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소설 부문 당선작] 장우산이 드리운 주일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소설 부문 당선작] 장우산이 드리운 주일
  • 김쿠만
  • 승인 2022.02.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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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일요일에만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날도 마침 일요일이었다.
  - 〈휴일〉, 이만희(1968)

햄버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와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났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특히나 안 교수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나눴기 때문이다. 그날 주일 예배를 마친 나는 교회 앞에서 새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잠실 교보문고로 갔는데, 뜻밖에도 잠실 교보문고는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휴업 중이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부질없이 휘날리는 걸 바라보며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릴 때, 말년의 존 레논처럼 수염과 머리카락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4년 만이었다. 4년 만에 만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맑은 날이었지만, 그가 새까만 장우산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즈니 캐릭터가 조그맣게 그려진 검은색 장우산은 기억하기 어려웠지만, 『강우 기대증』이라는 독특한 정신질환은 기억하기 쉬웠다. 처음 병명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별걸 다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나도 별걸 다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내게 안 교수를 아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안 교수는 고발당한 후 상황이 불리해져 캐나다로 떴어요.

  —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안 교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는 서점 앞에서 안 교수의 캐나다 이민에 대해 30분 동안 떠들었다. 그는 안 교수의 가족이 몽땅 이민을 갔다고 주장했지만, 내가 알기론 안 교수만 캐나다로 갔고 그의 가족은 한국에 남아 있었다. 서로의 얘기를 듣고 우리는 어쩌면 안 교수가 캐나다에 안 갔을지도 모른다는 시시한 결론을 내렸다. 새파란 하늘 밑에서 우산(나는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에 우산을 쓸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그의 장우산은 나의 마음을 무심하게 무시할 정도로 컸었다)을 쓰고 있던 우리를 서점 안의 인부들이 의아하게 쳐다볼 때쯤, 그가 말했다.

  — 점심 안 드셨죠?

  — 요즘 교회는 야박하게 점심 국수를 안 주더라고요.

때마침 우리 뒤에 있던 롯데리아는 교보문고와 달리 정상 영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내게 점심으로 햄버거는 어떠냐고 물었다. 평소 롯데리아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마땅한 대안이 근처에 없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롯데리아에서 한 시간 동안 햄버거를 기다리며 얘기를 나눴다. 우리가 안 교수의 고약한 술버릇에 대해 떠들 때쯤, 배꼽에서 잔뜩 앓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주방을 슬쩍 살펴보니, 우리의 햄버거는 패티조차 구워지질 않은 상태였다. 배가 고파질 대로 고파진 우리는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며 점원한테 따지기 시작했다.

  — 한 시간 전에 시킨 햄버거가 왜 아직 안 나왔나요?

  — 죄송합니다.

  — 그래서 햄버거는 언제쯤 나오나요?

  — 죄송합니다

  — 아니, 죄송하면 햄버거가 나오나요?

  — 죄송합니다.

끝없이 쏟아지는 죄송합니다를 듣고 있자니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을 괴롭히는 못된 진상 손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런 몹쓸 기분 덕분에 마음이 불편해진 우리는 자리로 돌아가 와규와규버거와 클래식 치즈버거를 잠자코 기다렸다.

  — 저는 작년에 〈펄프 픽션〉을 본 이후로 햄버거 세트를 시킬 때마다 음료로 사이다를 골라요.

  — 타란티노 영화를 따라하다니. 못 본 새 정신이 더 나가셨군요.

햄버거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히피 영화에 출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피트의 연기에 대해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을 때 등장했다. 점원은 또 다시 연거푸 죄송하다며 감자튀김을 엄청 넣어드렸으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점원에게 말했다.

  — 죄송한데 우린 노여워한 적 없어요. 따지긴 했지만.

그러자 점원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똑똑히 말했다.

  — 죄송합니다.

우리는 몹쓸 기분을 또 느끼기 전에 햄버거를 들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는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한강 공원이 나오니 거기서 식사를 하자 말했고, 나는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도 사자 말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커다랗고 새까만 우산(아까도 말했지만, 그 우산은 양산이라고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심하게 컸다)을 쓰고 있던 우리를 희한한 짐승 보듯 바라봤는데, 앓는 지병이라곤 계절성 감기밖에 없는 정상인의 관점에서 판단하자면 그렇게 보일 만도 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뭘 보냐고, 우리가 우리를 빠져나온 구경거리인 줄 아냐고 감히 소리칠 수 없었다.

기대와 달리 공원에는 편의점이 없었다. 햇볕 아래에서 한 시간 동안 편의점을 찾아 헤매던 우리는 결국 공원을 빠져나와 근처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로 도망쳤다. 놀이터에는 정말이지 많은 숫자의 훌라후프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훌라후프는 아파트 단지의 모든 주민이 하나씩 가져가도 될 정도로 많았는데, 나무에 징그러울 정도로 걸려 있던 훌라후프를 바라보니 부질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와규와규버거의 포장을 뜯으며 그가 말했다.

  — 한강 공원에 맥주를 파는 편의점이 없다니. 이게 말이 되나요?

클래식 치즈버거의 포장을 뜯으며 내가 답했다.

  — 잠실 사는 사람들은 공원에서 훌라후프 돌릴 생각은 있지만 맥주 마실 생각은 없나 봐요.

그는 내게 훌라후프를 돌려본 적이 있냐 물었고, 나는 직접 돌린 적은 없지만, 엄마가 열심히 돌리는 걸 구경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나잇살이 생긴 엄마는 매일매일 강박적으로 훌라후프를 돌리셨는데, 부질없게도 전보다 허리둘레가 10cm 정도 더 늘어나고 말았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어머니도 훌라후프를 돌린 후에 허리둘레가 더 늘어났다고 답하며, 여기 정자에 걸린 훌라후프의 주인들도 모두 허리둘레가 늘어났을 거라 말했다. 그쯤 되면 훌라후프는 정말 부질없는 물건이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훌라후프에 유감이 없던 우리는 말없이 햄버거를 씹고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박살 냈다. 나는 햄버거를 삼키며 아까부터 가지고 있었던 찝찝한 의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도대체 내 앞에서 와규와규버거의 패티를 씹고 있는 이 자식의 이름은 무엇일까. 외자 이름이고, 조금 희귀한 성씨였던 것만 기억났다. 지금이라도 이름이 뭐냐고 묻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나을까?

  — 그래서, 연우 씨는 요즘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황송하게도 이 사람은 내 이름을 기억해주고 있었다. 어쩐지 미안해진 나는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사이다를 한 모금 들이켜고 답했다.

  — 소설을 교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돈 안 되는 일이죠.

  — 어쨌든 일을 하고 계시네요. 저는 작년 이후로 일이란 걸 못 했어요.

  — 그럼 뭘로 먹고 사세요?

그는 대답 대신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햄버거에 아메리카노라니. 밀크쉐이크에 찍어 먹는 감자튀김만큼이나 알 수 없는 조합이었다. 나는 그에게 혹시 감자튀김을 밀크쉐이크에 찍어 먹냐고 물어봤다. 그는 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지 감자튀김을 아메리카노에다 듬뿍 찍으며 되물었다.

  — 어디에다가 뭘 찍어 먹는다고요?

나는 햄버거 포장지에 찌꺼기처럼 남은 치즈와 소스를 감자튀김으로 슬쩍 닦으며 답했다.

  —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나는 그에게 혹시 파인애플 피자나 민트 초코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는 커피가 뚝뚝 떨어지는 감자튀김을 씹으며 답했다.

  — 파인애플은 말이죠. 구우면 더 달아져요, 민트와 초코는 섞으면 더 시원해지구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 그렇군요.

나는 토마토케첩에다 감자튀김을 듬뿍 찍어 먹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흔한 맛이었다.

  — 연우 씨는 어쩌다가 그 일을 하시게 됐죠?

  — 무슨 일이요?

  — 교열하신다면서요.

  — 다른 일을 기다리는 게 지루해서요.

  — 이해해요. 저도 오랫동안 기다리다 재작년에 잠깐 고양이 똥 모래 파는 일을 했었죠. 제가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고양이를 싫어하기 위해 그 일을 택했는데. 웬걸, 고양이보다 사람이 더 싫어졌어요. 

말을 마친 그는 기름방울이 둥둥 떠다니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와 다르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커피 맛 감자튀김은 감자튀김이란 것이 한 차례 멸종을 겪고 난 후에야 생길 법한 맛이었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 없는 그의 식성 때문에 나는 입맛이 떨어져 산처럼 쌓여있던 감자튀김을 전부 그에게 양보했다. 그는 나의 몰이해와 롯데리아 아르바이트생의 죄송함을 사양하지 않고 몽땅 아메리카노에 찍어 먹었다. 〈펄프 픽션〉에서 사무엘 잭슨이 감자튀김을 사이다에 찍어 먹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다시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편의점은 한강 공원이 아니라 아파트 상가에 있었는데, 편의점이라기보단 구멍가게에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는 허름한 냉장고를 열어 칭따오 맥주 네 캔을 집었다, 주인은 우리가 못마땅한지, 아니면 칭따오가 못마땅한 건지 한참을 구시렁거렸다. 나는 그에게 카드를 내밀며 물었다.

  — 칭따오가 싫으세요?

  — 뭐?

  — 칭따오가 싫냐구요.

주인은 나를 흘겨보더니, 만 원, 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며 카드를 포스기에 세게 긁었다. 포스기는 쿠엑쿠엑거리며 영수증을 길쭉하게 내뱉었다. 산 것이라곤 맥주 네 캔뿐인데 어째서 저 정도로 길쭉한 종이가 나오는지 궁금했다. 주인은 영수증을 끊으며 영수증을 가지고 갈 거냐고 물었다.

  — 저는 필요 없으니 화장실 갈 때 쓰세요.

내 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주인은 욕을 거칠게 내뱉었다. 우리는 그가 주먹도 거칠게 휘두르기 전에 빨리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구멍가게에서 멀어지자 그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마구 찌르며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그런 농담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했냐 물었고, 나는 그에게 무슨 농담을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가 영수증과 화장실이라고 답하자, 나는 그런 건 농담거리도 못 된다고 말했다.

  — 제가 요즘 교정을 맡은 소설에 나오는 시시한 대사예요.

  — 재밌는 소설이겠네요.

  — 소설은 재밌어요. 소설가는 재미없지만.

  — 그럴 리가요. 이 세상에 재미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내가 21세기를 한껏 지루하게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줄줄이 말하자, 그는 그 사람들도 알고 보면 모두 재밌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담이란 게 무한히 이어질 거라 믿고 있는 파렴치한 낙관론자였고, 나는 농담이란 건 석유처럼 언젠가 고갈될 거라 믿고 있는 무책임한 종말론자였다. 물론 내가 날 때부터 종말론자였던 건 아니다. 서른을 넘긴 후, 나는 나이만큼 끝없이 늘어나는 걱정들 때문에 지독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불면증을 고치기 위해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고, 덕분에 열성적인 종말론자가 될 수 있었다. 종말을 믿게 된 이후로 나는 묵시록만큼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정신 건강에 이렇게나 탁월한 종말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순순히 종말을 기다리자는 내 말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건 예배마다 방언과 눈물을 쏟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이 빌어먹을 자식에게 못된 사단이 들러붙었구나, 하며 나를 산 좋고 물 좋은 요양원에 두 번이나 처넣으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종말을 믿고 있었다. 기쁘게도 오늘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이야기였다.

  — 오늘 저희 목사님께서 요한계시록으로 설교를 하셨죠.

  — 전도할 생각이라면 관두세요. 제가 순순히 믿는 주님은 맥주밖에 없어요.

딱히 전도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순순히 입을 닥쳤다. 우리는 공원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공원 입구에서 그는 내게 혹시 담배를 태우느냐고 물었다. 나는 몸에 해로운 건 맥주만 하는 중이라 답했다. 그는 이 담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말하며, 주머니에서 레드애플 담뱃갑을 하나 꺼냈다. 빨간 사과에서 불쑥 튀어나온 새파란 벌레가 담배를 물고 있는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의 말마따나 정말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그는 내 입가에다 담배 한 개비를 들이밀었다.

  — 태울래요, 말래요.

나는 담배 냄새를 슬쩍 훔쳐 맡아봤다. 사과가 가득 열린 과수원이 불에 타고 있을 때 풍길 법한 냄새가 펄프 끝에서 흘러나왔다. 혹할만한 냄새였지만, 역시 피우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담배를 밀어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내가 밀어낸 담배를 자신의 입술에다 가져갔다.

  —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타란티노 담배를 마다하다뇨.

  — 폐암은 제가 고른 종말이 아니거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강 공원은 금연 구역이니 들어가기 전에 두 대는 태워야 한다고 말한 후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담배를 한 개비 하고 반 개비 정도 태웠을 때, 누워서 가는 자전거를 탄 꼬마와 전동 킥보드를 탄 노인이 우리 곁을 재빠르게 지나갔다. 두 사람 모두 헬멧을 쓰지 않았는데, 그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위험천만한 기구를 헬멧 없이 타는 건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인가 싶었지만, 나는 조용히 그가 풍기고 있던 해로운 냄새를 맡았다. 다시 공원에 들어선 우리는 길쭉하게 깔린 대리석 위에 앉은 다음, 맥주 캔을 땄다. 그 대리석은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구조물이었다. 앉으라고 만든 의자인 것 같기도 했고, 풀밭과 보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일종의 울타리인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앉은 자리 앞쪽으론 물고기가 다니는 길인 어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콘크리트를 쌓아서 만든 어도는 바닷가의 방파제를 똑 닮았는데, 그래서인지 바닷가에서 맡을 법한 냄새를 풍겼다. 내가 한강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고 말하자, 그는 바다 냄새가 뭐냐고 되물었다.

  — 물고기 오줌 냄새죠.

  — 맥주 안주로 삼을 만한 냄새는 아니네요.

그와 나는 칭따오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냉장고에서 주인에게 홀대를 받던 칭따오는 적당히 시원했다. 우리가 칭따오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 커다란 흰색 새가 우리 앞으로 날아왔다. 흰색 새는 어도 위에 앉더니, 그 밑을 한없이 노려봤다. 그러나 어도를 지나가는 물고기 중 마땅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는지 녀석은 금세 다른 장소로 날아갔다. 멀리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그가 내게 말했다.

  — 저건 누가 뭐래도 왜가리답게 생겼네요. 연우 씨는 혹시 학이랑 왜가리를 구분할 줄 아시나요?

  — 몰라요.

  — 실은 저도 잘 몰라요. 그런데 안 교수는 학이랑 왜가리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어요.

  — 그야 그렇죠. 안 교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맥주 캔을 맞부딪히며 다시 안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이지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다. 안 교수와 나는 정말이지 더러운 술집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그곳은 남녀 화장실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좁은 곳이라 안 교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길을 비켜줬다. 그날 안 교수는 계속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럴 만도 했다. 안 교수는 죽은 소설가의 이름이 새겨진 상을 받은 기념으로 단골 술집 『고백』에서 졸업반 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취기가 적당히 올랐던 안 교수는 너희 같은 아저씨 아줌마들과 술을 마시고 있자니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다(그런 농담이 살아있던 시절이다)며 파릇파릇한 신입생을 다섯 명 정도 데려오라 했고, 졸업반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11학번 신입생을 전원 불러냈다. 안 교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백』에 몰려온 신입생들에게 수입 맥주와 와인을 한 잔씩 사줬다. 뭣 모르는 신입생이었던 나는 그런 안 교수를 바라보며 나도 하룻밤에 술값으로 100만 원은 거뜬히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중얼거렸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이 되진 못했고 100만 원어치 술을 얻어 마신 주정뱅이가 되고 말았다. 토요일 저녁 8시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일요일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그 늦은 시간까지 안 교수를 따라다닌 신입생은 두 명뿐이었다. 새벽에도 장우산을 쓰고 다녔던 그, 그리고 나. 머쓱해 하던 안 교수는 질린 표정을 짓더니, 대학로 구석에 있는 국밥집으로 우릴 데려갔다. 이런 곳에서 잘도 국밥을 팔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외진 곳에 있던 국밥집은 밤을 샜거나 밤을 새울 예정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안 교수는 제일 구석진 자리로 기어들어 가며 우리에게 말했다.

  —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켜.

우리는 정말로 아무거나 시켰다. 커다란 쟁반 위로 가득 썰린 암뽕을 바라보며 안 교수는 이게 뭔지나 알고 시켰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는 제일 비싼 메뉴여서 시켜봤다고 답했다. 안 교수는 피식 웃으며 암뽕 고기를 한 점 들어 새우젓과 쌈장을 잔뜩 묻힌 후 입으로 가져갔다. 우리도 그를 따라 고기를 한 점씩 먹었다. 뭔지도 모르고 시킨 암뽕의 맛은 비리고 꾸덕꾸덕했다. 암뽕이 한 조각 남았을 때, 안 교수는 우리에게 암뽕이 무엇인지 알려줬다. 나는 어쩐지 맛이 없었다 말하며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켠 다음 가글을 끝없이 했고, 가게 안에서도 장우산을 쓰고 있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서 연거푸 마셨다. 안 교수는 그런 우리를 보며 한참이나 웃었는데, 하룻밤 만에 술값으로 1,126,850원을 태워버린 가장이 웃어도 되나 싶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우스운 시절의 우스운 주일 새벽이었다.

우리가 두 번째 맥주 캔을 땄을 때, 커다란 가방을 멘 노인 한 명이 우리 앞을 슬그머니 지나가더니 적당한 자리에 멈춘 다음 가방에서 색소폰을 꺼내 들었다. 노인은 노인답지 않게 머리카락이 풍성했지만, 노인답게 이가 몽땅 빠져있었다. 그는 그런 허름한 입으로 용케 색소폰을 물더니, 가을 녘의 갈대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늙어빠진 손가락을 잔뜩 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노인의 연주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우리의 기대감은 색소폰이 음을 하나 뱉자마자 맥주 거품처럼 사라졌다. 치아가 없는 곳으로 노인의 날숨이 마구 뿜어져 나온 탓에 색소폰은 음을 제멋대로 내뱉었다. 노인이 연주하는 게 찬송곡인지 장송곡인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에게 저 노래가 뭔지 아느냐 물었고, 그는 연주가 형편없어서 도저히 모르겠다고 답했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노인은 분을 터뜨리며 우리에게 소리쳤다.

  — 이건 마마스 앤 파파스가 1970년에 발표한 노래다!

도대체 마마스 앤 파파스의 어느 마디를 연주한 것이냐고 노인에게 되묻자, 노인은 불쾌한 듯 색소폰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 정도로 자부심이 넘치는 노익장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 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슬쩍 내민 후, 재빨리 도망쳤다. 노인은 공원 끝까지 우릴 쫓아왔지만, 숨이 달린 탓에 공원 바깥까지 쫓아오진 못했다.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주저앉은 노인을 향해 다시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을 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 있던 구름은 한 점 뿐이었고, 홀로 비를 흩뿌리던 구름은 36인승 시내버스와 크기가 엇비슷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그 정도로 작은 구름이 비를 쏟는 걸 보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기분이 기묘했는지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 저건 덜 자란 구름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자란 구름이랑 많이 다르네요, 라고 말했다. 어린 구름이 태양을 살짝 가린 모습은 매우 불길해 보였다. 우리는 장우산 아래서 빗방울이 장우산을 힘껏 때리는 소리를 감상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 저는 맑은 날이 제일 싫답니다. 흐린 날은 비가 확실히 오는데, 맑은 날은 비가 언제 올지 몰라서 초조하게 기다리게 되잖아요. 

그는 예전에 일본의 모리오초란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도 매일 우산을 쓰고 다녔다며, 일본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이 지나치게 커다란 우산을 쓰고 있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트림했다. 맥주 냄새가 우산 안을 훅 맴돌았다. 민망한 나머지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에게 어이없는 질문을 하나 했다.

  — 그런데 비 내리는 게 왜 좋아요?

그는 대답 대신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무안해진 나는 변명하듯 재차 물었다.

  — 따지고 보면, 그냥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거잖아요. 그게 왜 좋은 거죠?

  —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오니까요.

그는 옛날의 안 교수처럼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어설프게 취하니까 어설픈 말만 한다면서 제대로 된 술집에서 마저 마시자고 말했다. 우리는 신화보다 높게 쌓아올려진 타워를 지나 어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 골목은 인스타그램에서 ‘#송리단길’이라고 명명된 곳이었다.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닮아서 그런 어수룩한 이름이 지어졌다던데, 이 길과 경리단길의 닮은 점은 영문 모를 외국인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송리단길 초입에 있던 『Johanan』이라는 펍의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Johanan』은 전형적인 미국식 술집이었다. 새빨간 66번 국도 표지판과 삐걱거리는 당구대, ‘Open’이라고 새파랗게 깜빡거리는 네온사인 보드, 그리고 Metallica의 요란한 신곡이 흘러나오는 주크박스까지. 이곳은 6피트 4인치짜리 폭주족들이 시가 연기를 후줄근하게 내뿜으며 소란스럽게 주먹질을 할 법한 펍이었지만, 일요일 이른 저녁이라 그런지 펍에는 폭주족 대신 맥주잔을 닦고 있던 바텐더만 있었다. 새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바텐더의 머리는 다소 특이했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미용실에서 족히 열 시간은 볶아야 나올 법한 아프로였는데, 여러모로 불편해보였다. 피부까지 새까맣게 태운 바텐더는 왕년의 사무엘 잭슨을 흉내 내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파나마에서 백인들 상대로 물장사를 하는 뜨내기 포주처럼 보였다. 뜨내기 포주는 우리에게 폭탄 머리를 숙이며 살짝 묵례한 후, 다시 맥주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맥주잔을 닦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맥주잔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메뉴판이란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그가 맥주잔을 닦는 모습을 멍청히 바라봤다. 뒤늦게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바텐더는 헛기침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 주문하시겠습니까?

  — 우린 이곳이 처음인데요.

  — 그렇군요. 서비스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문은 무엇으로?

  — 우린 여기서 뭘 파는지도 몰라요.

우리의 말을 들은 바텐더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주방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얼마 후, 주방에서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무척 익숙한 냄새를 맡아 살짝 불안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 설마 그 음식일까요?

  — 그럴 리가요. 처음 오는 손님한테 소개할 법한 음식이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그 음식이 나오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바텐더에게 도대체 이게 뭐냐고 되물었다. 바텐더는 자신의 아프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 햄버거입니다. 주말 아침 영양식의 대명사죠. 참고로 일요일에 제일 잘 나가는 메뉴랍니다.

우리는 폭탄 머리에게 이 빌어먹을 햄버거의 가격은 얼마냐 물었고, 폭탄 머리는 그제야 메뉴판을 우리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햄버거의 가격은 14,400원이었다. 그가 혹시 음료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수 있냐고 묻자 바텐더는 웃음을 터뜨리며 혹시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햄버거치고 비싸고 거대한 것을 망연히 바라보던 그는 잠깐 중얼거렸다. 

  — 일요일이 햄버거로 시작해서 햄버거로 끝나겠군.

우리는 바텐더에게 이 가게에서 도수가 제일 높은 맥주를 한 잔씩 달라고 말했다. 바텐더는 도수가 무려 13.9도나 되는 IPA 맥주를 우리에게 한 잔씩 내밀었는데, 그쯤 되면 소주를 잔뜩 탄 맥주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거칠게 잔을 부딪친 다음 동시에 소리쳤다.

  — 제일 신성한 일요일을 위하여.

  — 제일 불쌍한 안 교수를 위하여.

어긋난 건배 구호로 인해 많이 민망해진 우리는 한 번에 맥주를 몽땅 들이켰다. 맥주는 어떤 안주와도 어울리지 못할 정도로 독했고, 햄버거는 이게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햄버거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비대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대단한 햄버거라도 포크와 나이프에 엉망진창으로 썰리면 돼지고기 패티와 빵을 곁들인 양상추 토마토 샐러드로 바뀌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래서 무슨 소용인가 싶은 심정으로 처참하게 썰린 양상추와 토마토, 그리고 빵과 패티를 포크로 찍은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롯데리아의 햄버거보다 훌륭한 맛이었지만, 햄버거를 먹는 기분이 들진 않았다. 햄버거를 마구잡이로 부수고 있던 그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내게 물었다.

  — 연우 씨는 롯데리아 광고 중에서 제일 좋았던 광고가 뭔가요?

  —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은 대답을 할걸요. 

저는 신구의 “니들이 게 맛을 알아?”가 제일 좋았어요.

  — 그것도 좋긴 한데. 저는 6년 전에 했던 광고가 더 좋아요.

6년 전에 했던 롯데리아 광고는 다음과 같았다. 각시탈을 뒤집어쓴 남자가 해동검법으로 수십 명의 사무라이를 베어 넘긴다. 사무라이들은 피 대신 케첩을 흘리며 쓰러지고, 남자 배우는 칼끝에 살짝 묻어있는 케첩에 햄버거를 문지르고 한 입 씹는다. 마침내 버거를 씹어 삼킨 배우가 이렇게 말하며, 광고는 끝이 난다.

  — 대한독립 만세!

밑도 끝도 없이 찬바라 영화와 각시탈을 패러디한 이 광고는 독립 70주년 기념으로 출시된 와규와규버거의 광고였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일본의 소 와규가 정확히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영상이 잘 뽑힌 탓에 일본의 몇몇 시대극 오타쿠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21세기식 찬바라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찬바라 매니아인 쿠엔틴 타란티노도 그 광고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고, 캘리포니아의 롯데리아 지점까지 찾아갔다. 안타깝게도, 햄버거를 맛본 타란티노는 환호성 대신 다른 소리를 질렀다.

  — Fuck!

그럴 만도 했다. 햄버거의 본고장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의 입맛에 일본 소고기로 만든 한국식 햄버거는 햄버거를 패러디한 무언가였을 것이다.

  — 그거 〈킬 빌〉을 패러디한 광고잖아요.

  — 엄밀히 따지면, 〈킬 빌〉도 패러디 영화죠.

  — 패러디의 패러디를 한 셈이로군요.

  — 요즘은 오리지널이 죽은 시대죠.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수염마저 하얗게 물들어버린 제임스 헷필드가 기타와 베이스의 반주에 맞춰서 ‘맙소사, 우린 이제 전부 뒈졌어’라고 주크박스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는 메탈이 아직 한물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그의 힘겨운 목소리는 메탈이 한물갔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우리가 맥주를 석 잔째 시켰을 때, 한 무리의 외국인이 펍 안으로 몰려들었다.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성스러운 일요일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화가 잔뜩 나 하나같이 새빨간 얼굴로 저마다 성을 내고 있었다. 전부 다혈질인 그들은 미국 사람처럼 생긴 것 같기도, 소련 사람처럼 생긴 것 같기도 했지만, 다 같이 기네스를 주문한 걸 보면 아일랜드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안 교수처럼 아일랜드 사람도 아니면서 매일 기네스를 마셔대는 이상한 사람도 있었기에, 결국 저들의 국적은 풀 필요가 없는 수수께끼나 다름없었다. 국적이 불분명한 외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팔뚝에 문신이 가득했다. 더럽게 새겨진 문신 때문에 그들은 부랑자처럼 보였지만, 부랑자라기엔 하나같이 머리가 짧아서 군인이거나 그와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 저는 외국인과 사귄 적이 한 번 있어요.

  — 좋았겠군요.

  — 그렇지도 않아요. 키가 7피트가 넘는 여자였거든요. 다툴 때마다 세게 두들겨 맞았죠.

나는 독한 맥주를 한 잔 들이켠 후 말했다.

  — 요즘엔 흔한 일이죠.

그는 7피트짜리 외국인 여자친구한테 얻어터지는 게 정말로 흔한 일이냐고 확인하듯 되물었는데, 나는 대답 대신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내가 대답을 안 해서 기분이라도 상했는지, 갑자기 그는 집에 가봐야겠다고 말하며 바텐더를 불렀다. 바텐더는 외국인들에게 전해 줄 맥주잔을 가득 들고 우리에게 다가오며 혹시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 아까 비가 오던데, 아직도 비가 오나요?

  — 비라뇨? 오늘은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렸는걸요. 하루 종일 쨍쨍했습니다.

  — 여기 내가 들고 있는 장우산이 보이지 않나요?

  — 아주 잘 보입니다. 손님께서 헛수고한 것도 잘 보이구요.

일요일 하루 동안 헛수고를 한 사람이 돼버린 그는 팔꿈치로 바텐더의 옆구리를 찌르며 크게 웃었다. 갑자기 옆구리를 찔린 바텐더는 크게 움찔거리더니, 외국인 테이블 쪽으로 비틀대며 걸어갔다. 바텐더는 용케도 맥주잔을 지켜냈다. 외국인들의 머리에 맥주를 많이 쏟긴 했지만. 머리가 흠뻑 젖은 외국인들이 바텐더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항의하자, 바텐더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손가락질하며 러시아어로 뭐라뭐라 지껄였다. 흥건하게 젖은 외국인들이 씩씩거리면서 다가오는 걸 보니, 저게 바로 종말이구나 싶었다.

실컷 두들겨 맞은 우리는 파라솔이 펼쳐진 구멍가게 의자에 널브러졌다. 파라솔 아래에서도 장우산을 펼치고 있었던 그는 구운 계란을 멍 위로 끊임없이 문질러댔다. 나도 그를 따라 구운 계란을 열심히 굴렸는데, 나중에 집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어이없게도 멍은 처음보다 더 커져 있었다. 계란을 적당히 굴린 그는 조심스럽게 계란 껍데기를 까더니, 계란을 한입에 집어넣었다. 계란이 생각보다 큰 탓에 그는 한참을 우물거렸다.

  — 이건 우리가 기적적으로 이긴 거예요.

나도 우물거리면서 답했다.

  — 어째서죠.

  — 우리는 술값을 안 냈어요.

정말로 우리가 이긴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터무니없던 햄버거와 맥주 가격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긴 것 같긴 했다. 우리는 승리를 자축하며 마지막으로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기로 했다. 우리는 구멍가게로 들어가 아사히 병맥주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칭따오를 혐오하던 사장은 백발 할머니로 바뀌어 있었다. 할머니는 먼젓번 사장과 달리 외국 맥주에 별 유감이 없는 듯 순순히 바코드를 찍어줬다. 영수증을 길게 내뱉던 포스기는 이번엔 침묵했다. 할머니는 아들 녀석이 갑자기 성질을 부리며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포스기가 맛이 갔다면서, 혹시 영수증이 필요하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는 영수증을 화장실에서나 쓴다고 답했다. 할머니는 손자를 가르치듯이 우리에게 충고했다.

  — 지금 나는 너희들의 영수증을 챙겨줄 순 없지만, 다른 곳에선 영수증을 챙기는 게 좋아.

  — 저희는 지금 영수증보다 병따개가 필요해요. 병따개를 빌려주실 수 있나요?

  — 병따개는 망치 밑에 있어. 1,000원이야.

우리는 망치 밑에 걸려 있던 병따개로 병뚜껑을 딴 다음, 다시 망치 밑에 병따개를 걸어뒀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경찰에 신고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우리는 할머니에게 경찰도 바쁘다고 말하며 파라솔 밑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말없이 병나발을 불며 심각하게 어두워진 밤거리를 감상했다. 잠실의 외제차들은 눈을 깜빡이며 전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다가오는 재앙을 피해 어디론가 달아나는 짐승처럼 보였다. 맥주를 다 마신 그는 레드애플 담배를 꼬나물며 내게 말했다.

  — 안 교수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요.

  — 누군가한테 술을 사주고 있겠죠.

  — 누군가가 누군지 몰라도 꽤 부럽네요.

그는 담배를 다 태운 후, 맥주병에다가 꽁초를 집어넣었다. 맥주병은 누군가를 추모하는 향초처럼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담배 연기가 가늘어지자, 그가 말했다. 

  — 이제 갑시다.

집에 가려면 그는 파란색 서울버스를 타야 했고, 나는 그 반대방향으로 달려갈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헤어지는 게 전혀 아쉽지 않았지만, 그는 아쉬웠는지 굳이 바래다준다며 우산을 쓴 채 나를 따라왔다. 어두운 밤이라 그런지 그의 장우산은 낮보단 눈에 덜 띄었다. 그럼에도 기어코 장우산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그들은 우리를 매우 희한하게 쳐다봤다. 호수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니, 버스정류장이 나타났다. 버스정류장에는 사람들이 한가득 서 있었다. 모두 가는 방향은 제각각이었지만 표정은 삼류 만화가가 그린 군중들처럼 한결같았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6분 후에 도착했다. 그는 정류장에서 꿋꿋이 우산을 쓴 채 버스가 떠나가는 것을 봐줬다. 버스가 정류장을 벗어나자 뒷좌석에 앉은 남녀가 말했다.

  — 미친 사람이 분명해.

  —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 하지만 오늘은 비가 한 방울도 안 왔는데?

나는 뒤를 돌아보며 그들에게 말했다.

  — 오늘 한강에 내렸어요. 비.

앞좌석의 낯선 사람이 뜬금없이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든 게 불편했는지, 그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한 칸 더 뒤로 옮겼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들의 대화는 들려왔다. 대체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한마디 더 하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그들이 다시 또 수고롭게 자리를 옮길 것 같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광역버스는 잠실을 재빠르게 벗어났다. 우리는 헤어지기 직전에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그때까지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나는 그의 번호를 ‘장우산’으로 저장했다. 장우산 씨에게 오늘 하루 즐거웠다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또 만나자고 장황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답장은 간단했다.

  — 다음에도 일요일에 만나요.

나는 답장을 바로 하지 않았다. 가까운 시일 안으로 그를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환도로로 진입한 광역버스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저들이 어디서 소중한 일요일을 허비했을지 상상해봤는데, 막막한 지루함이 밀려들어 왔다. 독실한 종말론자가 된 이후로 나의 하루는 앞뒤가 꽉 막힌 고속도로처럼 너무나도 길어졌다. 언제까지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나. 매일 기도를 했지만, 매일 응답은 없었다. 지나치게 느린 도로를 바라보다 멀미 기운이 도진 나는 울렁임을 참고 장우산 씨에게 답장했다.

  — 비 내리는 일요일에 만나요.

답장은 금방 왔다.

  — 네. 좋아요.

나는 다음 주와 그다음 주 일요일의 일기예보를 검색했다.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들이었다. 당분간 장우산 씨를 만날 일은 없었다. 나는 아쉬움과 안도감을 절반씩 느끼며 버스 차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세상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불온한 종말만큼 새까만 흉몽이 슬며시 나를 적셨다.

 

 


김쿠만 2020년, 웹진 《던전》에 입장했다. 2021년, 문예지 《에픽》에 등장했다. 2022년, 《쿨투라》 신인상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2년 2월호(통권 9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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