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 세계를 감각하는 법: 두 편의 신체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템플〉을 통해
[제18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 세계를 감각하는 법: 두 편의 신체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템플〉을 통해
  • 박진서
  • 승인 2024.01.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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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1

언어의 사용은 ‘인간다움’의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동물도 나름의 의사소통 체계를 갖는다는 동물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있지만,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통용되는 표준화된 언어체계는 인간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정의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언어에 대해 인류가 가져온 ‘자부심’은 언어를 매개로 한 추상적인 사유행위를 고급스럽고 우월한 행위로 칭송하게 했고, 반면 언어를 매개하지 않은 신체적 행위들은 비교적 열위에 가져다 놓았다.

이러한 우열은 특히 예술의 역사에서 두드러진다. 플라톤이 ‘이데아idea’ 개념을 제시한 이래로, 상당히 오랜 기간 예술 장르 사이에는 차등이 존재했다. 시와 문학처럼 언어를 매개로 한 예술들은 고귀하게 여겨졌지만, 건축이나 조각과 같이 신체적 노동에 가까운 행위를 요구하는 예술은 평가절하되었다. 현대에 와서 그 구분이 점차 흐릿해졌다고는 하나, ‘언어성’을 기준으로 한 차등적인 사고가 오랜 기간 인류의 예술관을 지배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연극은 이러한 ‘언어성’이 가장 극대화된 공연예술이다. 기본적으로 연극은 희곡을 토대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서로 다른 창작자들의 협업 또한 문자로 기록된 희곡이라는 텍스트에 기반한다. 공연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동일한 텍스트를 보며 서로 다른 생각과 배경 속에서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간다. 각자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가 충돌할 때 텍스트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은 작품을 완성하는 토대가 된다. 언어적 텍스트가 가진 이러한 절대적 지위로 인해 연극에서도 언어는 상당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때로는 텍스트에 대한 과도한 숭배가 동시대성을 반영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공연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신체연극physical theatre은 이러한 언어성에서 한 발짝 물러나 언어로부터의 ‘우월함’에 가려진 ‘비언어적’ 세계를 탐색하려는 움직임 중 하나다. 연극 혹은 무용이 가진 기존의 형식을 해체하며, 몸짓을 통해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탈피해 새로운 몸짓언어를 개발하는 실천으로 볼 수 있다.2 언어적 세계로 포착하지 못했던 것을 무대 위에서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발견하고, 이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소통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신체연극은 형식적 측면은 물론 내용적 측면에서도 연극의 경계와 외연을 점차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초연 이후 여러 번의 재공연을 거듭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하고 있는 두 편의 신체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템플〉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치매에 걸린 이의 기억을, 〈템플〉은 자폐인이자 동물학자인 템플 그랜딘의 성장과정을 신체연극의 형태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치매와 자폐라는, 소위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며 비난과 혐오에 시달려 온 이들이 세계를 감각하는 법에 주목한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며 사고하지만, 언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회적 틀 속에서 ‘지능이 낮다’거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재단되며 언어적 의사소통에 참여조차 하지 못한다.

신체연극의 외연은 이처럼 ‘온전치 못한’ 이들의 세계로도 확장된다. 언어 중심의 세계 속에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사고와 감각이 무대에 오른다. 그렇게 관객들은 ‘온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배제되어 왔던 이들의 세계를 ‘온전히’ 마주하기 시작한다.

 

움직임으로 가득 찬 기억이라는 공간: 〈네이처 오브 포겟팅〉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톰의 55번째 생일파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치매에 걸린 톰은 방금 전에 들은 단순한 문장을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다. ‘파티에서 입을 자켓은 행거 맨 끝에 걸려있고, 빨간색 넥타이는 자켓 주머니에 있다’고 말하는 딸 소피의 가벼운 부탁조차 그에게는 쉽지 않다. 온전한 문장을 기억하지 못한 채 ‘행거 맨 끝’이나 ‘넥타이’, ‘빨간색’, ‘주머니’라는 파편들만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렇게 소피가 준비해 둔 옷을 찾지 못한 채 옷장을 헤집어 버리던 그는 학창시절 입었던 교복 자켓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자켓을 걸쳐입자, 치매로 인해 사라져 가는 기억의 공백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들은 전혀 서사적이거나 선형적이지 않다. 단편적인 장면들이 끊임없이 삽입되며 그 순서 또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학창시절의 기억으로 시작했지만, 다음 장면은 배우자인 이자벨라와의 결혼식 피로연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탔던 등굣길이 이어지고, 그 다음 장면은 톰과 이자벨라의 딸인 소피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으로 연결되는 식이다. 그리고 비선형적으로 이어지는 기억들을 반복해서 가로막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바로 차를 타고 가던 중 이자벨라와 말싸움을 하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날의 기억이다. 톰은 과거를 회상하다가도 교통사고와 함께 기억을 잃어가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과거에 행복했던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치매환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한 기억들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언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언어 없이 움직임으로만 설명된다. 때때로 배우들이 입으로 대사를 발화하기는 하지만, 음악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릴 뿐이고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음성 또한 하나의 문장이나 대화라기보다는 파편이 되어 톰에게 전해진다. 톰의 기억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언어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맞추어 연주되는 라이브 음악이다. 무대 뒤편에 위치한 두 명의 연주자는 실시간으로 배우들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시각적인 움직임을 청각적인 경험으로 확장해간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언어적 대사의 도움 없이도 톰의 서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톰의 기억 속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기억을 공간화한다. 무대는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무대 중앙부를 가득 채우는 크기로 한 단 높게 올라와 있는 정사각형의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그 주변을 둘러싼 무대의 바닥이다. (이것을 각각 온스테이지on-stage와 오프스테이지off-stage로 칭하기로 하자.) 온스테이지는 톰의 기억 속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기억들이 움직임을 통한 이미지로 전달된다. 반면 오프스테이지는 치매를 앓고 있는 현실의 톰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곳에서의 톰은 딸 소피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는 치매환자로 살아간다.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찬 온스테이지와 정적인 현실을 담아낸 오프스테이지는 뚜렷하게 대조되며 톰의 기억 속 비언어적 세계와 현실의 언어적 세계의 간극을 보여준다.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더라도 현실에서는 쉬운 부탁이나 문장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등 치매환자로써 겪는 언어적 문제로 인한 좌절이 극명하게 시각화된다.

하지만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이러한 좌절을 넘어 비언어적 세계에서 톰이 느끼는 환희까지 담아낸다. 극에 말미에 가면, 온스테이지에만 존재했던 배우들의 역동적인 몸짓이 오프스테이지로 점차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프스테이지를 둘러싸고 있던 행거에 걸린 옷걸이에서 톰의 옷들을 공중으로 집어던지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점차 격렬해지고 무대는 온통 널브러진 옷가지들로 가득하다. 사실, 기존 미디어에서 치매환자가 옷장을 뒤엎고 난장판을 만드는 모습은 치매로 인한 주변인들의 고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이것을 환희와 그리움의 움직임으로 승화시킨다. 언어적 세계에서는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난장판이, 언어적 사고를 걷어낸 움직임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이렇듯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언어적 소통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치매환자들의 기억과 정신세계를 탐색해나간다. 또한 온스테이지와 오프스테이지라는 공간적 대비와 그 공간들을 채워나가는 움직임을 통해 이것을 시각화한다. 비언어로 가득한 무대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미지를 통해 온전히 감각하기: 〈템플〉

〈템플〉은 엄밀한 의미의 신체연극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언어가 최소화된 채 몸짓만으로 내용의 대부분을 전달하는 것이 신체연극의 특징인데, 〈템플〉의 경우에는 배우들이 전달하는 대사량도 상당하고 템플 그랜딘이라는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한 선형적 전개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템플〉은 배우들의 신체적 움직임의 활용을 극대화한 신체연극에 속한다. 배우들은 대사와 함께 끊임없이 자신의 몸짓을 극대화하고, 대사만으로는 전달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미지와 언어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템플 그랜딘은 어린 시절부터 자폐를 안고 살아왔다. 하지만 자폐가 소아정신분열증의 일부로 여겨졌던 그의 어린 시절, 그는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로 여겨졌다. 의사들은 그것을 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 자폐인의 삶의 양식이나 사고방식, 의사소통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병이라거나, 성에 조숙해 성도착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는 식의 비난만을 진단으로 내세운다. 극 중 템플의 어머니는 당시의 정신의학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언어에 기반한 추상적 사고의 정점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사상은 정신세계를 오로지 언어적 방식으로만 재단하였으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는 자폐인과 같은 존재들은 비정상으로 치부했다. 미셸 푸코는 정신장애를 둘러싼 이러한 태도가 정신과 의사들의 ‘그로테스크한 절대권력’에 기반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3 즉 언어적 세계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절대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채 소외되는 것이다. 언어 중심의 사고체계를 습득하는 것이 목적인 학교와 교육기관에서도 템플은 끊임없이 소외와 추방을 경험한다. 비장애인과 자폐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기보다, 비장애인의 언어체계와는 다른 장애인의 소통방식에 느낀 불편함을 제거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템플은 칼락 선생님을 만난다. 칼락은 지금까지 템플에게 언어적 사고방식을 주입하고자 했던 다른 교사들과 달리 템플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는 템플이 문자와 언어를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이미지로 인식하며, 글자 하나하나를 이미지로 인식해야 하는 탓에 남들보다 언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신체연극의 미학이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배우들은 템플과 클락이 언어를 배우는 장면이 진행될 때, 템플이 학습하는 문자를 자신들의 몸으로 표현한다. 특히 대문자 H는 Hole구멍, 소문자 h는 horse말, 대문자 M은 Mountain산처럼 초성을 본뜬 단어를 연결짓고, 그 단어에 알파벳의 이미지를 투영하는데 이것은 배우들의 신체를 통해 무대 위에서 시각화된다. 관객들은 이것을 통해 템플이 세계를 이해하고 감각하는 방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칼락의 지도를 통해 템플은 자신조차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사고체계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학습능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감각한 세계를 과학적 지식으로 풀어내는 과학자로 성장해간다. 특히 그는 동물학에서 뛰어난 성과를 남기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 비인간동물들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속성이라면, 비인간동물들은 언어를 매개하지 않은 이미지나 감각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마저도 기존의 과학자들은 언어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 이해의 정도가 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어를 매개하지 않고 세계를 감각하는 템플은 이러한 동물의 감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이해한 비인간동물의 감각체계를 바탕으로 동물권을 보장할 수 있는 가축시설을 설계하는 업적을 남긴다.

〈템플〉은 템플이 감각해 온 세계의 모습을 몸짓을 통해 시각화하며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움직임이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주의 연극이 추구하는 연기술과는 상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람경험은 언어적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던 템플의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의 감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세계에 대해 템플이 느꼈던 소외감처럼, 관객들은 자신이 기존에 경험해 온 언어적 방식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주하며 생경함에 휩싸인다. 그렇게 신체로 구성되는 이미지 속에서 관객들은 템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시도한다. 마치 템플이 비인간동물들의 삶을 이해했던 것처럼.

 

마침내 마주하는 돌봄의 얼굴들

두 편의 작품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돌봄’이다. 치매환자인 톰과 자폐인인 템플은 주변인의 돌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는 조금 더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다. 두 작품에서는 돌봄의 대상으로써 톰과 템플이 자신에 대한 돌봄을 인식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에서 톰은 치매로 인한 망각의 과정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 배우자인 이자벨라와 어머니, 그리고 친구인 마이크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져 간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들은 기억을 상징하는 온스테이지에 존재하다가 점차 온스테이지에서 퇴장하며 오프스테이지에 머물게 되는데 톰이 이들을 아무리 붙잡고 싶어 몸부림을 쳐도 그들은 홀연히 사라져간다. 기억을 잃는 것보다 그들에게 느꼈던 감정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절망하던 찰나, 마지막 장면에서 딸인 소피가 노년의 어머니와 중년의 마이크와 함께 생일 케이크를 들고 등장한다. 그렇게 나타난 그들을 보고 톰은 깨닫는다.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고, 자신을 돌보아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이자벨라는 사라졌지만, 이자벨라와 닮은(실제로는 동일한 배우의 1인 2역인) 딸 소피를 비롯해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의 돌봄을 깨닫고는 안도와 행복이 뒤섞인 모습으로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분다. 그렇게 그는 돌봄의 얼굴을 마주한다.

〈템플〉은 돌봄을 받는 과정이 곧 성장의 과정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미지에 기반한 자신의 사고방식과 감각체계를 깨달은 템플은 ‘사람의 일생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을 걸어 나가야 할 때가 있다’는 학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문의 이미지를 찾아 고군분투한다. 마침내 학교 건물 옥상에서 공사 중인 문을 발견한 템플은 그 이미지로부터 성장을 위한 문을 깨닫고 그 문 밖을 걸어나간다. 문 밖에서 그는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엄마와 주변인들의 존재를 깨닫는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한 단계씩 높아지는 계단을 만들어보이고, 템플은 신체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아가며 높은 곳을 향한다. 즉, 누군가의 돌봄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 계단 오르기로 신체화되는 것이다. 그런 템플을 바라보며 엄마는 말한다. 사랑한다는 건, 누군가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템플이 성장하기를 바라왔다고. 그렇게 템플은 자신이 성장해 온 과정에서의 돌봄의 존재를 마주하고, 주변인들에게 느꼈던 심리적 장벽은 점차 흐릿해져간다.

다만 두 편의 작품이 돌봄을 가족적인 사랑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톰을 돌보는 소피도, 템플을 돌보는 엄마도 모두 그들의 가족이며, 그들이 돌봄을 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은 가족으로써의 사랑과 애정이라는 감정이다. 돌봄이라는 것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친밀한 행위이니만큼 가족의 영역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적인 틀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돌봄을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한 상황 속에서 더 다각적인 돌봄에 대한 조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나아가, 돌봄은 사랑이라는 감정 이전에 그 자체로 노동이기도 하다. 돌봄의 동기나 감정을 주목하는 것만큼이나 돌봄이 가진 노동을 다뤄야 할 필요성 또한 존재한다. 특히 신체연극이라는 장르가 인간의 신체활동과 노동을 더욱 폭넓게 담아낼 수 있는 공연예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체적 의미에서 돌봄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고민도 수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저 돌봄을 받는 수동적 대상에 그치지 않고, 인물 스스로가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으며 자신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돌봄을 다루는 기존의 서사들은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이 돌봄에서 겪는 고충과 헌신적인 노력에 집중하며, 돌봄을 받는 이들은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곤 한다. 때로는 그 수동성이 돌봄제공자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봄을 받는 이들이 자신에게 제공되는 돌봄을 인지한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돌봄이라는 것이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쌍방향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두 작품은 돌봄의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확장해간다.

 

나오며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고, 지금의 인류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상당 수는 언어에 기반한 업적 덕분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의 위대함만큼이나 위험함도 내포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언어라는 체계가 추상적인 대상을 명시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함으로써 지식의 공유를 가능하게 해온 반면, 한편으로는 언어로 정의되지 못한 그 사이의 대상들을 철저히 배제시켜왔다고 말한다. 언어 체계에 포함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못한 것이다. 언어와 함께 인류가 발전하는 동안, 비언어적 세계의 존재들은 소외와 평가절하에 시달려 왔던 셈이다.

치매와 자폐로 대표되는 ‘온전치 못한’ 존재들의 세계 또한 그러하다. 다수의 언어체계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한다는 이유로 언어적 세계 바깥에서 소외되어 왔고, 소외는 차별과 혐오로 이어졌다. 그 속에서 그들은 더더욱 변방으로 밀려났으며,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언어적 세계는 자신들의 ‘완벽함’에 자부심을 느끼며 독주를 이어왔다.

그리고 이제 언어적 세계가 조명하지 못했던 공백들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템플〉 또한 마찬가지다. 세계를 더 명확히 이해하고자 사용했던 언어가 오히려 세계의 일부를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언어적 세계의 틀을 걷어낸 비언어적 세계에서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 온전히 경험하고 감각하는 세계를 담아낸다. 언어와 비언어의 이분법, 혹은 차등적 인식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인지와 감각의 세계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그 접점을 극장과 무대 위에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연극이 가진 텍스트성에 주목하긴 했지만, 사실 연극은 다른 감각과의 결합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희곡이라는 문자에서 출발하지만, 그 위에 배우의 신체적 연기와 음향효과, 무대미술 등 다양한 감각과 매체가 더해지며 복합적인 감각의 세계를 구현해낸다. 텍스트 자체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작품도 존재하지만, 그만큼 다른 감각들의 적극적 결합을 통해 외연을 확장해가는 시도 또한 끊이지 않는다. 신체연극이 그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했을 때, 연극은 언어적 세계가 조명하지 못했던 감각들을 담아낼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예술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세계를 감각하고 이해하는 더 많은 방법과 사고를 담아낼수록 그 외연이 확장되고 동시대성 또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기존의 언어가 아닌 신체 언어, 음악 언어, 영상 언어, 그 밖에 새로이 등장하는 수많은 언어들에 기반한 상호텍스트성이 겹쳐진다면 평면적인 언어의 세계에서는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들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연극의 방법이 될 것이라 믿는다.

형식의 변화가 내용의 변화를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변하지 않은 채 그것이 담고자 하는 내용이 변화하기란 쉽지 않다. 신체연극이라는 형식적 변화를 통해 치매와 자폐의 서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조명되었듯, 더 많은 감각을 담아내기 위한 형식적 탐구가 텍스트의 세계 속에서 소외되었던 더 많은 톰과 템플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본고는 영국 극단 시어터 리(Theatre-RE)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Nature of Forgetting)〉과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템플〉을 비평의 대상으로 한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우란문화재단과 연극열전의 공동제작으로 2019년 2월 13일 국내 초연했고, 〈템플〉은 2019년 10월 11일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초연했다. 필자는 2023년 12월 1일부터 2024년 1월 28일까지 공연된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2023년 12월 15일부터 공연 중인 〈템플〉을 바탕으로 본고를 작성했음을 밝힌다.

  양은숙,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re) 작품에 나타난 몸짓언어 분석」, 《한국무용연구》 35(4), 2017, 252쪽.

 박정수, 『‘장판’에서 푸코 읽기』, 오월의봄, 2020, 83-85쪽.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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