뭘까. 김기덕은 〈시간〉에서 존재의 본질을 묻는다. 

  〈시간〉은 순환하고, 반복하고, 재생한다. 〈숨〉의 여자도 집과 감옥, 현실과 판타지를 오간다. 〈시간〉의 세희(새희)와 지우는 끊임없이 같은 장소를 맴돈다. 길모퉁이 카페, 바닷가 조각공원을 찾는다. 새희가 사랑해요, 라고 붉게 겹쳐 쓴 편지도 같은 맥락이다.   

  세희와 새희는 뫼비우스의 띠다. 앞과 뒤를 구별하기 힘들다. 사실은 하나다. 이 발음의 유사성은 김기덕의 교묘한 위장술이다. 〈시간〉은 이처럼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것들의 집하장이다. 김기덕에게는 시간이 꼭 그러하다. 시간은 들숨과 날숨의 반복과 누적이다. 〈시간〉과 〈숨〉은 그렇게 구체적이고 실존적이다.

  〈시간〉의 세희는 불안하다. 맨날 똑같은 모습이어서, 맨날 똑같은 얼굴이어서, 맨날 똑같은 몸이어서, 미안하다. 반복과 순환을 견디지 못한다. 세희는 소멸하고 싶다. 아니, 새로워지고 싶다. 침대에서 이불로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형외과로 간다. 의사가 묻는다. “자기 얼굴이 지겹나요?” 의사는 또 묻는다. “다시는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도 괜찮은가요?” 세희의 대답은 간결하고 완강하다. “새로울 수 있다면 참아야죠.” 그걸로 끝이다. 과거는 흘러갔다. 이젠 세희가 아니라 새희다. 그러나 진정한, 완벽한 변신은 아니다. 새로운 시간이란, 성형 수술한 새희란, 가면일 뿐이다. 옛 시간 위에 새 시간을 덧씌운 것이다. 실제로 훗날 새희는 종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하지만 새희의 숙주는 어디까지나 세희다. 〈시간〉의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시간은 흘러만 가는 게 아니다. 흐르면서 쌓이고, 퇴적물을 만든다. 그렇게 퇴적된 기억이 현실을 이룬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히스테리 환자는 기억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 기억은 상처뿐인 기억이다. 트라우마다. 대개 문제 속에 답이 있다. 환자의 과거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게 치료의 첫 단계다. 새희의 히스테리는, 슬픔은, 존재의 순환을 인정하는 순간 치료 가능성이 열린다. 시간은, 존재는, 본래 우로보로스와 같다.

  〈숨〉은 어떤가. 여자는 남편의 외도로 괴로워한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한 사형수의 기구한 운명을 본다. 가족을 살해하고, 감옥에서 송곳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한 남자. 여자는 홀린 듯 그 남자를 찾아가고, 삶의 온기를 전하고, 시간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다시 남편에게 돌아간다. 여자는 분노를, 증오를 씻어 냈을까. 세희는 병원에서 성형수술을 했다. 여자는 감옥에서 삶의 전기를 마련했다. 가족을 살해한 사형수를 통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그녀의 영혼은 달라졌다. 그러나, 반드시 새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기덕은 “증오가 들이마시는 숨이라면, 용서는 내쉬는 숨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은 성소다. 증오를 용서로 바꾸는 정화의 장소다. 똑같이 감옥을 화두로 했으나, 김기덕은 실존적이고 푸코는 정치적, 역사적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보여주는 감옥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다. 김기덕은 푸코와 정반대 시각을 보여준다. 푸코에게 감옥이 감시와 처벌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라면, 김기덕에게 감옥은 인간의 몸과 같다. 생명의 근원이자 부활의 장소다. 여자는 감옥을 나서면서 남편,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 가벼운 음표들 사이로 눈이 내린다. 분노와 증오를 덮어 주는 평화의 눈, 순결한 흰 눈. 그러나 한계가 분명하다. 흩날리는 눈은 허공에서 갈 곳을 잃는 법이다.

  김기덕 영화는 순환하고, 반복하고, 부활한다. 이 내러티브는 김기덕 영화의 원형질이다. 우로보로스를 닮았다. 데뷔작 〈악어〉에서도 그랬다. 여주인공 현정은 깡패들에게 윤간당한 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한다. 용패는 현정을 구해 낸 후 다리 밑에서 같이 산다. 마지막에도 현정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한다. 용패도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현정은 죽고, 용패도 죽는다. 강물에 뛰어드는 행위가 반복된다. 〈악어〉가 머리라면, 〈숨〉은 꼬리다. 결국은 한 몸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시간은 도돌이표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똑같은 궤도를 도는 게 아니다. 원은 나선형으로 확장된다. 세희(새희)와 지나가는 여자, 새희(제3의 여자)와 지나가는 여자의 충돌은 같은 층위가 아니다. 사형수를 만나기 전의 여자와 그를 만난 이후의 여자는, 똑같은 차원의 여자가 아니다. 용패와 현정이 강물에 뛰어드는 행위가,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간〉은, 〈숨〉은, 우로보로스 같은 영화다. 김기덕은 과거의 자신을 스스로 죽였다. 새로운 인물과 구조를 만들었다. 자기 영화의 성형외과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또한 〈악어〉의 동어반복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숨〉은, 새로우면서 새롭지 않다. 과거는 흘러가지 않았다. 

  3. 가면놀이 혹은 꼬리물기 게임

  〈시간〉은 시간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김기덕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맨날 똑같은 모습이어서 미안하다던 세희. 그녀는 잡지에서 눈 따로, 코 따로, 입 따로 오려 낸다. 몸을 바꾼다. 새희는 지우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세희가 돌아오면 새희는 어떻게 되느냐고. 새희는 독백한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하지만 이상하게 슬프네요.”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왜 슬픈 것일까. ‘새로운 나’가 진정한 ‘새로운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몸속의 내장은, 피는 옛날 그대로다. 〈페이스오프〉에서도 그랬다. 얼굴과 몸과 목소리가 통째로 바뀌었지만, 본질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마틴 기어의 귀향〉에서도 다뤘던 주제다. 이 〈존재 증명〉 내러티브는 익숙하다. 옛이야기의 전형적인 구조다. 김기덕은 영화를 통해 다시 묻는다. 지금의 나는 진짜 나인가.

  〈시간〉에서 세희는 스스로 새희가 됐다.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불행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짜임을 안다. 설상가상의 사건이 발생한다. 세희가 돌아온다. 새희는 지우에게 확인한다. “아직 그 여자 사랑해요?” 그렇단다. 새희는 폭발한다. 그녀는 보완재가 아니라 대체재였을 뿐이다. “그럼 난 뭐야. 내가 창녀야!” 부르짖는다. 새희의 이 외침은 매우 중요하다. 김기덕 영화에서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드문 경우다. 김기덕 영화에서 여자는 절대적 타자였다. 수동적이었고, 피지배자였다. 그 때문에 호된 비판을 받았다. 〈시간〉에서는 아니다. 여성이 주체로 등장한다. 먼저 성형수술을 하고, 먼저 정체성을 묻는다.

  〈숨〉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자는 남편의 외도로 상처받는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소외다. 김기덕 영화의 습관적 동어반복이다. 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혼을 찾아 항해를 떠난다. 타자로만 존재했던 여성이 주체로 진화한다. 김기덕이 화해의 혹은 투항의 손수건을 흔드는 장면이다. 일부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날선 비판은 이제 표적을 잃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새희는 사실 세희다. 시간의 자궁은 시간이다. 그런데 새희가 세희를 질투한다. 모순이다. 여자는 감옥에서 판타지로서의 시간을 겪는다. 그러나 현실은, 비록 분노와 증오를 초월했다고 믿는다 해도, 판타지가 아니다. 진정한 부활, 진실한 화해가 아니다. 〈시간〉이, 〈숨〉이 자꾸 미끄러지는 이유 중 하나다. 

  이번에는 지우가 성형수술을 한다. 역할 바꾸기 놀이다. 새희가 얼굴 고친 지우를 찾아 헤맨다. 머리는 꼬리가 되고, 꼬리는 머리가 됐다. 그러나 사실은, 한 몸이다. 새희가 지우를 확인하는 방법이 전형적이다. 손깍지를 끼어 본다. 몸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김기덕은 그동안 육체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나 예전의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육체성이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는 손을 잡는 것, 체온을 느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악어〉나 〈나쁜 남자〉에서는, 〈섬〉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구토가 날 만큼 격렬했다. 단지 손을 끼어 보는 것으로 존재를 확인하는 장면은, 야생의 들판에서 도시의 불빛 속으로 걸어간 작은 흔적이다.

  김기덕이 걸어가는 그 길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그 안개 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온다. 그 군중 속에 〈나쁜 남자〉의 한기와 선화, 〈빈집〉의 태석과 선화가 있다. 그들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운명을 걷는다. 그럼 존재의 개별성은 어떻게 되나? 김기덕은 〈시간〉에서 특유의 이미지로 대답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만조의 바다. 푸른 파도가 조각공원을 덮는다. 밀물은 조각들을, 사랑의 상처들을 다 지워 버린다. 조각들은 소멸하지만, 썰물이 되면 다시 부활한다. 완전한 소멸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성형수술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시간〉의 인물들이 자꾸 발을 헛딛는 또 다른 이유다. 상처는 이미지로 치유되지 않는다. 〈숨〉의 여자도 같은 길을 걷는다. 여자는 사형수를 위해 노래하고 사계 퍼포먼스를 한다. 그 노래와 퍼포먼스의 진정한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여기서 김기덕이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부활은 완전한 소멸과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다. 진정한 애도가 필요하다. 〈악어〉의 김기덕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김기덕은 서둘러 해답만 제시하려고 한다. 

  4. 사랑과 상처, 연금술사

  지구 표면은 거칠고 사납다. 지표면 아래는 뜨겁다. 수천 가지 물질이 용해돼 있는 맨틀이 있다. 지구 표면은 맨틀 위에 떠 있는 섬이다. 김기덕 영화의 맨틀은 소통이다. 혹은 사랑이다. 김기덕을 설명하는 단어의 스펙트럼은 매우 좁다. 폭력성, 사도마조히즘, 남근주의, 반여성주의 등이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된다. 김기덕은 사랑의 연금술사다. 인간의 온갖 원시적 성정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서, 사랑을 빚어 올린다. 김기덕 영화는 근본적으로 사랑에 관한 영화다.

  김기덕의 사랑은, 결핍의 사랑이다. 이 지점에서 대중과의 소통이 자꾸 헝클어진다. 김기덕 영화를 지배하는 야생성은 사랑에 대한 욕망, 소통과 화해를 갈망하는 애절한 눈빛의 다른 이름이다. 맨틀은 일정 온도가 넘으면 지표면을 뚫고 폭발한다. 활화산이다. 괴물 티폰의 귀환……. 김기덕 영화는 내면에서 오랫동안 썩고 발효된 슬픔이 터져 나온 것이다. 다시 기억해야 한다. 야수성과 사랑에 대한 욕망은, 폭력성과 애정 결핍은, 뫼비우스의 띠다.  

  데뷔작 〈악어〉부터 선명하다. 시체를 이용해 먹고사는 용패는, 아프리카의 야생 악어 그대로다. 자신이 구해 준 현정을 상대로 폭행과 강간을 일삼는다. 〈악어〉에서 여성은 남근이 욕정을 배설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용패는 초상화 한 점에 스르르 무너진다. 현정이 용패의 초상화를 그려 준 이후, 용패의 얼굴이 말끔해진다. 상처가 사라진다. 중요한 변화다. 용패에게는 겨자씨만한 사랑과 관심이 필요했던 거다. 용패는 김기덕의 분신으로 읽힌다. 충무로의 팍팍한 황톳길을 걸어가는 김기덕은, 봄날의 연둣빛 새싹만큼 작은 사랑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현정과 용패의 섹스는 층위가 달라진다.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섹스다. 현정은 이제 암컷이 아니다. 용패도 그저 수컷이 아니다. 이 섹스는 하나의 제의가 된다. 현정은 정결해진 영혼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용패도 원초적 고향인 강물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악어〉는 김기덕 영화의 자궁 같은 영화다. 

  〈나쁜 남자〉나 〈섬〉, 〈빈집〉도 다르지 않다. 〈나쁜 남자〉의 한기는 처녀인 여대생 선화를 납치해 창녀로 만든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뒤섞인 행동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건 껍질일 뿐이다. 김기덕 영화의 거친 폭력성과 선정성, 그 안쪽에는 사랑에 대한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벙어리 한기는 절규한다.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 그렇다. 변두리 사창가 깡패 따위가, 밑바닥 삼류 인생 주제에 사랑이라니. 한기는 영화에서 단 한 마디, 서러운 역설을 통해 통렬하게 진심을 토해 낸다. 한기는 사랑하고 싶었던 거다. 한 줌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다. 

  〈시간〉에서는 사랑이 흘러넘친다. 도시 남녀의 반질반질한 사랑이다. 여기서 균열이 발생한다. 〈시간〉에는 진정한 사랑은 없다. 세희가 지우를 떠나는 이유는, 지우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숨〉에서도 여자는 자신의 재생을 꿈꾼다. 〈악어〉의 사랑과, 〈시간〉이나 〈숨〉의 사랑은 차원이 다르다. 사랑은 상처를 만들고, 상처는 사랑을 키운다. 상처는 육체를 전제로 한다. 육체는 정신으로 통하는 문이다. 김기덕 영화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상처로 상처를 극복한다. 그래서 피가 튀고 폭력이 뒤섞인다. 〈시간〉과 〈숨〉은 한참 비껴나 있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사회적, 계급적 타자다. 살인자, 깡패, 부랑자 따위의 아웃사이더다. 그들의 가계를, 고향을,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없다. 삶의 현장은 야생의 정글이다. 그러니 당연하다. 거칠고 폭력적이고 야비하고 강해야 살아남는다. 야생동물들의 생존법이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이 꼭 그렇다. 그들은 ‘한 가지에서’ 태어난 듯하다.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어딘가 닮은 존재들. 악어와 우로보로스는, 그러고 보니, 똑같이 파충류다.

  5. 말의 성찬, 흩어지는 사랑

  현실의 김기덕은 영화 속 인물과 닮은꼴이다. 한국 영화계의 변방에서 홀로 우우 짖어 대는, 상처투성이의 서러운 짐승. 영화를 상영할 극장이 없는, 대박 영화를 향해 쓴 소리를 내뱉었다가 금방 꼬리 내리는, 반성문 쓰는 감독이었다.

  김기덕은 전략을 바꿨다. 도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선화가 립스틱을 칠하듯 두껍게 화장하고, 관객 앞에 나섰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던 폭력, 강간, 여성 학대의 장면들을 지웠다. 사형수가 송곳으로 목을 찔러도, 성형수술을 해도, 이제는 소름 돋지 않는다. 예전의 김기덕이었다면 동물적이고 파괴적이었을 것이다. 찢어진 생살과 붉은 피를, 정육점에 내걸린 고깃덩어리를 헤집는 듯한 수술 장면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나 김기덕은 육체의 원시성 위에 반투명 베일을 드리웠다.

  〈시간〉은 도시 영화다. 인물도 공간도 도시적이다. 카페나 모텔, 미술관, 아니면 조각공원이 배경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낯선 공간이다. 〈활〉까지만 해도 공간의 타자성은 예외가 없었다. 사창가나 기지촌 같은 고립, 단절, 유폐의 땅이었다. 그런데 똑같이 어둡고,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공간도 이제는 느낌이 다르다. 〈숨〉의 주요 공간은 감옥이지만, 차갑고 시리거나 누추하지 않다. 여자가 꾸미는 면회실은 천연색의 사계절 퍼포먼스로 환하다.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시간〉에서 지우는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하고, 사진을 찍고, 컴퓨터로 영화를 편집한다. 매끈하고 깔끔하다. 〈숨〉의 여자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다리 밑’이 아니라, ‘다리 위’에서 생활하는 도시인이다. 이 같은 인물과 공간의 변화는, 화해의 몸짓일까. 그럴 수 있겠다. 휴전 선언일까. 안간힘일 수도 있겠다.

  김기덕 영화는 눌변訥辯의 영화다. 대사가 많지 않다. 〈섬〉의 희진, 〈나쁜 남자〉의 한기, 〈활〉의 소녀는 말이 없었다. 벙어리거나, 벙어리에 가까웠다. 입력만 가능할 뿐 출력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영화의 주제는 선명했다. 

  〈시간〉과 〈숨〉은 대사의 역설을 보여준다. 〈시간〉에서는 언어가 흘러넘친다. 지우와 세희(새희)는 대화하고, 고함치고, 절규한다. 그런데 말들은 미끄러지고, 어긋나고, 서로 비껴간다. 상대의 심장에 닿지 못한다. 현정과 한기와 소녀의 대사보다 〈시간〉 한 작품에서 쏟아 낸 대사가 더 많다. 언어의 범람은 이미지의 소멸을 가져왔다. 이미지는 묵언 수행이다. 언어보다 눈과 가깝다. 기존 김기덕 영화에서는 침묵이 두꺼운 울림을 낳았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는 납치한 선화를 창녀로 만든 후, 거울을 통해, 선화가 손님을 맞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때의 미장센을, 한기의 절망과 분노와 체념이 복합된 표정을 잊으면 안 된다. 그 인상적인 숏에서 한기는, 말이 없다. 아니 사실은, 말이 필요 없다. 절대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의미는 차고 넘친다.

  〈숨〉에서도 말하고 노래하는 것은 여자다. 사형수는 침묵으로 대화한다. 그는 송곳으로 목을 찔러 언어를 삼켰다. 그 침묵은 서늘하다. 김기덕은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로 말해 왔다. 〈시간〉과 〈숨〉에서는 변화가 감지된다. 언어가 출렁거리고, 대사가 넘실거린다. 그런데 그 인물들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 흩날리는 대사가 영화의 울림을, 의미를 훼손한다.

  그래서일 게다. 〈시간〉과 〈숨〉은 여운이 없다. 인물들은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래서 성형수술까지 하지만, 결국은 허전한 몸짓들만 남는다. 세희가 성형수술 하는 이유도, 지우가 성형수술 하는 까닭도,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상대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서다. 〈숨〉에서 보여주는 여자의 온정도 사실은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씻어 내기 위한, 유년의 상처를 잊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이기심을 언어로 위장한 것이다. 여성의 주체성과 언어의 가벼움. 양날의 칼이다.

  〈악어〉는 〈시간〉과 〈숨〉의 대척점에 있다. 서사는 허술하고 대사는 민망하다. 그러나 〈악어〉는 무겁다. 사랑의 진정성이, 이타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의 한기에게 선화는 순결한, 이상적인 타자였다. 〈악어〉의 사랑은 투박하지만, 아니 그래서, 혼탁한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리스 신화 속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을 기억하자. 조각이 사람으로 변한 것은, 피그말리온의 순수한 열정과 이타적인 사랑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숨〉의 사랑은, 〈시간〉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 〈악어〉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시간〉에서는 사랑이란 말이 벌떼처럼 윙윙거린다. 그런데도 〈악어〉에는 떨림이 있고, 〈시간〉에는 사랑의 자세만 남아 있다. 〈악어〉의 용패와 현정은 정화 의식, 곧 자기희생의 제의를 거쳤다. 애인의 배신을 확인한 현정은 자살을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용패와 한풀이 굿과 같은 섹스를 한다. 용패와 현정은 이 섹스를 통해 부활한다. 생명의 근원인 물속에서, 죽음의 평화를 잉태한다. 그들의 죽음은 종교적으로 승화된다. 김기덕 영화에서 섹스는 동물적 욕구 충족을 위한 수컷들의 몸부림인 동시에 구원과 화해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6. 길 위의 푸른 피

  〈시간〉은 〈악어〉를 삼켰다. 〈숨〉은 〈악어〉를 들이마셨다. 머리가 꼬리를 문 형상이다. 우로보로스의 머리와 꼬리는, 같으면서 또한 다르다. 순환과 반복과 재생의 구조다. 사랑과 소통, 화해에 대한 갈망이 이 작품들을 묶어 준다. 〈시간〉은, 〈숨〉은, 〈악어〉를 살해했다. 황금색 가지를 가진 나무를 지키던 전임자를 살해하고 사제가 된,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할 운명을 가진 네미 호수의 사제를 닮았다. 두 작품은 〈악어〉에 빚지고 있다. 우로보로스는 〈시간〉의, 〈숨〉의 다른 이름이다.

  김기덕은 〈시간〉과 〈숨〉에서 존재의 순환을 탐구한다. 크로노스는 자식을 삼켰지만, 결국은 제우스에 의해 토해 내고 말았다. 제우스는 티폰을 지하 세계에 감금했지만, 김기덕은 그 괴물을 의식의 지평 위로 끌어올린다. 우로보로스는 크로노스처럼 탐욕스럽지 않다. 시간을 뱃속에 구겨 넣지 않는다. 입에 물고 있을 뿐이다.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어야 한다. 시간은 그렇게 이어진다. 시간은 동어반복의 순환이 아니라, 나선형의 순환으로 팽창한다.

  김기덕도 팽창을 꿈꾼다. 옛 고장을 버리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아직은 미완성이다. 특유의 야생성은, 악어가 먹이를 물고 온몸을 뒤흔들며 패대기치는 몸짓은, 그 피를 솟구치게 하는 역동성은, 사라지고 없다. 폭력적인, 파괴적인, 기괴한 따위로 설명되는 과격한 장면들도 자취를 감췄다. 대신 도시적인 사랑의 몸짓을 그려낸다. 남성의 타자로만 존재했던 여성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자기 삶의 주체로 굳건하게 선다. 그러니 김기덕은 앞으로 매끈한 멜로 영화 혹은 종교 영화를 선보일지도 모른다. 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폰도 신의 자식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그들이 우리 내면에서 동거하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밀도가 궁금할 뿐이다.

  김기덕은 변화의 걸음을 내디뎠다. 더러는 야생의 시절이 좋았다고 말할 것이다. 너무 늦었다고, 걷지 말고 뛰라고 손짓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기덕은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 한 발은 동그라미 안에 두고, 한 발은 동그라미 밖으로 내딛고 있다. 미완의 우로보로스다. 조금 불편해 보이는 그 자세를 털고, 그는 어느 도시에 정박할 것인가. 김기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임정식
1964년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수료. 《스포츠조선》 사회경제부 차장.

 

* 《쿨투라》 2008년 봄호(통권 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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