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쿨투라 신인상 음악평론 부문 당선작] 공포와 발견의 시간구조: 영화 〈싸인〉의 음악
[제9회 쿨투라 신인상 음악평론 부문 당선작] 공포와 발견의 시간구조: 영화 〈싸인〉의 음악
  • 서영호
  • 승인 2016.03.3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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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안개」는 절망과 모호함의 이미지로 시의 모든 행간에 켜켜이 깔려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우리를 앞이 안 보이는 샛강의 안개 속으로 몰아넣는다. 아마 그의 안개는 선배작가 김승옥의 「무진기행」 속 안개의 변주 혹은 패러디일지도 모른다. 고향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맨처음 떠올린 것은 고향의 명산물인 안개였다. 그가 후배를 만나고 여인을 만나고 미친 여자를 만나고 자살한 시체를 만나고 다시 귀경하는 동안 그가 결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혼돈과 무질서, 현실과 꿈에 대한 절망과 권태는 결국 이야기의 전편을 휘감고 도는 안개에 의해 구현된다. 이 은유의 안개는 소설의 시작과 끝을 지배하는 하나의 담론으로 전이된다.

모티프의 반복과 변주는 문학에서뿐 아니라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서도 다양하게 수행된다. 김환기는 수없이 많은 달과 해를 다르게 그렸으며 장욱진은 그만큼의 어린아이와 가로수를 병렬시켰고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일본 쪽을 바라보며 벌거벗은 아이들과 가재를 겹쳐 놓았다. 반 고흐는 색이 다른 수많은 해바라기를, 폴 고갱은 수면 위의 연꽃을 연속, 반복적으로 그렸다. 그리움과 순수, 고독과 방황의 원초적 정서들이 이처럼 반복되고 변형되어 캔버스에 펼쳐졌다.

음악에서의 이 반복과 변주는 더욱 습관적이다. 가령 〈전원 교향곡〉에서 무려 72회나 계속되는 반복음형과 느린 화성리듬은 베토벤이 제시한 자연의 무한성과 그 평화로움이었다. 암시와 변형이 압도적인 바그너에 오면 변형 없이 순수하게 암시적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맥락에 따라 변형된 〈지크프리트〉의 호른소리, 변화됨으로써 성숙하고 영웅적인 〈신들의 황혼〉과 만나게 된다. 이 모든 화성들은 현란한 변주에 의한 것이었으며, 즉흥적이면서 반복적인 재즈의 어떤 리듬은 이미 쓰였던 화음에 부연하거나 새것을 끌어내거나 회귀함으로써 새로운 정서를 만들어 간다. 박자와 멜로디와 템포가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반복되고 변주됨으로써 비로소 그 기능이 수행된다.

예술작품 속에서의 반복과 변주는 이미 기법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것은 오래되었지만 새롭다. 그 정서는 되풀이됨으로써 강화되고 바뀌어가면서 심화된다. 이러한 언어나 소리나 이미지들의 반복과 변환은 낯익게 혹은 지루하게 다가오다가 마침내 낯설고 경이로운 세계—깨달음, 화해, 속죄, 환희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영화는 예술의 한 갈래로서보다는 사회적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과학적, 예술적, 산업적 특성과 요구가 만나는 대표적 장르이며 영상의 사회적 성격은 어떤 다른 예술 장르보다도 강렬하다. 음악이 영상에 가담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예술적 교합이며 그 상호성과 독자성 또한 그만큼 중요해졌다.

영화 〈싸인Signs〉은 멜 깁슨과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나이트 샤말란M. Night Shyamalan감독의 2002년 작품이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벅스 카운티에 있는 그레이엄 헤스의 농장주택은 이 영화의 공포와 미스터리의 무대이다. 그레이엄은 끔직한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실의와 절망에 빠진 나날을 보내는데, 그는 이미 신부복을 벗었으며 상처 속의 가족들은 삶의 방향을 잃은 듯 혼돈 속의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이 위기의 그레이엄 가족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과 사고와 징후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아들의 천식, 야구선수인 동생의 무기력, 마실 수 없는 물맛,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쓰러지는 농장의 옥수수, 창가에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지는 정체 없는 얼굴…이 의문의 사건들은 옥수수 밭에 펼쳐진 미스터리 서클에 대한 논란에서 불안의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이 의문과 공포의 서사는 신비와 긴장, 두려움과 안도의 음악을 배면으로 하여 전개된다, 이 드라마는 영화와 음악의 독자성이 어떻게 상호성으로 배합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James Newton Howard는 오늘의 미국 영화음악의 대표적 인물이다. 1980년대부터 할리우드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그는 팝 음악계와 정통 고전 음악 사이를 두루 섭렵하면서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한 때 엘튼 존 밴드의 키보드 연주자와 객원 지휘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영화계와 방송계에서 작곡, 프로듀싱, 작사, 키보드 연주 등 다방면에 걸쳐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의 예술적 감각은 이미 100여편을 넘어선 작품의 음악세계에서 입증되고 있다. 〈식스 센스〉, 〈언브레이커블〉, 〈싸인〉, 〈해프닝〉, 〈라스트 에어벤더〉, 〈애프터 어스〉 등은 그가 파트너인 나이트 샤말란 감독과 함께한 대표적 작품들이다.

영화 속 음악은 시나리오가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이나 정황의 메시지를 심화·확대시켜 주는 영화 속의 또 하나의 특수 언어이다. 특히 현대 영화음악에서 ‘반복’이라는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기법은 가장 핵심적이고 대표적인 기법중 하나이다. 이른바 그 영화의 테마 멜로디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음악 테마는 드라마의 전체 정서를 꿰뚫을 수 있는 대표성을 지닌 음악적 주제어이다. 그리고 이 테마는 영화의 곳곳에서 반복되면서 변주, 강조 등의 장치를 통해 인물의 내적 심리 표현 등 영화음악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스릴러, 공포 장르의 영화는 일반적으로 공포와 긴장감을 주는 얼마만큼의  대상이 있고 그것이 다양한 시점에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스토리적 구성이 많기에 여기에서의 테마 음악의 반복과 변주는 더 주요 기법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오랜 파트너인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싸인〉의 음악은 이른바 메인 테마의 부단한 반복과 변주라는 영화음악 기법의 정석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는 전체 영화에서 쓰인 음악의 대부분을 기본 메인 테마의 반복과 그것의 변주로 이끌어 가고 있으면서도 반복이라는 기법이 가질 수 있는 심미적 한계를 능숙한 변주와 재해석 등의 과정으로 주제에 가담하고 있다.

〈싸인〉은 외계인의 지구 출현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일종의 SF 스릴러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외계인의 지구공격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장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화에서의 외계인의 등장은 다소 알레고리적이다. 우리에게 오래전부터 지구인이 아닌 다른 행성의 인간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공포와 신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과학적 근거가 없거나 논란의 대상이었던 외계인은 그 존재를 인정했다가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던 중세적 의문 속으로 우리를 다시 안내한다. 설정된 외계인은 생물학적 근거와 예상에서보다는 우리의 상상과 공상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기에 거기에서 받게 되는 암시나 계시는 더 황홀할 수밖에 없다. 어떤 종교지도자나 우월적 존재보다도 외계인의 존재는 낯설지만 경이로운 심리 기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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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편을 통하여 스코어가 사용된 장면의 대략 70%이상이 모두 단 두 가지 메인 테마에서 발전, 변주된 곡들이다. 두 가지 메인 테마를 각각 테마1 과 테마2로 지칭하기로 할 때, 그 중에서도 테마1이 비율적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각 테마들의 구체적인 사용 빈도수는 총 30회 가운데 테마1이 19회로 테마2, 2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을 악보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테마 1)

영화의 시작 이후 미스터리 서클이 발견된 첫날 경찰관이 죽은 개에서 농기구를 빼내는 시점에 처음 등장하는 테마1의 형태를 테마1의 원형으로, 그리고 그 외에 장면에서 사용된 것들을 반복과 변주로 간주한다.

테마1은 일종의 미니멀리즘 음악1)적 어법에 기반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일정하게 반복되는 단 세 개의 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멜로디는 없다. 거기에는 강약도 없고 기교나 장식도 없다. 단지 일정하게 주어진 세 개의 음이 일정한 리듬적 패턴으로 반복될 뿐이다. 이 세 개의 음들은 분산화음의 반복 형태를 띠고 있는데 4개의 연음에서 하나가 빠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세 개의 음들은 첫 음과 두 번째 음이 완전 5도의 간격을,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음이 단2도의 간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음정 간격이 제공하는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맨처음 음과 두 번째 음의 음정이 완전화음이어서 화성이 메이저와 마이너 사이에서 변화를 보여도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뒷받침해주는 화성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심상의 표현이 가능한데, 테마1에서의 기본적 화성은 메이저로 시작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음과 세 번째 음의 음정이 단2도를 이루고 있는데 테마 1의 화성이 기본적으로 주로 메이저인 상황에서 두, 세 번째 음이 5도 음과 b6도의 단2도 음정을 이룸으로써 의문스럽고 어둡고 불안한 정황을 강화해 준다.

리듬의 배열로 보면 일정한 4연음에서 마지막 하나가 빠진 구조인데 이 4연음의 구조가 정박으로 반복되면서 주로 감정의 고조를 표현해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악기는 피아노가 담당하며 이후 변주에 따라서는 플룻, 브라스나 현으로의 대체나 더블링 기법2)으로 긴박함과 다이나믹한 정조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듯 테마1은 이 영화의 전체적인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무지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 불안함, 긴장감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형태로 극의 전반에서 되풀이되고 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테마1은 주로 외계인의 존재와 등장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사용되고 있다.

(테마 2)

테마2는 좀 더 차분하고 느린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여전히 의문, 불안의 정서를 표출하도록 돕고 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거나 미스테리한 일들에 대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영화 초반 미스터리 서클이 처음으로 발견된 장면에서의 음악을 테마2의 원형으로 설정했다. 테마2의 기본 형태는 화성적으로는 3도음이 메이저이지만 6도음이 플랫되어 체감 상으로는 메이저와 마이너가 혼재된 느낌을 준다. 반복되면서 탑 멜로디가 아래위로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이 주는 신비감, 공포감,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갖는 불안 의문의 이미지를 표현해 준다. 화성은 이후에 변주에 따라 3도음 역시 메이저에서 마이너로 변환을 취하기도 한다.

(암시)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음악이 가장 격앙, 고조되어 있다면 그 만큼의 긴장감과 현란함을 담고 있는 부분이 오프닝의 음악이다. 절정부분의 음악은 오프닝 음악의 변주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오프닝 음악은 영화의 극적 위기의 절정의 순간을 암시sign하고 있는 듯하다.

오프닝 음악은 이후에 나올 테마1의 변주로 본다. 변주가 먼저 등장하는 형식이다. 음악은 영화의 제목이 나오는 장면에 맞추어 시작되는데 멜로디의 첫 번째 음이 A에서 시작하고 첫 번째 음과 두 번째 음의 음정이 완전5도에서 완전4도로 변형되었다.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도 피아노가 아니라 현과 플룻이 번갈아 연주한다. 기본 테마1 보다 훨씬 긴박하고 강한 느낌을 표현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음정과 템포의 변화뿐만 아니라 16분 음표로 긴박하게 연주되는 현의 추가와 단2도로 불협화음을 넣어주는 현, 브라스 등에 의해 그 효과가 배가되고 있다. 이 불협화음은 긴장감을 유발하는 불안정한 울림으로 간주하여 그 사용에 제한이 가해졌던 고전적 관습을 자연스럽게 깨트리고 있다.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에서 시도되어 ‘불협화음’이라는 부제가 붙기 시작하였지만 이 선율이 주는 음산한 느낌은 자주 애용된다. 모리스 라벨이나 드뷔시 등의 낭만파 음악에서 회화적 이미지로 사용된 이 음산하고 우울한 분위기는 이후 스트라빈스키나 힌데미트에서 정점을 이루지만, 여기에 사용된 하워드의 불협화음은 아직 사건이 진행되거나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극의 전개 분위기에 대한 징후로 예고되고 있다.

(의혹)
(의혹)

인간만큼의, 혹은 인간을 넘어서는 고등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존재라는 가능성은 늘 기대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지 아니면 적이 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외계인은 출현자체도 확실시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거니와 그들의 지구방문 목적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다.

아들이 가지고 있던 아이들용 무전기에 외계인의 신호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잡히기 시작하면서 테마1의 변주는 시작된다. 이것은 곧 그 신호가 외계인의 신호임을 암시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테마1 의 멜로디가 Bb 마이너 조성에서 피아노에 의해 변주되어 시작되는데, 하지만 여기서의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무조건적인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아니다. 거기에는 호기심과 자신들의 추정이 맞을 것이라는 아이들의 일종의 기대감도 섞여있는데 이것을 테마1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음의 음정을 불안하고 어두웠던 단2도에서 단3도로 변화시킴으로써 표현해냈다.

아들이 무전기를 움직여 더 명확한 신호를 잡아내는 장면으로의 전환에서는 F# 마이너로 전조시키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음의 음정을 이후 완전 4도까지 확장시키며 아래 화성이 F#m에서 B/D#, C#/F으로 맞물려 변화해주면서 일시적으로는 주인공들의 호기심의 충족과 기대에 대한 부흥이라는 일종의 만족감의 심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공포)
(공포)

다음으로, 주인공인 그레이엄이 옥수수 밭에서 밭 사이로 숨는 외계인의 신체 일부를 직접 목격하는 장면에서 테마1이 기본형태인 C조에서 시작되고 화성은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간다.

여러가지 정황들로만 짐작했던 미지의 존재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서 놀라고 두려운 주인공이 집으로 달려 들어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선동꾼들의 거짓과 조작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게 된 그레이엄은 충격과 공포로 잠시 자신이 취해야 할 다음 행동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 한다. 여기서 잠시 생각에 빠진 그의 모습과 더불어 메인 테마1은 B 조로 전조될 뿐만 아니라 첫 번째와 두 번째 음이 증4도로 바뀌는데 이때의 F와 F#음은 근음인 B음을 기준으로 리디안 모드3)의 느낌을 가져오고 이어서 A6 코드가 번갈아 나오며 그가 느끼는 감정이 무조건적인 공포라기보다는 일말의 신기함,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의 감정 등이 함께 뒤섞여 일어나고 있음을 디테일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하지만 테마는 이내 원형인 Gm 조로 돌아오면서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이것은 외계인의 존재 사실이 결국은 자신들에게 어떤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돌아온 그레이엄의 심리이다.

(혼돈)
(혼돈)

그레이엄과 동생 머렐과의 대화 장면4)은 영화에서 매주 중요한 국면 중 하나이다. 이 대화 속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영화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레이엄은 세상에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어느 쪽인지 확실히 대답하진 않는다. 이 장면에는 테마2가 변주되어 사용되는데 기본 테마2가 그대로 흘러가는 가운데 목관악기가 일정의 멜로디를 추가로 연주한다. 테마2 는 사람이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일들을 겪으며 떠올리게 되는 일종의 철학적인 의문들의 테마이다. 그것은 항상 정답이 없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인간의 오래된 의문이기도 할 것이다.

음악 안의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눈다면 그 첫 번째 가름대는 3도 음이 될 것이다. 이 3도 음이 내츄렬이냐 플랫 되느냐에 따라 밝고 희망찬 메이저가 될 것이냐 어둡고 음울한 마이너가 될 것이냐가 갈리기 때문이다. 거기에 6도 음의 플랫 여부는 보다 디테일한 심상을 표현해 줄 수 있는데 완연한 메이저나 마이너가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분법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정서를 표현하는 데는 테마2의 화성 구조가 적절한 선택이다. 테마2의 화성구조는 6도 음이 플랫 된 가운데 3도 음이 메이저와 마이너 사이를 오가며 불확실성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아내와의 마지막 대화5) 회상 후 해결책을 찾는 그레이엄의 모습은 이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아내와의 마지막 대화의 순간이 떠오른 그레이엄은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의 마지막 발언이 일종의 계시였음을 직감하고 동생에게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외계인을 제압하도록 한다. 회상 장면에서 잠시 잠잠해지고 분위기가 전환되었던 음악은 그레이엄의 사고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에 맞춰 다시 메인테마1을 바탕으로 하는 긴박한 음악으로 되돌아온다. 동생 머렐이 야구 방망이를 집어드는 순간으로 접어들면 음악은 이제 테마1을 각각 다른 악기가 각각 다른 멜로디를 동시에 혹은 번갈아 가며 연주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음의 음정도 단3도로 변주가 이어진다. 이러한 어지러움과 현란함은 극적 위기감을 한껏 고취시킨다. 이렇게 현악기와 하프, 플룻 등이 테마1의 변주를 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브라스 파트가 저음에서 대선을 힘 있게 연주하여 위기가 절정에 다다랐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외계인의 제압과정에서 그간의 모든 일이 절대자에 의한 계획된 일임을 직감하는 그레이엄과 가족들의 장면에서는 절정에 치닫던 음악이 머렐의 야구 방망이에 쓰러진 외계인이 자신에게 쏟아진 물에 의해 피부가 녹는 치명적 약점이 드러나는 장면에 이르러 C#메이져 화음으로 밝고 명쾌하게 수렴된다. 여기서는 브라스가 저음부에서 메이저 3화음을 힘 있고 다소 자신 있게 연주해주고 곧이어 테마1의 멜로디가 플룻에 의해 연주된다. 화음악기들의 화성은 곧 마이너로 바뀌며 이전과 같은 변주형태를 보이다가 D#/C# 코드로 리디안의 느낌 위에 테마가 흘러간다. 그동안의 이 가족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의문스러웠던 행동과 사건 하나하나가 결국 이 순간 외계인을 무찌르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계획된 시나리오였으며 이제 어지러웠던 퍼즐이 하나둘씩 맞아 들어감을 느끼는 그레이엄과 가족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저음부에서 연주되는 브라스 파트의 힘있는 화음부는 이제 이 모든 일들이 계획된 것이었음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제는 그 믿음에 의존해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는 심리적 변화를 표현해준다.

 이제 외계인과의 마지막 한판을 앞둔 장면에서는 다시 F 마이너 조에서 테마1이 변주된다. 코드는 bⅥ 코드에서 bⅦ,Ⅰm로 상행하는 진행을 보이고,  멜로디는 첫 번째 두 번째 음정은 완전4도,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음정이 장2도로 확장되어 확신에 차고 결연한 가족들의 심리를 나타내준다. 테마1의 세 번째 음은 5도 음인 C에서 Db , Eb 으로 상행했다가 하행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뒤이어 베이스 라인도 F에서 B, C로 움직이며 이제까지의 테마1의 변주를 통틀어 그리고 영화음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다이나믹한 화성적 전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드디어 위기가 해결의 직전단계로까지 절정에 이르렀음을 나타내준다.

엔딩에 이르기까지 아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외계인은 이제 처치되어서 위협의 존재는 사라진 상황인데 다시 테마1이 그것이 처음으로 등장했던 장면에서처럼 Cm 조에서 흘러나온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그레이엄은 아들의 폐가 지병인 천식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에 독가스가 흡입되지 않아서 아이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즉 아들이 천식에 걸린 것도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믿음까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테마1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지금까지 주로 외계인의 존재와 그에 대한 두려움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일관되게 사용되었던 테마1이 어쩌면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을 주관한 신의 일종의 계시Sign로서의 테마였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외계인의 존재와 등장 자체가 이 가족에게 믿음을 회복시키려는 신의 계획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그레이엄이 다시 신부의 삶으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엔딩 장면에까지 이 테마의 기본형태는 그 화성적 배경을 달리 해가며 변주되어 음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외계인의 테마가 아닌 것이다.

아들이 극적으로 깨어나면서부터 테마1의 멜로디는 곧 G장조에서의 6, 2, 3도 음으로 변형되어 매우 밝은 멜로디로 변하고 화성도 ⅠM에서 Ⅱ/Ⅰ로 긍정적이고 신비로운 정서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제부터 전개되는 멜로디의 변주는 화성변화의 기반 위에서 긍정의 에너지, 안정된 마음, 깨달음으로의 전개를 표현해주고 있고 이는 곧 자신의 삶에서 믿음이라는 요소를 되찾은 주인공의 자기인식의 과정이라 있겠다. 낯설고 두려운 화성이 화해와 경이로움의 사운드로 전이되어 있었던 것이다.          

 

3

이 영화의 중심은 끔찍한 사고로 가족 구성원을 잃고 살아가는 한 가족의  방황과 절망적 상황이다. 제목으로 쓰인 싸인의 의미는 1차적으로는 외계인들이 남겨놓은 신호로서의 ‘미스터리 서클’을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들의 존재와 삶의 조건이 어떤 절대자의 구도 안에 있다는 암시와 그 실마리로서의 징조와 계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이 가족이 외계인의 침투 과정을 겪어나가며 마침내 가족 상호 간의 소통의 과정을 통해 다시금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회복한다는 하나의 종교적 이니시에이션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싸인〉의 음악은 전체적인 스토리를 관통하고 정서를 대표할 수 있는 테마의 설정에서 일종의 주제어처럼 영화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마는 반복과 변주라는 장치를 통해 영화 전반에 배치됨으로써 영화에 일관된 주제 의식과 결을 부여할 수 있게 하였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는 이 영화에서 단 두 개의 음악적 테마로 전체 스코어의 70%이상을 끌어내었다. 그리고  각각의 테마들은 영화의 각 장면에 맞추어 멜로디, 화성, 템포, 악기 구성 등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반복, 변주되어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와 극적 몰입도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압도적으로 쓰인 테마1은 그 구조적 특징상 불안, 의문, 두려움이라는 영화 전반에 걸친 심리적 정서를 대표하기에 적절한 구조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화성적 배경이 바뀌었을 때는 신비감과 공포에서 밝고 신념에 찬 긍정적인 심상으로 이동해 가는 시간 구조를 구현했다.

그것은 제임스 뉴튼 하워드가 제시한 테마의 적절한 반복과 변주를 통해 극중의 인물들로 하여금 하나의 발견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발견‘이란 무지의 세계에서 지의 세계로 이동하는 주인공의 운명적 전환(아리스토텔레스적 발견)이면서 동시에 그레이엄 일가의 생의 빛나는 계시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연속성과 반복성과 이동성이라는 시간예술의 특성을 조화시킨, 제임스 뉴튼 하워드에 의해 창조된 은유적 리듬에 의해서였다.

영화음악의 덕목 혹은 그 융합방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음악이 영화를 철저하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에 대한 확인이다. 류이치 사카모도가 자신이 작곡한 영화음악이 영상보다 더 좋았다는 평가에 경악했을 때, 영화의 장면에 뒤따라야 할 자신의 음악이 장면에 앞서서 독자적으로 빛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을 때, 우리는 그의 영화음악의 본질과 만나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또한  영화음악의 ‘불가청성의 원리’에도 동의해야 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음악은 들리지만 그것은 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이 역설의 원리는 중요하다. 여기서 논의한 제임스 뉴튼 하워드는 이 원리를 과연 얼마나 잘 수행하였는가에 그의 음악적 성취를 보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는 장면과 장면의 연속이지 음악과 음악의 연속은 아니므로 영화 속 음악들은 우리들이 마시는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되지만 의식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싸인〉의 음악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적 주제어의 설정과 그것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영화적이며 음악적인 성취를 동시에 보여준 사례였다.

 

 


1) 1960년대 초반 단순한 화성과 반복되는 리듬을 사용하는 록음악의 기본아이디어를 빌려오면서 시작된 현대음악의 한 사조. 기본을 중시하고 기교와 장식을 지양하며 반복과 지속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후 대중음악의 테크노나 트랜스 음악 장르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필립 글래스 Philip Galss, 스티브 라이히 Steve Reich 등이 있다.
2) 같은 멜로디를 두 개 이상의 악기가 똑같이 연주하는 기법
3)건반 악기의 흰 건반 위에서 F부터 한 옥타브 위의 F음까지를 쳤을 때 얻을 수 있는 스케일. 일반적인 메이저스케일(도레미파솔라시도)과 비교했을 때 파 음이 반음 샵되는 특징을 지닌다.
4)머렐: 옛날엔 희망적인 말만 했잖아. 위로하는 말 좀 해봐
그레이엄: 사람들은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행운을 체험해본 그룹 1은 그걸 운이나 우연 이상의 어떤 징조라고 받아들여, 하늘에서 그들을 지켜주는 절대자가 있다고 믿는거지. 그룹2는 운을 운이라고만 믿고 굴러온 기회라고 생각해. 그룹2는 멕시코 상공의 빛을 의심의 눈으로 지켜봐. 반신반의 한단 뜻이야. 나쁠수도 좋을 수도 잇는 기호. 그러나 내심으론 어떤 일이 생겨도 신보단 자신을 더 믿어. 하지만 그 믿음엔 공포가 가득해. 그룹2의 사람도 많지만 그룹1의 사람도 수없이 많아. 그룹1은 그런 빛을 보면서 거기에서 기적을 기대해. 그리고 내심 어떤 일이 생기든 자신드릉ㄹ 도와줄 절대자를 기대해. 그들의 믿음엔 희망이 가득해 너 자신은 어떤 쪽이야? 기적이나 징조를 믿는 쪽이야? 아니면 운이라고 비웃는 쪽이야? 이런 질문은 어떨까? 모든 건 계획되어 있는 걸까?
5) 아내: 이건 예정된 사고 같아
그레이엄: 아파?
아내: 감각이 없어
그레이엄: 그래..
아내: 모건한테 열심히 놀라고 해줘. 성적 나쁘면 어때.
그레이엄: 알았어..
아내: 그레이엄한테는...
그레이엄: 나 여기 있잖아
아내: 그레이엄 한테는 끝까지... 노려보라고 해줘. 머렐한테는 잘 휘두르라고 하고.


서영호 대학교 때부터 본격 음악에 몰두하여 한동안은 재즈를 탐구하고 이후 팝음악의 영역에서 건반연주자, 싱어송라이터, 편곡자로 활동 중. 현재 ‘원펀치’와 ‘오지은서영호’ 두 개의 듀오 팀에서 활동 중.

 

 

* 《쿨투라》 2016년 봄호(통권 4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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