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한국 근현대사와 역사극의 재현: 2018 창작산실 연극 〈가미카제 아리랑〉, 〈세기의 사나이〉, 〈배소고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제13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한국 근현대사와 역사극의 재현: 2018 창작산실 연극 〈가미카제 아리랑〉, 〈세기의 사나이〉, 〈배소고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 장윤정
  • 승인 2019.09.0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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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공연예술창작산실(이하 창작산실) 연극부문은 역사적 사건을 조명하는 작품들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총 7작품 중에서 〈가미카제 아리랑〉(신은수 작, 정범철 연출), 〈세기의 사나이〉(차근호 작, 최원종 연출), 〈배소고지 이야기 : 기억의 연못〉(이하 〈배소고지 이야기〉, 진주 작, 박선희 연출), 〈하거도〉(윤지영 작, 최용훈 연출), 〈비명자들1〉(이해성 작·연출)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올해가 임시정부수립 100 주년인 만큼 여러 매체들은 근대사와 관련된 담론들을 여느 때보다 왕성하게 형성하고 있는 추세다. 연극무대 또한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이번 창작산실에 역사극이 다수 포진해 있는 것도 그러한 지점에서 다소 납득이 된다.

역사극의 가장 소박한 정의는 ‘역사를 소재로 한 극’이 된다. 동어반복적 정의라 해도 이 정의가 보편적일 수 있는 것은 역사극의 스펙트럼이나 장르적 특성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이번에 선정된 역사극들은 어떠한 특성이 있는 것일까? 그 중에서도 〈가미카제 아리랑〉과 〈세기의 사나이〉, 〈배소고지 이야기〉는 적극적으로 근현대사를 조명하면서 양식적 측면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에서 각자의 색깔을 분명히 한다. 각 작품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어떠한 지점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면서, 나아가 역사극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한다.

(중략)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일대기로 아울러내다 ― 〈세기의 사나이〉

어떠한 역사든 늘 사후事後에 정의된다. 이해는 필 연적으로 시간을 요구하므로 당장 벌어지는 일들을 의미화하기란 불가능하다. 그와 더불어 역사는 효율 적인 기록과 인식을 위해 대표성을 강조한다. 장구 한 시간을 압축하여 이해하기 위해선 특정 인물들로 역사를 구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억한다. 대신 그 인물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행위 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주변인들은 알지 못한다. 역사는 어쩌면 그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결과물이 아닐까? 한 명의 영웅이 탄생하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평범한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에 온전히 범인凡人인 내가 역사 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세기의 사나이〉는 이 질문을 품고서 특수한 이야기를 보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작품의 주인공 ‘박덕배’는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다. 그는 늘 역사적인 현장에 자리하지만 우연히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요기를 채우기 위해 태화관에 들르면 민족대표 33인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얼떨결에 그들과 기념사진을 찍다보면 어느새 분위기에 휩쓸려 3·1운동 최전선에서 만세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총탄에 맞아 사망하지만 저승사자와의 계약으로 다시 살아나 125년까지 살아간다. 살아가는 내내 박덕배는 지속해서 역사적인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게 되거나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 존재하게 되는데, 그의 존재는 의도치 않게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시인 이상은 그를 보며 「오감도」의 시상을 떠올리고 마라톤 선수 손기정은 그를 통해 다시금 동력을 얻어 정신적으로 고무된다. 김우진과 윤심덕 곁을 스쳐지나가거나 뜻하지 않게 윤봉길과 김구를 만나 도시락폭탄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 외에도 일본으로 강제 징집당하거나 한국전쟁을 겪고 베트남전쟁을 겪는 등 한 세기를 넘어서는 기간 동안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존재한다.

보통사람 박덕배에겐 거대한 역사적 사명감이나 투철한 윤리의식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죽음에 이르 기까지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나갈 뿐이다. 그가 가진 힘은 순박함과 선량함에 가깝지만 그것도 특별히 대단한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극 중에서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어떠한 울림을 전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특별히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덕배는 마치 닫혀있는 역사에 틈을 내는 존재와 같다. 영웅이란 결코 초월자가 아님을, 박덕배를 통해 보여 준다. 그가 등장하는 곳마다 영웅들은 늘 불완전한 상태다. 그들은 박덕배를 통해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는 보통사람으로서, 박덕배는 부족한 능력의 인간이 영웅과 같은 활약을 하는 존재로서, 초월자들로 구성되었으리라 믿어져온 역사의 허울을 벗겨낸다. 자연히 완벽할 것만 같았던 기존의 완성된 역사에 균열이 일어난다.

박덕배는 전형적인 영웅의 면모로부터 탈피하여, 그저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매우 보편적 이고 인간적인 모습에 가깝다. 아버지의 유언을 고수하고자 노력하고 동생을, 친구를, 친구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한다. 그와 동시에 삶의 선택과 휩쓸림의 연속에서 예상치 못한 역사적 사건을 야기한다. 자연히 관객은 특수와 보편을 구분짓는 것이 무의미한 행위임을 사유하게 된다. 박덕배라는 보편으로 인해 특수함이 가능해지는 순간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기의 사나이〉는 그 어떤 범인도 비범인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비범인 또한 범인임을 역설한다. 즉, 영웅이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떠한 가능성의 영역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125년을 산 박덕배의 인생, 각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중요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세기의 사나이〉는 긴 서사를 재치 있는 형식으로 이끌어간다. 근현대사를 모두 훑는 작품인 만큼 무대 위에는 다양한 시공간이 등장하는데, 무대 전면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구성하여 영상을 투사함으로 써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했다. 무대 위에 영상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익숙한 연극 문법이겠으나, 웹툰 형식을 적극 차용함으로써 작품에 신선함과 재미를 더했다. 영상은 빠른 장면 전환이 가능하므로 극을 속도감 있게 진행할 수 있고, 만화는 시각적으로 직관적인 의미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관객은 근현대 사라는 대서사시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영상은 배경으로만 그치지 않고 때론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 인물들의 숨겨진 내면을 대변하기도 하고 인물들의 성격을 상징화하기도 하면서 서사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수많은 장면들이 무대에서 극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조명과 음향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임팩트 있는 영상의 출현, 그 즉시 영상에 맞게 표현되는 배우의 연기, 그와 동시에 시청각적 분위기를 제공하는 조명 및 음향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만 극적인 한 장면이 완성된다. 여러 요소가 오차 없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야 하니, 결코 쉽지 않은 기술이 요구된다. 〈세기의 사나이〉는 이 모든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덕분에 작품은 방대한 서사의 역사극을 압축적·현대적으로 연출해내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연극과 영화, 영상이 서로의 매체적 특성을 어떻게 결합하고 활용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가늠하게끔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세기의 사나이〉는 점차 탈장르화 되어 가는 연극무대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영상매체와 달리 연극은 현장성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부가되는데 배우의 연기가 그것을 완성시킨다. 〈세기의 사나이〉는 배우 김동현의 재발견이라고 하여도 이견이 없을 만큼 그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그는 125년을 살아가며 갖은 심정적 고통을 다 겪는 보통사람 박덕배를 호소력 짙게 표현해냈다. 온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표정은 선량한 서민 그 자체였다. 서자로 태어나서 대단한 포부나 지식 없이 삶을 살아가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제 나름대로 헤쳐 나가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공연 내내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며 긴 서사를 홀로 이끌어 가다보면 자연히 힘에 부치는 순간들이 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박덕배가 삶을 살아내는 것에 부치는 순간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 작품이 장대한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재미난 무대양식과 함께 김동현 배우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근현대사의 면면들을 희극적으로 구성했기에 그는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희극성을 표현해야 했고, 그의 노력은 관객이 마지막까지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세기의 사나이〉는 작가, 연출, 배우, 스탭 모든 요소들이 능란하게 잘 어우러져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이었다.

연극에서도 대하의 장르가 탄생하길 기원한다면 욕심일까. 소설에는 대하소설이란 유형이 존재한다. 큰 강(大河)의 물줄기처럼 구성의 규모가 큰, 거대한 시대흐름을 배경으로 인물의 서사가 진행되는 형태다. 연극에서 대하의 유형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연극 무대는 정밀한 묘사보다 축약과 비약을 통해 긴 서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에 뛰어나다. 그런데 〈세기의 사나이〉는 어딘가 대하소설을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2시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 전체를 선형적인 시간구성으로 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해방기를 거쳐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전쟁까지,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한 인물의 일대기는 대하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장대한 서사를 완성시킨 〈세기의 사나이〉가 반갑게 느껴진다. 다만 한정된 시간 안에 근현대사를 모두 담아내려다보니 근대사에 비해 현대사가 많이 축약된 형편으로 보인다. 광복이후의 일대기가 다소 적은 비중으로 후반부에 급히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은 짧은 순간이지만 중요한 지점들을 지적한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을 한 인물이 차후 독립운동가로 둔갑되는데, 과거 역사에 대해 명징하게 청산하지 못하는 현재의 문제점을 꼬집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쳐지나가듯 지나가버리는 서사가 다소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연극은 배우, 스텝, 관객이라는 사람 중심의 현장 예술이기에 서로 인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 그 접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작여건 또한 상연시간에 영향을 미친다. 〈세기의 사나이〉 또한 이러한 물리적인 한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그러나 만약 작품에서 현대사 또한 고루 담아낼 수 있게 된다면, 관객은 과거와 자신의 현재가 맞닿는 지점에서 역사의 연속성과 동시대성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전체 근현대사를 모두 다루어 내는 역사극이라는 지점에서 이 작품의 미덕은 분명하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수많은 등장인물과 배경영상 보완제작 등이 재공연하는 데에 경제적 난관으로 작용하리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지점은 비단 〈세기의 사나이〉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창작산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품들이 주로 겪는 딜레마인 것이다.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하는 프로그램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 덩치가 커져버린 작품은 다시 공연되기 어려운 입장에 놓인다. 연극은 초연으로 등장하지만 재연으로 입지가 공고해지고 레퍼토리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창작산실 프로그램이 궁극적으로 국내 연극계의 양적·질적 효과를 기대하며 진행되는 프로그램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공공기관과 창작자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후엔 연극에서도 장막극과는 결이 다른, 대하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세기의 사나이〉와 같은 작품들이 창작산실 프로그램 이후에도 관객들과 쉽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사후 과정까지 안정적일 때 연극계도 풍성해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여성의 서사로 기록하다 ― 〈배소고지 이야기〉

전쟁은 늘 남성사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고 자연히 그 역사는 지금껏 남성의 것이었다. 연극사에서 전쟁의 참담한 실상을 여성서사로 그려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차범석의 〈산불〉이 있다. 그러나 〈산불〉 속 여성들은 지극히 여성들의 세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전쟁의 한복판에 서있지 않았다. 여러 매체에서 묘사되는 전쟁 속 여성인물들의 유형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은 늘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사실 실제로 현실이 그러했다. 남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전쟁은 물리력과 자본의 공급이 절대적인 세계였고, 자연히 여성과 노인, 아이는 전쟁의 세계에서 무용한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늘 이중으로 소외된 위치에 있었다. 더불어 전쟁은 남녀를 떠나 그 누구에게도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는다. 상황에 따른 강제된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전쟁이 남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부터 주체적 선택에서만이 윤리가 가능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전쟁이라는 지독한 전체주의의 결과물에 윤리적인 선택만이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배소고지 이야기〉는 그런 지점에서 두 가지를 사유하게 한다. 전쟁 속 여성의 역사를 가늠해보는 것과 전후에 남은 상처가 촉발시키는 윤리의식을 확인하는 것이다.

임실지역의 양민들은 1950년 7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이중의 학살을 당하고 만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하는 전후 과정, 뒤바뀐 전세로 들이닥친 국군으로 인해 지속해서 피해를 입는다. 그중에서도 1951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 배소고지에서는 피난민 200여명이 국군 11사단 소속 군인들로 인해 사살당하는 사건과 1951년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부흥광산 굴 속에 피신해 있던 400여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다. 수많은 이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였다는 것, 피해를 입은 이들이 선량한 주민들이었다는 점, 비인도적인 행태로 죽음을 종용하거나 살해당하였다는 점은 국민적 공분을 사기 마땅한 것이다. 〈배소고지 이야기〉는 이 임실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여성의 시각으로 구성했다. 작게는 배소고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넓게는 한국전쟁 속 여성의 이야기로 해석된다.

작품에는 김순희와 백소녀, 정입분, 박막동이 등장한다. 여성들은 격동의 전란 속에 휩쓸려 살아남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순희는 전쟁 속에서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버림받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위하여 어떻게든 남편을 뒤따르는 인물이다. 이후에도 남편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지만, 순희는 그런 남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해가며 딸을 위해 살아간다. 순희의 시누이 막동은 정신적으로 아픈, 그러나 그만큼 순수한 인물이다. 그녀는 가족이 이끌리는 대로 움직이지만 결국 늘그막에 순희를 찾아와 함께 가자고 어디론가 이끈다. 그녀의 연대의식은 늘 순희에게로 향해있었다. 그렇게 순희와 막동의 만남은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게 됨을 보여준다. 한편, 입분은 전란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연인을 위해 인민군 속에서 총을 잡았고, 이후 국군의 토벌작전 중 잡히고 말지만, 자신을 발견한 이와 결혼하여 경찰간부의 아내가 된다. 소녀는 인민군 치안대장에게 강제로 겁탈을 당하고 아내가 된다. 그 후 정서적으로 불안에 휩싸여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울분과 불안을 해소하는데, 결국 그것이 화가 되어 인민군 기지로 끌려와 총살을 당하고 만다. 극의 후반에서 소녀에게 총을 쏜 것은 다름 아닌 입분으로 밝혀진다.

작품은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입분의 금강혼식 하루 전날, 순희와 입분에게 소녀가 예전모습 그대로 찾아오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식이다. 현재와 과거가 혼재된 상태로 세 여성인물들의 전사가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펼쳐지는데, 이 과정에서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전쟁 속 여성들의 행위를 발견하도록 만들고 당시 이들의 위치는 어떠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입분은 지금껏 전쟁서사 속 여성 인물들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있다. 초반에 그녀는 강제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나 이후 적극적으로 전쟁터의 중심에 뛰어드는 인 물이다. 과감히 사람을 살해할 수도 있는 인물이며 전세가 역전됐을 땐 언제든 태도가 돌변할 수 있는 매우 기회주의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를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마지막까지 윤리성을 잃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입분이 소녀에게 총을 쏜 것은 인민군으로 인한 소녀의 내적 상처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보였기 때문이었으며, 순식간에 우익 진영으로 태도를 돌변한 것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여지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가해자로서의 행태를 지울 수는 없다. 결국 그녀는 죄의식으로 말을 잃는다. 경찰 간부의 아내가 된 후, 그녀 앞에 소녀를 겁탈했던 치안대장이 다른 신분으로 등장했을 때부터다. 서로를 알아보았으나 서로 모른척해야 했던 그 순간, 입분 은 지난날 자신의 행태에 대한 죄의식을 실감한다. 잊고자 했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참혹한 기억과 상처는 그녀에게 다시금 외면했던 윤리의식을 촉발시켰고 그 후 그녀는 입을 닫아버린다. 소녀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에야 입분은 서서히 말문을 여는데,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 가깝다.

〈배소고지 이야기〉는 현재의 평안함 이면에는 격동적인 역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현재의 순희는 입담 좋은 인물 같지만, 그것은 질곡의 세월이 만들어낸 결과다. 함께 어울리고자 달려드는 소녀의 가슴은 총상으로 휑하다. 평온해 보이는 입분은 죄의 식으로 말을 잃었었다. 이 모진 역설이 가득한 드라마는 전쟁의 처참한 민낯을 드러낸다. 특히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말이 없던 입분은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비극임을 사유하게 한다. 작품은 전쟁이 남긴 윤리의식을 조명하며 개인에게 전쟁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성질의 것임을 확인하게 한다.

입분은 상대적으로 전쟁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전쟁터에서 늘 배제되어 있는 인물이다. 입분이든 순희든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급작스럽게 남겨지는 건 서로 마찬가지다. 다만 입분은 전쟁 속에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기성의 전쟁서사 속에서 일관되게 묘사되어 온 수동적인 태도의 여성상과는 분명히 다른 양상을 띤다. 그렇기에 작품은 전쟁서사 속 여성인물들이 구축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배소고지 이야기〉는 무대 배경으로 영상을 활용하여 분위기를 전환하거나 고취시키곤 했다. 전체적으로 정겹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비극적 감정을 극화시킨 덕에, 관객은 서사와 인물의 감정에 쉽게 이입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의 고요함처럼, 해사한 모습으로 노래부르며 정겹게 어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관객은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연출은 작품의 드라마를 전달하는 데에 집중한 것으로 보이며, 그만큼 배우의 역할은 막중했다.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이 적은 현실 속에서, 여러 여성 배우가 입체적인 캐릭터를 맡아 분한다는 지점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분명하다. 백현주 배우는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지닌 채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강인하게 살아와야 했던 인물을 인상 깊게 소화해냈다. 박희은 배우의 경우 격동의 세월을 겪고서 말을 잃고 찾는 인물을 표현해야 했는데 크게 위화감 없이 그 과정을 차분하게 연기하였다. 백현주 배우와 박희은 배우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고령의 인물을 연기해야 했기에 물질적으로 체감되는, 나이에서 오는 한계는 있었으나, 온전히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두 인물의 이미지는 충분히 표현되고 있었다. 황세원 배우의 경우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천진난만한, 그래서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소녀의 성격을 잘 표현해내고 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배우들의 열연은 작품의 흡입력을 높여주었다.

이 작품이 관객의 감정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이유는, 그동안 전쟁에 대한 언어를 얻지 못했던 여성 인물들에게 언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전쟁터로 떠난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남편을 걱정하는 목소리, 매개나 도구로서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와 목소리로 전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 여성의 언어로 전쟁에 대한 참상을 그려내는 동시에 상처 입은 여성인물들의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언어로 모든 것을 고백한 이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힘없이 남겨졌던 노인의 언어와 이름 없이 묻혀야 했던 어린아이의 언어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서로가 인식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이 또 다른 형태의 위로가 될 수도 있지는 않을지 작품은 관객에게 묻고 있었다.

 

변화하는 역사극의 형태

〈가미카제 아리랑〉과 〈세기의 사나이〉, 〈배소고지 이야기〉의 특징들은 변화하는 역사극에 대한 징후를 가늠하게 한다. 〈가미카제 아리랑〉은 역사적 사실 전달과 온화하고 서정적인 드라마 구성이 눈에 띈다면, 〈세기의 사나이〉는 굵직한 근현대사의 맥락 전체를 다루어 내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반면, 〈배소고지 이야기〉의 경우는 특정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극화하되 역사극에 여성주의적 시각이 중요함을 노정하고 있다. 역사, 특히 전쟁사에 있어서 여성의 시각이 매우 희소한 편인데 그런 지점에서 〈배소고지 이야기〉는 앞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정리하는 데에 활용될 여성주의적 시각의 신호탄의 역할을 한다.

이 작품들은 역사극이 마냥 무거운 것은 아니며, 관객에게 필수적으로 강력한 역사의식을 고취시켜야 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창작자가 특정한 인물을 재해석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관객은 ‘연극’을 만나러 극장을 찾는 것이다. 역사의식은 그 다음에 뒤따라온다. 현대에 나타나는 역사극의 변모과정은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감지된다. 창작자들의 관심사는 다양해지고 역사극에 대한 접근방식 또한 변화하는 중이다. 이 변화의 과정은 어떠한 의미로 귀결될까. 정의는 사후事後에 이루어지므로, 우선 흥미로운 인내의 시간이 요구되는 바다. 그 과정에서 속속히 등장할 역사극들의 면모가 주목된다.

 

 


1 김성희, 「한국 역사극의 기원과 정착―역사소설/야담과의 교섭과 담론적 성격을중심으로」, 『드라마 연구』 32권 0호, 한국드라마학회, 2010. 6, 67쪽


장윤정 1984년 출생,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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