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쿨투라 신인상 희곡 부문 당선작] 비밀
[제8회 쿨투라 신인상 희곡 부문 당선작] 비밀
  • 송한샘
  • 승인 2015.03.30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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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현재. 겨울 방학. 서울 강남 8학군의 한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단지 내외.

등장인물

미 연: 기주의 엄마, 전직 레코딩 엔지니어 (43세, 여)

기 주: 미연의 아들, 수험생 (18세, 남)

동대표: 미연의 아파트 동 대표, 인테리어 업자 (50세, 남)

101호: 진태의 엄마, 공인중개사 (45세, 여)

진 태: 101호의 아들, 수험생 (18세, 남)

무대

주요 공간은 한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미연(기주)의 집, 101호(진태)의 집, 근처 상가에 있는 고시원의 방, 그리고 아파트 놀이터이다. 미연의 집과 진태의 집은 모두 30평 미만으로, 같은 동이므로 구조는 같거나 대칭형이어서 정면에 보이는 방문은 모두 안방 문이고, 무대 왼쪽과 오른쪽 밖에는 각각 현관이나 다른 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 안의 분위기는 매우 대조적이다. 미연의 집은 고고하고 정갈하며, 101호의 집은 자유분방하다. 미연의 집에는 고급 오디오가, 진태의 집에는 대형 TV가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

한밤중. 비가 쏟아진다. 조명 들어오면 고시원의 방 안. 빠른 템포의 가요가 흐른다. 문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이 목소리는 동대표 역할의 배우가 하도록한다.“ 음악소리너무크다. 줄여라.”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의자를 방 가운데에 놓고 올라선다. 학생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벽 어딘가에 턱걸이 봉이 붙어 있고 거기에 올가미가 걸려 있다. 학생이 올가미에 목을 걸고 의자를 넘어뜨린다. 빠른 템포의 가요가 흐른다.


1장 미연의 집

이른 아침. 유리구슬이 또르르 굴러갈 것 같은 분위기의 클래식이 흐른다. 기주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다. 그 앞에는 미연이 앉아 있고, 바닥에는 기주의 가방이 놓여 있다. 조곤조곤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미연, 그리고 주눅 든 듯 엄마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이야기하는 기주.

미연: 레벨 테스트는?

기주: 서울대 반.

미연: 등수는?

기주: … 2등.

미연: (긴 사이) 굳이 다 안 먹어도 돼. 소식해야 뇌도 맑아지니까. (기주가 국그릇에 손을 데려하자) 국은 숟가락으로 떠먹고. 물도 조금만 마셔. 쓸 데 없이 화장실만 갈라.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식탁 위에 놓는다) 일등 한 애랑 아웃백 가서 점심 먹어. 만점 받았대.

기주: 누군지 몰라.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

미연: 처음 보는 애하고도 금방 친해져야지.

기주: 오자마자 그렇게 나대면 왕따 당하기 딱.

미연: 왕따는 무슨, 그러니까 친구부터 사귀라고. 넌 그런 애들이랑 달라. (사이) 알았어?

기주: … 응. (지폐를 주머니에 넣는다.)

미연: 아래층엔 가지 마. 거기 애들은 만나 봐야 도움될 거 하나 없어.

기주: 응.

미연: (분위기 바꿔서 밝게) 여기 이사 잘 왔지? 서울대 반은 민사고, 특목고 애들도 많대. 그 반에서 일등이면 전국 일등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만점 아니면 일등도 못하는 거고.

기주는 묵묵부답 밥을 먹고 있다. 미연이 기주의 가방 지퍼를 열어 본다.

기주: 첫날이라 그냥-

미연: 첫날이니까, 뭐가 필요할지 모르잖아. 수업방식도 낯설고.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당분간은 다 가지고 다녀. (사이) 그리고 거기 매주 한 번씩 모의고사 있대.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미연이 나가더니 동대표와 함께 들어온다.

동대표: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출근하는 길에 들르느라고. (기주를 보고, 살짝 실망한 듯) 아, 결혼하셨어요. 미스이신 줄 알았는데… 안녕?

기주: (밥을 먹고 있다가 대충 목례한다.)

미연: 기주야.

기주: (일어나서 정중하게) 안녕하세요. 이기주라고 합니다.

동대표: 어이구 예의도 바르네. 괜찮아, 앉아요. (둘러보며) 같은 동이라 일부로 제가 직접 들렀습니다. 전 위에 13층 살거든요. 공사가 마음에 드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인테리어란 게 직접 살아봐야 흠결을 알 수가 있거든요. 사실 요즘은 제가 실무를 거의 안 봐서… 혹시 직원들이 현장에서 실수는 안 했습니까? 부족한 게 있으시면-

미연: 마음에 들어요. 수고 하셨어요.

동대표: 감사합니다. 사실 갑자기 얇은 내장 흡음 단열재를 다량으로 구하기가 영 만만치 않았거든요. 보통 방 하나만 방음 처리를 하죠. 그런데 이 집은 안방에, 작은 방에, 아예 벽 전체를 다 하겠다 그래서 사실 궁금했었습니다. 심지어, 저 베란다에 있는 창고에도 방음 처리를 하셨더라고요? 저긴 왜-

‘짤그랑’ 기주가 숟가락을 떨어뜨린다. 미연 기주를 노려본다. 사이.

동대표: 뭐 여하튼, 이 정도면 밤에도 서로 아무 소리 안 들릴 겁니다. (안방을 슬쩍 보며) 물론 안방에서도 전혀 문제없고요. 사부님께서는 벌써 출근-

미연: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동대표: 아니, 괜찮습니다.

기주: 잘 먹었습니다.

기주, 자기 방에서 참고서 따위와 영어사전을 들고 나온다. 참고서를 가방 안에 넣고, 마지막으로 사전을 넣을까 말까 고민한다.

동대표: 학원 가는구나! 어휴 무슨 책을 그렇게, 허리에 무리 갈 텐데-

미연: 사전은 안 챙겨?

기주: 요즘은 스마트 폰으로 단어 다 찾을 수 있는-

미연: 엄마 전화번호 뭐지?

기주: ……

미연: 쉽게 외운 건, 쉽게 잊어버려. 거기 보면 중요한 단어나 설명들에 이미 줄도 다 쳐져 있잖아? 하나 남은 아빠 유품이고.

동대표: (반색하며) 아, 그, 그래! 아저씨는 말이다. 옛날에 공부할 때 사전 막 씹어 먹고 그랬어.

기주: 그래서 어느 학교 가셨는데요?

미연: (동대표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기주야!

기주: (사전 챙겨 넣고) 다녀오겠습니다. (동대표에게도 목례를 한다.)

동대표: 하 녀석! 그래, 또 보자! 공부 열심히 해라!

미연: (기주를 배웅하며) 잘 다녀 와. 엄마 말 명심하고.

사이.

동대표: 혹시라도 A/S 필요하시면 사무실로 연락 주십시오. 가까우니까 식사라도 한번 하러 나오시던가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미연: 잠깐만요.

미연, 먼저 나가서 복도를 내다보고 들어온다.

동대표: 왜… 그러시죠?

미연: 괜한 오해는 안 받는 게 좋잖아요.

 

2장 놀이터

학원이 끝난 뒤 새벽 두 시. 벤치 한쪽 끝에는 기주의 가방이 놓여 있고, 반대쪽 끝에는 진태가 앉아서 말을 하고 있다. 기주는 전신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모양새는 어설프지만 꽤 익숙한 몸짓이다.

진태: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 동네 전학 오는 새끼들, 우린 다 좆밥으로 보거든. 너도 딱 보니까 이지매 백퍼다. 오늘은 봐줄 테니까 내일부터 눈 깔고 개기지 마라. 안 그러면 좆나 밟혀서 죽는 수가 있다.

기주: (진태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스트레칭을 한다.)

진태: 아 나 씨발. 나 누구랑 얘기 하냐. (담배 불을 붙인다.) 야.

기주: (여전하다.)

진태: 야!

기주: (여전하다.)

진태: 이런 씨발… (물고 있던 담배를 기주에게 던진다.) 야!

기주: 나?

진태: 까고 있네. 지금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있어?

기주: 너. (스트레칭을 한다.)

진태: 좆나, 야!

기주: (스트레칭을 하며) 왜.

진태: 자꾸 쌩깔래?

기주: 난 너 처음 보는데?

진태: 하! 너 나랑 같은 학원 다니잖아. 아까 버스에서 우리 둘 밖에 안 내렸어!

기주: (동작을 멈추고) 난 서울대 반이야. 넌?

진태: (혼잣말 하듯, 실소) 아 나 씨발 어디서 이런 좆만 한 새끼가. (담배를 하나 빼서 불을 붙인다.)

기주: 우리 층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아, 아래층에 있다는 지방대 준비반이구나.

진태: 그만 해라.

기주: 나 이거 얼른 끝내고 들어가야 되니까, 그냥 가.

진태: 이런 씨발, 여기가 너네 집이야?

기주: 담배 냄새! 딴 데 가서 피워.

진태: 싫은데?

진태, 기주에게 담배연기를 마구 내뿜는다. 기주, 진태를 무시하고 몸을 돌려 다시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진태: 병신. 너 좆나 어설퍼 보여. 폼이 그게 뭐냐?

기주: 중요한 건 폼이 아니라 실력이야.

진태: 오, 그러셔? (뒤에서 기주의 발을 걸어서 넘어뜨린다. 비웃으며) 실력 있어 좋겠다, 이 병신아!

기주: (털고 일어서며) 너 일진 코스프레 하냐? 혼자 쓸쓸하게 스파르타 학원이나 다니는 일진. 아니다, 빵셔틀이구나?

진태: 그만 하라 그랬다. 그 아가리 한 번만 더 놀리면.

기주: 쳐봐, 바로 진단서 떼서 고소할 거니까. 절대로 합의 안 해준다. 어디 교도소에서 스파르타로 수능 준비나 하던지. 하긴, 빵셔틀 주제에 칠 용기나 있겠냐. (등을 돌리고 스트레칭을 하려 한다.)

진태: 이런 씨발 새끼가! (기주를 밀어서 넘어뜨리고 배와 옆구리 등을 발로 차며) 내가 씨발, 너 같은 새끼들, 얼굴은 원래 안 때려… (쓰러진 기주의 얼굴을 잡아들고) 어때, 뭐 갖고 고소할래. 어? 얼굴은 아직 깨끗한데? (아랫도리를 기주한테 잡혔다.) 아악!

기주: 손만 까딱해봐. 터지는 수가 있어. 너 잘못 걸린 거야. 저기 저거! 얼굴 좀 더, 그렇지! CCTV 보이냐? 손 한번 흔들어. 이제 어떡하냐, 머리 쓴다고 얼굴도 안 때렸는데.

몸매가 드러나게 잘 차려입은 101호, 지나가다가 이 상황을 보더니.

101호: 야! 김진태! 너 거기서 뭐해!

진태: 에이 씨, 재수 없게! (순간 기주를 힘껏 뿌리치고 도망간다.)

101호: 야! 너 거기 안 서? 야!

기주가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다. 101호가 기주의 상체를 일으켜 자기의 어깨에 기대게 한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의 흙과 땀을 닦아준다.

101호: 얘! 괜찮니? 정신 차려! … 얘! 괜찮아? 얘! … 정신 좀 차려!

신음하던 기주가 눈을 뜬다. 101호의 깊게 파인 가슴골에 정신이 아찔하다.

101호: (기주의 시선을 느끼고) 괜찮지? 다친 데 없지?

기주: 누구…세요.

101호: 다행이다. (사이) 아까 걔 진태 맞지?

기주: … 진태요?

101호: 아니다. 근데 괜찮은 거 맞지?

기주: … 그런 것 같아요.

101호: 하긴 남자애들 다 이러면서 크는 거지 뭐. 넌 몇 동 사니? 혼자 갈 수 있어?

기주: 103동이요.

101호: 어머, 그래? 아줌마도 103동 사는데?

기주: 지난주에 이사 왔어요. 902호에.

101호: 그 집이 너네 집이구나, 로열층. 아줌만 101호 살아. 몇 학년이니?

기주: 이제 고3 이요.

101호: 우리 아들도 고3 되는데. (기주의 두툼한 가방을 보고) 근데 너 공부 잘하니?

기주: 네?

101호: 얼른 가자, 아줌마 집에서 약 바르고 가.

기주: 괜찮아요.

101호: 안 괜찮아! 많이 아픈 것 같은데. 가자, 아줌마가 부축해 줄게.

기주: 잠깐만요…… 잠깐…만요.

101호가 기주를 그대로 안고 있다. 기주, 101호의 품에 살며시 기댄다.

 

3장 미연의 집

빗소리.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동대표가 베란다 쪽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있다. 미연이 식탁 위의 꽃병에 화사한 꽃을 꽂고 있다.

동대표: 오늘 저녁에 뵙죠. 그래도 아드님이 공부를 워낙 잘하시니까 마음이 얼마나 편하세요. 별 문제 있겠습니까. 제가 영국에 연락을 좀 넣어보겠습니다. (사이) 아, 제가 뭐 하는 게 있나요. 그럼 들어가십시오. (전화 끊고 창밖을 내다본다.) 올겨울엔 비가 참 많이 내리네요. 꼭 몇 년 전처럼…… (식탁으로 오며) 겨울에 피는 꽃처럼 아름다운 게 없어요. 마음에 드세요?

미연: 다음엔 이런 거 사오지 마세요.

동대표: 다음에 또 오란 얘기군요! (미연 무반응. 멋쩍다.) 남자 애들이야 자라면서 싸움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비 온 뒤에 땅 굳는다고, 아마 둘이 더 친해질 겁니다. 그래도 진태 어머니가 먼저 사과하신다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하시니, 이 기회에 안면도 트시고 친해 놓으시면, 동네 사시기도 편하고, 애들 교육 시키기에도-

미연: 그 101호 산다는 애, 지방대 준비 반이라면서요?

동대표: 네? 아, 진태요.

미연: 하필이면 기주랑 같은 학원이라던데요, ‘스터디원’이라고.

동대표: 아, 스터디 원! 맹모삼천지교라더니 용케 또 제일 좋은 학원을-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동대표: 오셨나 보네요.

미연: (현관으로 나갔다가 잠시 뒤 전단지를 들고 들어온다.) 2주 안에 등록하면 학원비 30프로 할인해 준대요. 집에 학생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동대표: 이때쯤 이사 오는 집 팔구십 프로는 학생 둔 집이에요. 동네가 워낙 그렇잖아요?

섹시하면서도 커리어우먼 같은 옷차림의 101호가 거실로 쑤욱 들어온다.

101호: 나 왔어~~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 나?

동대표: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쪽으로 앉아요.

미연: 초인종이 고장 났나, 죄송해요. 제가 못 들었네요.

동대표: 풉!

101호: (못들은 척) 그런데 분위기 야릇하네, 두 사람 썸타요?

동대표: 무슨, 쓸 데 없는 소릴-

미연: 뭘 타요?

101호: 어머, 어떻게, 못 알아들었나봐!

동대표가 101호에게 눈치를 주고 미연은 101호를 무시하고 차를 내 온다.

101호: 저기, 지난 번 애들 일은 미안하게 됐어요. 우리 진태 따끔하게 혼냈어. 학원가면 이 집 아들한테 사과부터 하라고 했으니까-

미연: 기주는 괜찮아요. 그보다 이런 경우는 사실 가해자가 더 괴로울 수 있잖아요. 그렇게 주먹 나갈 일도 아니었는데… 요즘은 학생들도 심리치료 많이 받아요. 입시 스트레스에, 분노조절장애까지-

101호: 걔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그날 유독-

미연: 그래요. 자기도 몰랐겠죠. 그래서 더 걱정스러워요.

동대표: 자,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지만, 인연이 없으면 마주 보고서도 못 만난다고 안 했습니까. 두 분 서로 인사 먼저 하시죠.

101호: 역시 우리 동대표 님 박식하셔.

미연: 우리 동… 대표님이세요?

동대표: 아 네, 근데 뭐 별 것도 아니라. 진태 어머니는 여기 상가에서 부동산 하세요.

미연: 아 그래서 옷이 그렇게…… 스타일 좋으세요.

101호: 어머, 자기 센스 있다? 상류층 클라이언트들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이 동네에 처음 온 사람들은 수준이 워낙 높아서 힘들어 하는데. 자긴 내가 도와줄게, 너무 걱정하지 마.

미연: 고마워요. 근데 좀 춥겠다.

동대표: 기주 어머니는 레코딩 엔지니어라고 하시네요. 이런 직업 가진 분 만나기 쉽지 않은데-

101호: 그럼 쉽지 않지, 요즘 음반 시장 힘들다면서. 웬만해서는 애들 학원비 대기도 힘들 텐데, 자긴 괜찮지?

동대표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동대표: 여보세요? 아 네 사장님. (사이) 알겠습니다. 이따 저희 사무실에서 뵙죠. (사이) 별말씀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101호: 누구예요?

동대표: 아, 상가 지하에 새로 들어온 휘트니스 클럽 박 사장님인데, 아드님이 이제 고3 된다고 상담 좀 하고 싶다고-

101호: (싫은 듯) 아, 그 여자. 참, 저기 우리 진태, 이번엔 꼭 좀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동대표: 방학 끝날 때쯤엔 정리 될 테니까, 마음 놓으세요.

101호: 아 이렇게들 맨날 전화 와서 난린데, 마음이 놓여요?

미연: 무슨 일… 있으세요?

101호: 무슨 일은! 고시원 때문에 그러지.

미연: 고시원이요?

101호: 웬 시치미? 다 알게 생겼구만. (사이) 어~? 아 왜, 그 상가에 스카이 브릿지 고시원!

미연: (실소) 고시원 이름이 뭐 그래요? 학원도 아니고.

101호: 스카이 몰라? 서울대, 연고대! 거기에 브릿지, 다리를 놓는다 이거 아냐!

미연: 그러니까요. 사장이 정말 생각 없는 사람인가 봐요. 진짜 국가고시 보는 사람들한테는 이름이 너무 입시학원 같잖아요.

101호: 웬 오지랖? 거긴 수험생만 받아, 몰랐구나? (긴 사이) 거기서, 귀신이 나오는데 그 귀신을 보면 서울대나 명문대를 간대!

미연: (실소. 차를 마신다.)

101호: 어~? 거기 밤만 되면 이상한 귀신 소리 같은 게 들린대. 귀신 봤다는 애들도 있고. 방에서 공부 하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웬 남자애가 내려다보고 있더래. 또 어떤 애는, 복도 끝에 누가 가만히 서 있길래, 그냥 방에 들어갔다가 뭔가 이상해서 바로 다시 나왔는데, 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래. (사이) 무섭지?

미연: 아니요.

동대표: 이상한 건, 방 안에서는 바깥 소리는 아예 들을 수가 없거든요. 방마다 초인종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귀신 소리가 들렸다? 또, 그 애가 서 있었다는 복도 끝에는 벽 밖에 없거든요. 막다른 골목처럼. 방에 들어갔다가 바로 다시 나왔는데, 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이 안 되거든요.

미연: 다 애들이 지어낸 말이겠죠. 학교에 귀신 나오는 얘기처럼.

동대표: 하긴, 믿기 힘드시겠죠. (101호에게) 괜히 쓸 데 없는 얘기를 하셔가지고-

101호: 쓸 데 없다니요? 애 하나가 죽었는데.

미연: 네? 귀신 때문에 애가 죽어요?

사이. 미연이 동대표를 바라본다.

동대표: 아, 그게 아니라… 이게 얘기가 좀 깁니다만… 지금부터 한 오륙년 쯤 전인가, 그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고3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해 수능시험이 있던 날 밤, 오늘처럼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데 걔만 집으로 안 가고 또 고시원으로 온 거야. 그러더니 방안에서 음악소리에,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행히 그날은 사람도 거의 없었고, 수능도 봤으니 하는 생각에 고시원에서도 그냥 뒀답니다. (사이) 근데 아침에 총무가 청소를 하는데도 여전히 음악이 들리더라는 거예요. 총무가 방문을 두드리는데 대답은 없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대나. 결국 애 아버지를 불러서 같이 방문을 열었는데, 그 애가 문 바로 앞에 목매달고 죽어 있었답니다. 두 눈을 뜬 채로…… (미연을 놀리려고) 어이!

101호: 아?! 으아?! 아아……

미연: 목은 어디다 매달고 죽었어요?

동대표: (사이) 독특해.

미연: 네?

동대표: 처음입니다. 그런 걸 물어 본 사람은. 여하튼, 그 뒤로 총무도 관두고, 사람들도 싹 빠져나가버렸어요. 결국 아주 헐값에 그 고시원이 나왔는데, 그걸 영국에서 사업한다는 사람이, 뭣도 모르고 그냥 사버린 겁니다.

101호: 그 사장이 이 동네 출신인데, 캠브릿지 나와서 자수성가 했대.

동대표: 그러더니 고시원 인테리어를 어마어마하게 했어요. 방음도 완벽하게. 시청각 자료를 보건, 과외를 하건, 심지어 안에서 파티를해도 될 정도로. 그 자살했다는 고3 학생이 쓰던 방은, 그때 아예 묻어버렸습니다. 문 위에 벽을 발라서 덮어버렸으니까. (사이) 그 벽이 아까 그 귀신이 서 있었다던 막다른 골목입니다.

101호: 언제는 그 벽에서 귀신이 머리만 쑤욱 내놓고 있었대.

미연: 그게 진짜면 애들이 무서워서 고시원에서 어떻게 공부를 해요. 집단 최면에라도 걸려 있었다는 거예요?

동대표: 물론, 그만 두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수능에서 고시원에 있던 애들이 다 서울대, 연고대에 붙고, 나머지도 죄다 서울 안에 있는 대학에 붙고, 이러니 대박이 터진 거죠.

101호: 그게 다 귀신 보고 힘 받아서 그런 거야. 귀신이라고 전설의 고향만 생각하면 안 돼!

미연: 말도 안 돼. 원래 공부 잘하던 애들이었겠죠.

동대표: 역시 괜한 얘길 했네. 그래도 학생들이 귀신을 봤다는 건 맹세코 진짭니다. 어떤 학생들은 그 자살했던 애 옷이나 생김새까지 그대로 말했어요.

미연: 그 애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사이.

101호: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알아.

동대표: 왜, 불가사의한 일은 어디에나 있잖아요. 따지고 보면 신이나 귀신이나 결국 종이 한 장 차입니다.

미연: 그래서 난 종교는 안 믿어요. 차라리 사람을 믿지.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미연: 고시원 일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초인종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101호: 뭐 해, 안 나가고?

미연, 일어나서 현관으로 나간다.

101호: 쫌 이따 옆 동에 새로 이사 올 주인하고 미팅 있는데, 소개시켜 드릴게 같이 가요.

동대표: 아이고, 이거 참 번번이-

미연이 쟁반에 담긴 음식 따위를 들고 들어온다.

101호: 그건 뭐야? 누구 왔어?

미연: 아 옆에 903호요. 음식 좀 했다고 나눠 주시네요. 동대표 님도 계시다고 들어오라고 했는데, (동대표를 보고) 굳이 안 들어오겠대요.

101호: 그 집 아들내미 이번에 고대 수시 붙었을 걸? 고시원에서 공부했잖아. 그 집 엄마 얼굴도 반반하니 괜찮아.

미연: 이 달 말에 이사 간대요.

101호: 어머, 왜 그렇게 갑자기-

동대표: 아까 뭐라고 그러셨죠?

미연: 네? 뭐가요?

동대표: 뭘 물어 보셨잖아요, 나한테.

미연: … 아! 그 고시원 일을 어쩜 그렇게 잘 아시나 해서요. 꼭 직접 본 것처럼.

빗소리가 거세진다.

동대표: 다 들은 얘깁니다. 그게, 제가 고시원 사장님하고 영국 유학시절에 캠브릿지에서 만났었거든요. 같이 학교도 다니고 하면서 인연이 생겼는데-

101호: 거기 리모델링을 우리 대표님이 했잖아. 척하면 척이지! (한숨) 캠브릿지는 대체 어떻게 가는 거래. 누구는 서울 안에 있는 학교도 못가서 난린데. (사이) 그 죽은 애 아빠가 그렇게 극성이었대. 서울대 아니면 안 된다고, 중학교 때부터 지 새끼를 고시원에 거의 가둬놓고 공부만 시켰대.

미연: 아빠가 자식 죽인 셈이네요. 애가 얼마나 집에 들어가기 싫었으면 수능시험 본 날 집에 안 가고 고시원에 갔겠어요. 애초부터 공부에 재능 하나 없는 애들까지도 어떻게든 억지로…, 그건 아니라고 봐요. 자기가 연금술산가.

동대표: 부모 마음이야 늘 그렇죠, 인지상정입니다.

미연: 대리만족이죠. 꼭 부모들은 자기가 못 이룬 걸 자식한테 바라잖아요. 그래놓고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치면 무작정 혼만 내고. 어쩌면 그 원인은 본인 스스로한테 있을 수도 있는 데 말이에요.

동대표: 본인이요?

미연: DNA는 유전되잖아요. 공부도 마찬가지겠죠. 개천에서 용 난다? 그게 얼마나 힘들면 속담이 다 생겼겠어요.

동대표: 재미있는 얘기네요.

미연: 그 자살한 애 부모는 어디 살아요?

101호: 그 집은 파탄 났어. 애 엄마가 남편한테 이혼 통보하고 나가버렸대.

미연: 역시 결손가정이었네요.

101호: 그 애가, 자기 방 그 좁은 샤워 부스에서, 웬 남자랑 장난치면서 샤워 하다가 딱 들켰대. 사람들이 얘기 듣고 왔을 땐, 그 남잔 온데간데없이 애 혼자였다나. 알고 봤더니, 몇 년째 검정고시 준비하던 옆방 아저씨였대. 중졸이라는 소문도 있고.

미연: 분명 아빠 사랑도 제대로 못 받고 자랐을 거예요. 그렇다고 그런 불결한 짓을……

동대표: 아, 그건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고 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런게 아니었어요.

101호: 그럼 뭔데?

동대표: 아…, 원래 자살한 사람 두고는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잖아요. 또 수능까지 본 고3이었으니까, 얼마나 더 했겠어요.

101호: 어쨌든, 기주 엄마 같으면 여기 계속 살았겠어? (한숨) 난 내 아들이 그런 꼴 당했으면 한 맺혀서 못 살아.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리고 말지.

미연: 애 아빠는, 아직 여기 살아요?

101호: 여기 살면, 만나라도 보게? 벌써 몇 년 전 일이고, 얼굴은 아는 사람도 없고…… 어머, 벌써… 대표님 이만 가요, 약속 시간 다됐어.

동대표: 아, 그럴까요.

101호: 다음에 또 봐. 애들도 동갑이고, 나랑 친하게 지내면 여러 모로 좋아.

동대표: (명함을 미연에게 주며) 힘든 일 있으면 인터폰이든, 전화든 연락주세요. 한밤중이라도 달려오겠습니다.

101호: 아, 한밤중에 여길 왜 와. 그냥 나한테 연락 해. 가요. (퇴장하면서. 사라져가는 목소리) 명함 함부로 막 뿌리지 말라 그랬잖아요, 쓸데없이……

동대표와 101호 함께 퇴장하는 모습이 친밀해 보인다.

 

4장 놀이터

학원이 끝난 후 새벽 두 시. 벤치에 가방이 놓여 있고, 기주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고양이 소리가 살짝 들린다. 기주, 멈칫하고 주위를 초조하게 살핀다. 다시 스트레칭을 한다. 고양이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기주: 뭐야.

고양이 소리가 더 크고 또렷하게 들린다.

기주: 시, 싫어!

가방을 가슴에 안고 도망가려는데 길고양이 한 마리가 기주 앞에 선다.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 있을 것이다.

기주: 저, 저리가, 저리가!

쫓아내려고 모래를 뿌려도 고양이는 이리저리 피하며 점점 더 사납게 울어댄다. 주위를 둘러봐도 손에 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주, 가방을 열고 책을 던지기 시작한다.

기주: 오지 마! 왜 이래!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진다. 진태 등장.

진태: 뭐 하냐?

기주: 고양이…… 고양이 떼… 저리 가! 저리 가!

진태: 고양이 떼? 아 나 이 새끼…

기주: 아! 아악! 저리 가, 저리 가!

진태: 가지가지 한다. 쫓아 줘?

기주: 아악! 제발! 저리 가! 저리 가!

진태: (가볍게 발차기로 고양이를 쫓아내며) 저리 가, 새끼야.

진태, 쓰러져 있는 기주에게 간다.

진태: 일어나 인마. (사이) 뭐야, 진짜야? (기주의 목을 받쳐 안고) 야, 괜찮아?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인마! (가방의 물을 꺼내서 기주에게 먹인다.)

기주: (차차 정신이 돌아온다.) 고마워.

진태: 119 부를 뻔 했다. 거품 무는 줄 알았어. (사이) 저기 봐봐. 보이냐, CCTV? 저기 다 녹화 되어 있다. 저 테이프 받아다가 유투브에 올리면 너 완전 병신 되는 거 알지? (사이) 어우, 춥다. 일어나. (기주를 부축해서 벤치에 앉힌다. 사이) 저기 지난번엔 말이다, 내가-

기주: 그땐 내가 말이 너무 심했지. 미안해.

진태: 뭐야, 간지럽게… 난 안 미안해. 왜냐, 난 빵셔틀이 아니거든. 대신, 내가 네 일진 해 줄게.

기주: 그런 거 필요 없어.

진태: 누가 뭐래? 고양이 인마! 밤에 학원 끝나고 같이 오면 최소한 고양이는 무서워할 필요 없잖아. 나도 이제 매일 새벽 두시 차로 올 거니까.

기주: (미소) 진짜?

진태: 감동하긴. 근데 왜 그런 거냐? 설마 진짜 고양이 떼로 보였어? 한 마리밖에 없었어!

기주: … 그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가끔씩……

진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 야 너 목에 이거 뭐야!

기주: (목을 움츠리며 가린다.)

진태: 봐봐 인마! 뭐야, 방금 그런 거야?

기주: 흉터야. 어렸을 때 할퀸 거.

진태: 장난 아니다. 길고양이?

기주: 아니… 엄마가 기르던 고양이였는데-

진태: 근데 왜?

기주: 몰라 기억 안나… (뭔가 불안해 보인다.)

진태: 이제 괜찮아 인마. 이 형님이 있으니까.

기주: 왜 네가 형이야? 생일이 언젠데?

진태: 잘생긴 순서야. 근데 네가 무슨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하냐?

기주: 오늘 학원 모의고사 봤잖아.

진태: 그게 뭐! 너 공부 잘 하잖아.

기주: 우리 반에서 꼴등 했어. 여섯 개나 틀렸어.

진태: 아 나 멘붕! 야, 니네 반 다섯 명 밖에 없잖아! 그리고, 여섯 개'나'? (사이) 내가 너 같았으면 우리 아빤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뛰었을 텐데.

기주: 너, 아파트 상가에 고시원 알아?

진태: 알지. 학원이 새벽 두 시에 끝나는데, 거길 또 가게?

기주: 오늘 이상한 얘기를 들었는데, 거기서 귀신이 나온대! 그 고시원에서 귀신 본 애가 그 다음날부터 예상문제를 술술 뱉어내더니 결국 서울대 갔대!

진태: 아 병신. 왜, 아예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가지.

기주: 진짜라니까!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수학문제를 알려줄까, 영어문제를 알려줄까?”하고 물어보는데, 그 겁쟁이들이 대답도 못하고 기절해 버린대.

진태: 됐어 인마. 안 그래도 요즘 엄마가 고시원, 고시원 하는데, 난 딱 싫어.

기주: 왜?

진태: 무슨 귀신까지 들려가면서 서울대를 가. 그리고 난 이미 매일 봐, 귀신.

기주: 진짜?

진태: 너처럼 한두 개 틀리는 거 가지고 스트레스 받는 애들 다 귀신으로 보여. 너도 참 그런 얘길 다 믿고, 하여튼 공부 잘하는 놈들이 더 하다니까.

기주: 가수들 녹음실에서 귀신 보면 대박 난다 그러잖아. 그거나 이거나!

진태: 됐다니까! 거기 가 봐야 좆나 빡 치기만 해.

기주: ……

진태: 거기, 돈 많은 집 애새끼들이 대부분인데, 우리처럼 복도식 아파트 사는 애들 가면 개무시 한대. 특히 105동, 106동! 그 72평, 84평 사는 새끼들, 도저히 눈꼴시어서 못 본다. 씨발, 옛날에는 내가 놀이터에 있으면 들어오지도 못하던 좆밥들이었는데.

기주: … 가자. (일어선다.)

진태: 또 9층까지 계단으로 갈 거냐? 엘리베이터 안 타?

기주: 운동 삼아 하는 거야. 계단으로만 꾸준히 다녀도, 다리 근육 발달하고, 혈액 순환 잘 돼서 몸 전체로 피가 잘 돌아. 뇌에 산소공급도 잘 되고.

진태: 오~~~~ 그러셔? 근데 괜찮겠어? 요즘 같이 추운 때는 아파트 지하실에도 고양이가 우글우글 할 텐데, 층층마다 한 마리 씩 버티고 있으면 어떡하냐?

기주: …….

진태: 뻥이야 인마. 혹시라도 있으면 바로 전화해. 이 일진 형님이 바람처럼 달려가서 구해주마. (사이) 뭐해! 안 가?

 

5장 미연의 집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주가 들어온다.

미연: 무슨 일 있었어? 웬 식은땀을, 설마 엘리베이터 탔니?

기주: 아니. 좀 긴장해서 그래.

미연: 얼른 옷부터 벗고 앉아.

미연이 소파에 앉은 기주에게 물과 수건을 가져다준다.

기주: 엄마.

미연: 응.

기주: 녹음실에서 귀신 본 적 있어?

미연: 뜬금없이 웬 귀신.

기주: 그냥. 녹음실에서 귀신 보면 앨범 대박 난다는 거, 진짜지?

미연: 쓸 데 없는 소리. 학원은 어때?

기주: 계단이 좀 좁아. 미니 버스도 답답하고.

미연: 그럴 때는 그날 배운 걸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해. 입으로 소리내서. 그러면 답답한 게 없어져. 참, 그 101호 산다는 애, 엄마가 사과하러 왔었다. 그렇다고 걔랑 너무 가깝게 지내진 말고.

기주: 안 그래도 와서 미안하다 그랬어. 좋은 애 같던데-

미연: 좋은 친구는 서울대 가면 널렸어. 네 인생에 도움이 될 친구가 좋은 친구야.

기주: (사이) 알아. 그냥 그런 애 하나 알아두면 학교 다닐 때도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 이만 잘래. (일어서서 거실을 가로질러 가려는데)

미연: 기주야.

기주가 멈춘다.

미연: 오늘 모의고사 몇 개 틀렸어?

기주: … 여섯 개.

미연: (사이) 등수는?

기주: …… 5등.

미연: 우리 기주, 엄마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일부로 정신없는 척 다른 얘기 하면서 들어왔구나.

기주: 그게 아니라 오다가 놀이터에서 고양이를-

미연: 지금 세 시가 넘었다. 얼른 하고 자야지.

기주: 엄마, 그냥 내일 하면 안 돼? 지금 너무 힘들어-

아래 대사들 동안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무대 중앙의 기주에게 모여지기 시작한다.

미연: 쉬운 거, 좋아하는 것만 하는 사람은 그 이상이 없어.

기주: 쉬운 거, 좋아하는 것만 하는 사람은 그 이상이 없다.

미연, 기주: 그냥 썩어버리지, 사탕만 찾는 애들 충치처럼. (사이) 각 문제당 출제유형과 정답 풀이과정, 네(내)가 속았던 오답의 함정, 또 그걸 쉽게 푸는 요령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얼마나걸릴까.

기주: 문제당 20분 정도……

미연: 그럼 여섯 문제니까 120분. 두 시간이면 되겠네. 베란다 작은 공부방 미리 열어놨어. 끝내고 눈 좀 붙여.

어느새 기주의 공간은 좁은 베란다 창고 안이다. 앉아있던 기주가 천식환자처럼 가쁘게 숨쉬기 시작하더니,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뭔가를 중얼거리며 시험지와 참고서 등을 뒤적거린다. 잠시 동안 객석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기주만 보인다.

 

6장 미연의 집

오전. 클래식이 흐른다. 초인종이 신경질적으로 울리고, 미연이 현관으로 나간다. 101호, 귤이 담긴 비닐봉지를 흔들며 들어온다. 오디오를 보더니 냉큼 소리를 줄이고 소파에 앉는다.

101호: 진태가 그러는데 기주가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며? 학원 선생들이 이 동네에서도 내신 1등급일 거라 그랬대. 요즘 진태가 웬일로 야간 수업까지 다 듣고 오길래, 나야 뭐 얼씨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까 끝나고 매일 기주랑 둘이서 같이 오더라고. 우리 진태도 기주 덕에 공부에 재미 붙였어. 명문대 간대.

미연, 작은 상 위에 쟁반을 얹어 소파 앞에 놓고, 바닥에 앉는다. 101호는 귤을 부지런히 까먹고, 미연은 101호가 깐 귤껍질을 조용하면서도 깔끔하게 비닐봉지에 담는다.

101호: 참, 기주 엄마는 이름이 뭐야? 난-

미연: 그게 뭐 중요한가요.

101호: 뭐 그렇긴 해도… 여하튼 진태가 모르는 거 물어보면, 기주가 그렇게 잘 가르쳐 준대. 선생보다 낫다는데?

미연: 설마.

101호: 그렇다니까. 오죽하면 진태가 기주랑 같이 다니고 싶다고, 글쎄 나보고 기주도 고시원에 넣어달라는데, 내가 무슨 사장이야? (사이) 그래서 말인데, 기주 고시원 안 보낼래? 개학 전에 마감인데, 신청자 명단은 있으나 마나고, 알음알음 소개로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래.

미연: 관심 없네요.

101호: 어? 심지어 방 따라 프리미엄도 있다니까? 이거 비밀인데, 우리 동 대표님이 거기 일을 대신 봐줘. 잘만 하면 웃돈 안 내고도 다닐 수 있고. 그것만 해도 얼만데.

미연: 뭘 잘만 해요.

101호: 어? 어…… 그 양반 혼자 살거든? 왜, 있잖아. 아슬아슬하게-

미연: 요즘 부동산 경기가 그렇게 안 좋다면서요. 혹시, 동대표 님이랑 짜고 고시원 방 가지고 투기하는 건 아니죠?

101호: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연: 농담이에요.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고시원이네, 귀신이네 두 분이 하도 그러시니까……

101호: 아니 나는 그저 우리 진태가 기주랑-

미연: 기주는 그냥 집에서 공부하면 돼요. 방음처리도 다 했고.

101호: 그러게 인테리어에 뭔 돈을 이렇게 들였어! 여기 조만간 재건축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미연: 이거 전세예요.

101호: 전세? 아니, 누가 전셋집에 이렇게 돈을 처바른대?

미연: 기주 대학만 잘 가면 되죠. 수능 끝나면 다시 이사 갈 거고.

101호: 애 아빠가 돈을 잘 버나보지.

미연: 죽었어요, 오래 전에.

미연, 쟁반의 귤껍질을 치운다.

101호: 미안. (한숨. 혼잣말) 괜한 짓 했네.

미연: 괜한 짓이요?

101호: 어? 아, 아니야.

미연: (101호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101호: … 어차피 전세 사는 애는 고시원에서 받아주지도 않아. 물 관리 같은 거지. 있는 집 자식들만 받겠다. 뭐 이런 거 아니겠어?

미연: 그런 귀신 얘기 믿는 사람들 참 재미있어요. 하긴, 자식이 공부 못하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난 기주가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비상식적인 얘기는 믿을 수가 없네요.

101호: 전교 1등이라고 다 같나. 서울대 다니는 애들, 전교 1등 한 얘기는 자랑 축에도 못 껴서, 말도 안 꺼낸대. 여기 학교만 봐도 작년에만 서울대, 연고대 합쳐서 100명 넘게 갔어! 변두리 후진 학교에서 전교 1등 한다고-

미연: 공부를 학교가 대신해주나요. 수험생이 전국 80만인데, 거기서 상위 0.5프로만 서울대 간대요. 인(In) 서울은 30프로고. 기주야 전국 4천 명 안에는 항상 들었고, 진태도 ‘24만 명’인데, 그 정도야 당연히 들겠죠? 대학가서도 둘이 친하게 지내야 될 텐데.

101호: ……

미연: 그런데, 이 아파트 엄마들 원래 그래요?

101호: 뭐가? (사이) 우리 단지가 다른 데랑 좀 달라. 상가 하나, 아파트 몇 채가 다잖아. 이 안에서 그냥 지지고 볶고 살아.

미연: 그게 아니라, 마냥 희희낙락하는 것 같아서요. 생각보다 애들 공부에 관심도 별로 없어 보이고.

101호: 그 엄마들, 아마 자식들이 고시원에 있을 걸? 안심하는 거지.

미연: 거기 보낸다고 안심이 돼요?

101호: 몰랐어? 스마트폰으로 애들 방 다 볼 수 있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 공부 진도 실시간 체크되고, 애들이 컴퓨터로 뭐하는 지도다 볼 수 있고. 딴 짓은 아예 할 수가 없어. 애들 전화기도 다 압수하거든.

미연: 그건…… 동대표 님 아이디어인가요?

101호: 글쎄, 왜?

미연: 그냥요. (사이) 참, 어제 903호 이사 갔잖아요. 좀 이상하지 않아요?

101호: 뭐가?

미연: 애들이 대학 가면 대부분 이 동네를 떠난다고요.

101호: 그게 뭐 이상해? 자기도 갈 거라면서-

미연: 거기다, 다들 귀신, 고시원 하는데, 검색해 보면 아예 안 나오거든요.

101호: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 동네 집 값 떨어질 거 아냐. 그 학생 자살했을 때 이 동네 사람들 다 쉬쉬했다고. 또, 고시원 너무 유명해지면 다 몰려올 텐데, 그걸 누가 좋아해? 경쟁자만 늘어나는데. (사이) 그새 뭘 그렇게 캐고 다녔대? 관심 없는 척 도도하게 굴더니.

미연: 동대표…… 어떤 사람이에요?

101호: 어떻다니, 왜?

미연: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어요.

101호: 누가?

미연: 903호요. 그때 동대표 님하고 같이 있다고 들어오라고 했더니,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져서 가버렸다고요.

기주 등장.

기주: 엄마, 나 왔어-

미연: 어, 웬일?

기주: 사전을 두고 가서.

101호: 안녕? 보면 볼 수록 잘 생겼다, 너? 섹시하니. 딱 내 스타일이야.

기주가 부끄러워하며 방으로 퇴장한다.

미연: 애한테 무슨 그런 얘길 해요. 우리 기주 그런 애 아닌데.

101호: 아이고, 유별이야 참, 저 나이 애들은 다 똑같네요.

기주가 사전을 들고 거실로 나온다.

101호: 우리 집에 놀러 좀 오고 그래. 아줌마, 맛있게 잘한다?

기주: (부끄럽다) 가요. (퇴장)

미연: 지금 우리 기주한테 뭐라 그런 거예요! 뭘 맛있게 잘해요!

101호: 음식! (사이) 어머, 기주 엄마 설마, 지금 무슨 생각 한 거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이네!

미연: 우리 기주는 어릴 적부터 올곧게 키웠어요. 101호 아줌마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거 전혀 몰라요. 어디서 아무렇게나 키운 애들이랑 똑같이 생각하면 안 돼요!

101호: 뭐야? ‘어디서 아무렇게나’ 키운 애들? 하! (사이) 고시원은 됐네. 남편 없이 학원비 대기도 벅찰 텐데 괜히 돈 때문에 이상한데 가서 엄한 짓 하지 말고.

미연: 진태가 기주를 그렇게 좋아한다니까 애한테는 별 얘기 안 할게요. 어차피 뭐 대학가면 둘이 만날 수나 있겠어요. 아, 누구 아들은 고시원 가면 단속 잘 해야겠네. 수능 본 날은 꼭 집에서 재우고.

101호: (충격) 뭐? (긴 사이. 일어선다.) 나도 남편이 무늬만 남편이라 진태 혼자 키웠어. 자기 보고 뭔가 처연하기도 하고, 날 보는 것 같아서…, 뭔가 통하는 데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짚었네. 그것도 완전히.

 

7장 진태의 집

새벽 두 시경. 진태와 기주가 식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기주: 사실 언어영역 듣기는 기본으로 먹고 들어가는 거야. 여기서부터 아리까리하기 시작하면 뒤쪽에 어려운 문제 나올 때 초조해지거든. 그러니까 이 다섯 문제는 무조건 맞춘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집중해서 풀어야 돼.

진태: 야, 그게 너 같은 애들이나 먹고 들어가는 거지. 난 어렵기만하드만.

기주: 원래 듣기 평가는 다 요령이다? 시험지 받자마자 문제 나오기 전에 어떻게든 빨리 보기부터 읽고 들어가야 돼. 그 보기에 나오는 내용을 집중해서 듣다 보면 답이 보여. 보기를 못 보고 들으면, 나중에 무슨 얘기했는지 기억하기 힘들거든. 그래서 들으면서 오답은 바로바로 그어 놓는 거야.

진태: 대박!

기주: 그런데, 가끔씩 진짜 헛갈리는 문제가 나오거든? 그때는 확실한 오답만 그어놓고 나중에 고민해야 돼. 거기서 어물거리면 다음 보기를 못 보고 문제를 들어야 되는데, 그럼 또 헛갈리거든.

진태: 이야~~~ 별거 아니네!

기주: 그럼 이거 한번 풀어 봐.

진태: 지금? 야 무슨, 배우자마자-

기주: 하기 싫은 거부터 먼저 해야 돼. 좋은 것만 해버릇 하면-

진태: 알았어, 할게, 한다고!

기주: 그리고 틀린 문제는, 그 원인과 정답 풀이 방식을 문제 푼 그날 자기 전에 꼭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하고 자야 돼.

진태: 아, 그만 좀 해! 내가 너 때문에 서울대를 가던지 해야지……

기주: 같이 가자! 난 꼭 만점 받아서 서울대 갈 거야. 그 놈의 만점, 그 지긋지긋한 베란다 창고-

진태: 너 딴 데 가서 그렇게 진지모드로 말하고 다니지 마라. 왕따 당한다.

기주: 안 그래.

진태의 휴대전화가 진동 모드에서 울린다.

기주: 안 받아?

진태: 귀찮아. 넌 무슨 과 갈 거냐?

기주: 어? … 고민중이야.

진태: 웬 고민? 어디 갈지 안 정했단 말이야?

기주: 나중에, 점수 보고 결정하려고.

진태: 병신, 그게 뭐냐!

기주: 누가 병신이야! 너나 잘해!

진태: 새끼, 웬 오버? 야, 너같이 서울대 서울대 노래 부르는 놈이 정작가고 싶은 과는 없다는 게 신기해서 그런다. 그렇게 그냥 서울대면 아무 과나 상관없이 다 좋냐?

기주: 누가 가고 싶은 과가 없대! 고민 중이라니까. 그러는 넌?

진태: 나? 방송연예과나 연극영화과, 아님 연기과! 좆나 자세하지?

진태의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린다.

기주: 전화 받아, 괜찮으니까.

진태가 스위치를 눌러서 꺼버린다.

기주: 거기 나오면 비전 있냐? 엄마는 아셔?

진태: 내가 하고 싶은 거 한다는데, 누가 뭐래? 그리고 요즘은 연예인이 돈 제일 잘 벌어! 이 형님의 넓고 깊은 경험과 다채로운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이면, 심연의 연기를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지 않냐?

기주: 공부하는 일진의 고뇌, 뭐 그런 거?

진태: 껌이지! 일단 학원물부터 접수한다! (사이) 꼭 인(In) 서울 4년제로 간다.

기주: 그건 당연하지!

진태: 병신아, 연기과 같은 건 전문대, 지방대 좆나 많아! 근데 꼰대가 인 서울 4년제에 가야 입학식에 온다고 그랬단 말이야. 좆나 치사하지 않냐?

기주: 아빤 어디 계신데?

진태: 회사가 지방에 있어서 따로 살아.

기주: 그럼, 주말에만 올라오셔?

진태: 말 마. 꼰대 본지 백만 년이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사이) 초딩 땐가 엄마랑 엄청 싸우더니, 그대로 나가서 안 들어오더라고. 처음엔 아빠만 미웠는데, 나중엔 엄마도 미워지더라.

기주: 왜?

진태: 몰라, 그냥. (사이) 엄만, 아빠 없이도 너무 잘 살아.

101호가 취해서 들어온다.

101호: 아들~~ 아직 안 자? 어머? 이게 누구야!

진태: 어, 엄마. 기주가 나 공부 좀 가르쳐주느라고.

기주: 안녕하세요.

101호: 그래, 잘 왔다. 우와 우리 아들이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우리 아들 뽀뽀! (진태를 끌어안고 뽀뽀) 우리 기주도 뽀뽀! (기주를 끌어안으려 하자)

진태: 왜 그래! 취했어?

101호: 취하긴, 아들 친군데 뭐 어때? (기주를 끌어안고 마구 뽀뽀. 기주의 입술이 101호에게 끌려간다.) 어머? (사이) 기분이다! 기다려! 아줌마가 완전 맛있는 야식 만들어줄게. (안방으로 들어간다.)

진태: 맛이 갔네, 갔어. (사이) 야!

기주: 어, 어?

진태: 웬 멍을 그렇게 때려?

기주: 아, 아냐. 이제 뭐 할까?

진태: 잠깐 쉬자. 아, 딱 담타였는데. 나갈 수도 없고.

기주: 끊어! 엄마가 모르셔? 냄새 날 텐데.

진태: 몰라, 자기도 피우거든.

기주: 니네 엄마 원래 이렇게 늦게 들어오셔?

진태: 일 한다고 맨날 술 마시고. 아니면 알바 한다고 늦고.

기주: 무슨 알바?

진태: 몰라 나도, 고객을 만난다는데. 뭘 하는 건지.

기주: 와, 멋있다!

진태: 멋있다고?

기주: 응, 우리 엄마는 집 지키는 귀신처럼 집에만 있어. 옷도 저렇게 멋있게 안 입고. 가끔씩 녹음실에서 연락 오면 땜빵 가는 게 다야. 숨 막혀.

진태: 니네 엄마가 맨날 술 먹고 들어와 봐라, 그게 멋있나. 옆집 아줌마는 아예 대놓고 수군대.

기주: 뭐라고?

진태: 바람피우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걸 엘리베이터에서 나 듣는대 그냥 얘기해. 미친년.

기주: 진짜 웃긴다. 결혼도 했는데 무슨 바람을 피운다고 그래?

진태: 이런 초글링 같은 새끼. ‘사랑과 전쟁’도 못 봤냐? 아 참! 너네 TV 없지. 솔까, 결혼해도 좆나 바람 피워!

기주: 말도 안 돼. 우리 엄만 그럴 리 없어.

진태: 야, 니네 엄마는 남편도 없으니까, 바람이 아냐!

기주: 그럼 니네 엄마는?

101호가 가슴골이 다 보이는 나이트 가운에 얇은 시스루 카디건을 걸치고 등장한다.

진태: 나 참, 왜 그러고 다녀!

101호: 떽! 엄마한테! 진태 너 심부름 좀 해! 독일식 팬케이크 만들어줄 테니까 계란하고 우유 큰 통 좀 사와. 안방에 엄마 지갑 있어.

진태: 어? 오케이! (기주에게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며 안방에 들어간다.)

101호: 우유 유통기한 확인 하는 거 잊지 말고! (소파에 앉아 기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주: (짐짓 공부하는 척) expiration date.

101호: 뭐?

기주: 아, 유통기한이요, 영어로 엑스퍼레이션 데이트.

진태: (안방에서 나와 휴대전화를 챙겨 퇴장하며) 금방 갖다 올게!

기주: 야, 같이 가-

101호: 잠깐 좀 쉬지 그래? (옆 자리로 오라고 손짓한다)

기주: 네? … 네.

기주가 소파로 간다. 101호가 소파에 몸을 푹 기대고 앉아 고개를 젖히자 목덜미와 가슴골이 다 드러난다. 사이.

101호: 뭘 봐?

기주: 아, 아뇨…….

101호: 기주, 여자 친구 있니?

기주: 아뇨! 공부 해야죠.

101호: 뭐 어때? 솔직히 말해 봐. 아까 뽀뽀할 때 보니까 있는 것 같던데?

기주: 아, 그건…… 아녜요!

101호: 그건?

기주: 그건… 그냥 느낌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101호: 아니야! 느낌이 어땠는데?

기주: 모, 모르겠어요. 그냥… 맛있었어요.

101호: 대학가면 여자 꽤나 울리겠구나.

기주: 네?

101호: 아니다. 어머! (등에 손을 대보더니, 카디건을 벗으며 등을 돌린다) 지퍼 올리는 것 좀 도와줄래?

기주: 아, 네. (지퍼를 올리는 손이 떨린다.)

101호: 여자 친구 있는 거 맞네. 많이 해본 솜씬데?

기주: 아, 아니에요, 진짜!

101호: 농담이야. 엄마 거 많이 올려 줬구나? (짧은 사이) 엄마랑 뽀뽀도 자주 해?

기주: ……

101호: 안 해?

기주: … 우리 엄만 그런 거 싫어해요.

101호: 아줌만 좋아하는데. (사이) 기주야, 부탁 하나 들어줄래?

기주: 부탁이요? 뭔데요?

101호: 우리 진태, 내년 수능에서 전국 30프로 안에만 들 수 있게, 네가 좀 도와줄래? 그래야 서울 안에 있는 대학에 간다는데-

기주: 제가 그걸 어떻게-

101호: 그렇게만 해주면 기주가 원하는 거, 내가 다 들어줄게.

기주: 정말이요?

101호: 그럼! 나 약속은 무조건 지켜!

기주: 원하는 거…… 뭐든지 다요?

101호: 그렇다니까. 학원에서 모의고사 볼 때마다, 학교에서 전국연합모의고사 볼 때마다 진태 성적 올라가면, 그것도 따로 상 줄게.

기주: 무슨 상이요?

101호: 맛있는 거.

기주: 네?

101호: 뭐든! 그 대신 이거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된다?

기주: … 네.

101호: 우리 기주가 원하는 게 뭘까?

기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어? 엄마가 오래요. 가볼게요.

101호: 펜 케이크는! 정말 맛있는데…….

기주: (가방을 챙기며) 저도 먹고 싶었는데. 다음에 꼭이요! 안녕히 주무세요!

 

8장 놀이터

진태가 땀에 범벅이 된 채,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와서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두들겨 맞은 듯 몰골이 엉망이다.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피운다. 동대표가 캔 맥주 따위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등장한다. 진태 당황한다.

동대표: 괜찮아. 아직 장초인 것 같은데. (진태 옆에 앉는다.) 아저씨 목소리 못 들었어? 도와주려고 한 건데, 왜 도망갔어.

진태: 쪽팔리잖아요.

동대표: 뭐가 쪽팔려. 그놈들은 세 명이었는데… 어휴 많이 맞았구나.

동대표, 비닐봉지에서 생수를 꺼내, 품 안에 있던 손수건을 적셔서 진태의 얼굴을 닦아준다. 간간이 진태의 신음소리.

동대표: 오랜만에 맞아보니까, 기분이 어떠냐?

진태: 놀리지 마요! 아파 죽겠는데.

동대표: 그러니까 이제 남 때리는 건 그만 두라는 얘기다.

진태: … 안 그래도 계속 전화 오는 거 쌩깠는데, 재수 없게 편의점 앞에서 딱 마주쳐서. 이제 그만 두겠다고 했더니 다구리를 놓네요. (사이) 기주 새끼 알면 안 되는데……

동대표: 그럼, 이제 심부름은 안 시킨대?

진태: 몰라요.

동대표: 괜찮아, 얘기 해.

진태: … 상납하래요. 일주일에 한 번씩.

동대표: 얼마나?

진태: 미리 알려준대요.

동대표가 진태의 얼굴을 다 닦았다. 비닐봉지에서 캔 맥주를 꺼내서 진태에게 준다.

동대표: 얼굴에 대고 있어. 붓기 좀 가라앉을 거다.(자기가 마실 캔 맥주 하나를 따며) 엄마한테 안 들키겠어?

진태: 심부름 나왔던 건데, 그 사이에 자나 봐요. 아침에 엄마 깨기 전에 나오면 돼요.

동대표: 어때, 좀 시원하지?

진태: 네. (맥주 캔을 손으로 꽉 쥐어보며) 이거 손으로 꽉 쥐고 있으면 되게 시린데. (사이) 어렸을 때, 일주일 내내 열이 계속 40도를 왔다 갔다 한 적이 있었대요. 다른 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머리가 정말 시원한 거예요. 온몸은 불타는 사막에 있는데, 머리만 북극에 있는 것처럼. 알고 봤더니 냉장고에 차갑게 해둔 맥주 캔을, 아빠가 양 손에 쥐고 있다가 한 손씩 번갈아서 이마를 짚어줬대요. 일주일 내내 잠도 못 자고 옆에서.

동대표: 참 좋은 아빠셨구나. 그런 아빠가 있었으면 아까 그 나쁜 새끼들 다 혼내주셨을 텐데.

진태: 연락도 없는데요 뭐. 그리고 아빠는 그냥 참으라고 했을 걸요?

동대표: 그럼 아빠 대신 이 아저씨가 도와줄까?

진태: … 됐어요.

동대표: 괜찮아! 내 아들 같은 진태 도와주는 건데 뭐 어때? 그 놈들 어디 가둬놓고 손발톱이라도 확 뽑아주리?

진태: 지금 농담할 기분 아녜요.

동대표: 허 녀석. 왜, 보복이라도 당할까 봐?

진태: ……

동대표: 그놈들, 공부도 얼추 하는 놈들이 그런 짓거리를 한다고?

진태: 요즘 이 동네 일진, 집도 부자고, 공부도 좀 하는 애들이에요. 엄마들이 매일 선생님들한테 찾아오고, 따로 만나고…… 그래서 걔들한텐 아무도 뭐라고 못해요. 누구 하나 왕따 만드는 건 그냥 재미로 하니까.

동대표: 재미로 왕따를 시켜? 동네가 썩어 돌아가는 구나. (사이) 그 자식들 이름하고 몇 동 사는지 좀 알 수 있을까?

진태: 셋 다 106동 살아요. 84평짜리. (혼잣말 하듯) 좆밥 새끼들……

동대표: 106동이라…….

진태: 근데 왜요?

동대표: 그놈들 다 가둬놓고 정신교육이나 시킬까? 아저씨는 돈 벌고 너는 편하고.

진태: 네에?

동대표: 아, 농담이야! 이럴 땐 꼭 진지하드라. 공부할 때 좀 그래 녀석아.(사이) 너 한강 다리 걸어서 건너 본적 있니?

진태: 아니요?

동대표: 다리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갈 수 있는 길이 몇 개일까?

진태: 두 개요. 돌아가거나 건너가거나.

동대표: 다리 위, 그 한가운데에 있으면 시작과 끝 사이에 있는 것 같지. 마음만 먹으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고, 또 건너가고 싶으면 한달음에 뛰어갈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데, 정답은 네 개야.

진태: 네 개요?

동대표: 막상 살다보면 그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때가 있어. 길이 그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막혀버리거든. 처음엔 어떻게든 뛰쳐나가겠다고 독 안에 든 쥐처럼 뛰어 다녀. 하지만 결국 나갈 길은 없다는 걸 알게 돼. 그럼 그 다음엔, (손짓과 함께) 피유우우우우우…… 영원히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거지. 이게 세 번째야.

진태: 그럼 네 번째는요?

동대표: 그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손길이지. 제우스처럼. 다리 위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쥐새끼 꼬리를 잡아 올려서 땅 위에 다시 안착시키는 신. 넌 어떤 길을 가고 싶니?

진태: (사이. 동대표를 보고) 아저씨는요?

동대표가 진태를 바라본다.

 

9장 진태의 집

밤. 진태와 기주가 캐주얼한 차림으로 가방 없이 들어온다. 기주는 거실소파에 앉는다.

기주: 무슨 돈을 이렇게 써! 아웃백, 노래방에, PC방까지, 나 이렇게 하루 종일 얻어먹고 다녀도 되는 거냐?

진태: 오늘 형님 생일인데 이 정도는 껌이지! 야, 엄마가 쟁여놓은 맥주랑 안주도 있다. (부엌에서 캔 맥주와 안주거리를 들고 온다.)

기주: 그거 먹어도 돼?

진태: 우리 엄마 신경 안 써. 빈 캔만 잘 치워 놓으면 아마 자기가 먹은줄 알걸?

기주: 그래도 그렇지-

진태: 신경 꺼! 아, 맨날 이렇게 토요일에 내 생일이면 좋겠다. 하루 종일 놀아도 되고. 야,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엄마 완전 늦을거래.

기주: 아쉽다. 그럼 오늘도 독일식 팬케이크는 못 먹는 거야?

진태: 으아, 그거 진짜 맛없어. 그때 너 완전 마루타 될 뻔 했다. 자고가는 거다, 알았지?

기주: 엄마가 안 된다고 할 텐데.

진태: 녹음실 가서 내일 아침에 온다며, 아님 전화 하지 말고 그냥 밤새 놀다가, 새벽에 가면 되지 뭐.

기주: 뭐하고 놀 건데?

진태: 이 새끼. 네가 그동안 우리 집에 순순히 따라온 이유를 내가 모를 줄 아냐?

기주: 뭐, 뭔데?

진태: 겉으로는 팬케이크 어쩌고 하지만, 형은 이미 그게 구라라는 걸 진작부터 꿰뚫고 있었다. 순순히 불어라.

기주: … 무슨 소리 하는-

진태: 너 TV에 눈독 들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난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나 공부 가르치러 왔다고…… 그래서! 내가 오늘 특별히 엄마한테 유료 영화를 다 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는 거 아니냐.

기주: 우와, 진짜!

진태: 죽이지? 뭘 보나… 극장 동시 상영관도 있고, 아니다. 19금 보자, 19금!

기주: 19금?

진태: 그래! 소라 언니 나오는 걸로 보자.

기주: 이소라? 이소라가 19금이 있어?

진태: 이소라 말고, 아오이 소라 인마! 키모찌 이이~! 이이~! 아~! 아~! 이따~이! 다메~!

기주: 아 그만 좀 해!

진태: 어때, 연기 죽이지? 으아~~~ 참을 수가 없네, 일단 한잔 하자!

진태가 캔 맥주를 따서 하나를 기주에게 주고 자기도 손에 든다.

기주: 나 술 못 먹-

진태: 원 샷이다, 이거 맨 정신에 못 봐. 남기면 오늘 내가 사준 거 다 반띵이다.

기주: 자, 잠깐!

진태: 왜 또, 이 쪼잔탱이야!

기주: 그게 아니라! 이거 마시는 대신 조건이 있어.

진태: 아 무슨 조건!

기주: 너 공부 열심히 해서 30프로 안에 드는 거. 한걸음씩 천천히, 일단 학원 모의고사부터 시작해서 내년 4월 연합모의고사, 그리고 수능까지! 대신 시험 잘 보는 요령 다 가르쳐줄게. 지난번처럼!

진태: 아 이 새끼, 오늘 같은 날 꼭 이렇게 분위기 깰래?

기주: 안 그러면 안 마신다.

진태: 아 누구 좋으라고 마시는 건데… 좋아! 네가 원하는 거니까, 30프로 아니라 까짓것 3프로 안에 들어주마! 이기주만 옆에 있으면 그 정도야 뭐.

기주: 좋아, 약속 한 거다!

기주, 진태: 짠!

두 사람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 기주가 사래에 들려 기침을 한다.

진태: 쪼다 같이 꼭 티를 내요. 잠깐만 기다려. (리모콘으로 영화를 검색한다.) 찾았다! 찾았어! 야, 이거어때, ‘불륜의대가代價’, 제목 죽이지!

기주: (기침하며) 난 ‘G컵 탐정 호타루’-

진태: 아, 가만 보면 이런 초글링 같은 새끼들이 꼭 가슴 큰 것만 밝혀요. 야, 밤새도록 보여줄 테니까 일단 이거부터 보자!

영화의 BGM이 흐르는가 싶더니 곧 여자와 남자의 교성이 어우러지고, 진태와 기주의 얼굴이 붉어진다. 진태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진태: 아이, 누구야 이 타이밍에.

진태가 전화를 들고 퇴장하고 그 사이 기주는 갈증이 나는 듯 새 맥주 캔을 따서 들이킨다. 진태가 외투를 입고 등장한다.

진태: 잠깐 나갔다 올게. 좀 보고 있어라.

기주: 어… 어? 어디! 나 혼자 두고 가면 어떡해!

진태: 괜찮아, 인마. 엄마 어차피 새벽에 올 거야. 한두 시간만 있다가 올게.

기주: 어디 가는데!

진태: 어, 그게, 그러니까, 이 형님이 인기가 좀 많냐. 1학년 똘마니들이 보호해 줘서 고맙다고 내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나. 가서 얼굴 좀 디밀어야 되지 않겠냐. 형님 된 도리로서.

기주: 이제 그런 어설픈 일진 좀 끊어. (한숨) 얼른 갔다 와!

진태: 알았어, 인마. 잘 보고, 너 아무데서나 딸 치면 죽는다. 우리 엄마 귀신같이 안다 그거!

진태 퇴장. 기주가 영화를 보다가 흥분을 견딜 수 없어서 수음을 하기 시작한다. 빨리 끝내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다 거실에 놓여있는 액자를 보고는 그 액자를 집어 들고 수음에 열중한다. 절정에 다다른 순간 101호가 들어온다.

101호: 너 뭐하니?

기주가 황망히 사태를 수습하고 TV를 끄려다가, 당황해서 그만 리모콘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영화는 그대로 흘러간다.

101호: 괜찮아, 그냥 편하게 앉아.

기주: (울음을 터뜨릴 듯) 죄송해요, 전, 그냥… 죄송해요.

101호: 쉬잇! 아무소리 안 해도 돼. (기주 옆에 가서 앉는다.) 진태는, 어디 갔니?

기주: 동생들이 선물 준다고 방금 나갔어요. 아줌마 정말 죄송해요. 저희 엄마한테만-

101호: 괜찮다고 했지? 그런 건 다 자연스러운 거야. 진태도 늘 그래. (사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기주: 네…….

101호: 내 사진은 왜 들고 있었어?

기주: ……

101호: 괜찮아.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그냥 궁금해서 그래.

기주: 더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어요. 잘 되는 것 같고… 이제 진짜 안그럴-

101호: 기주도 나중에 크면 저렇게 멋있게 사랑하는 거야. (사이) 저 여배우 참 섹시하다, 예쁘고.

기주: … 아줌마가 더 섹시해요.

101호: 어머, 진짜? (사이) 기주야.

기주: 네?

101호: 우리 약속한 거 기억하지?

기주: 당연하죠. 오늘 진태 저하고 약속했어요! 30프로 아니라 3프로 안에도 들어갈 수 있대요!

101호: 그래. 그럼 기주는 나중에 뭐 해달라고 그럴 거야?

기주: 그건……

101호: 왜? 말하기 힘들어?

기주: 아니, 그게 아니라.

101호: 괜찮아, 얘기해봐. 이미 생각 다 했잖아.

기주: 저…… 나중이 아니라 지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101호: 어머? 지금? 여기서?

기주: … 안돼요?

101호: 아니, 그게… 너…

기주: 왜요?

101호: 아, 몰라, 일단 얘기부터 해 봐. 듣고 나서 결정하게.

기주가 101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이야기 한다. 101호, 기주의 이야기를 듣더니 한동안 어이상실, 곧 박장대소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주가 당황하지만 101호는 아랑곳 않고 웃다가, 귀여운 듯 기주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101호: 사실 아줌마 좀 실망인데? 잔뜩 올려놨다가…… 그래. 만약 이번 방학 마지막 학원 모의고사에서 진태 성적 많이 오르면, 기주 그 소원 내가 꼭 들어줄게. 아줌마도 그러고 싶었어.

기주: 저, 정말요?

101호: 그럼! 난 거짓말 안 해! 그리고 보너스로, 그 주 토요일에……

101호가 기주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한다. 기주가 순간 놀라서 101호를 바라보자, 101호가 기주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키스한다. 기주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다 한 손을 가랑이 사이로 넣어서 꼭 잡는다. 기주의 다리에 경미한 경련이 일어난다.

기주: (안절부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저, 이만 가볼게요!

101호: 저거 다 안 보고 가?

기주: (급하다) 아니요, 가볼게요!

101호: 잠깐!

기주: … 네?

101호: 전화 좀 줘봐. (기주의 전화에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버튼을 누른다. 집 안 저쪽에서 또 다른 휴대전화가 울린다.) 내일 진태 야구 보러 간대.

기주: 그런데요?

101호: 팬케이크 먹으러 올래? 팬케이크 위에 복숭아 반 썰어서 얹고 그 위에 체리까지 올려놓으면 진짜 맛있거든.

기주: 네? (사이) 네! 안녕히 계세요! (허겁지겁 퇴장한다.)

101호: 미리 문자하고.

101호가 손에 걸리는 캔 맥주를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멍하니 TV를 본다. 교성 소리.

 

10장 미연의 집

비 내릴 듯 우중충한 날씨의 저녁. 클래식이 흐른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동대표가 가느다란 종이 박스에 포장된 와인을 들고 미연의 거실을 서성인다. 동대표는 살짝 긴장한 듯하다. 품 안에서 작은, 반지를 넣어둘 정도 크기의 박스를 꺼내 잘 있나 확인하다가 인기척이 들리자 얼른 다시 집어 넣는다. 안방 문이 열리고 미연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나온다.

미연: 앉아 계시지 않고.

동대표: 아, 음악이 좋아서… 왠지 그냥요. 토요일인데, 집에 계시네요.

미연: 네, 뭐 딱히 갈 곳도 없고요.

동대표: 저,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와인인데, 묵직하고 드라이 한 편입니다.

미연: … 감사해요. 이제 앉으세요.

동대표가 소파에 앉는다. 미연이 커피 잔을 가져다준다.

미연: 오신다고 해서 미리 내렸는데, 뜨거우세요?

동대표: 좋은데요? (사이) 참, 아까 기주 봤는데 진태네-

미연: 학원에 자습한다고 갔어요.

동대표: 진태랑요?

미연: 네, 왜요? 공부 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당직 선생님한테 물어본다고-

동대표: 진태는…… 아뇨. 그렇군요.

미연: 그런데 어쩐 일로……

동대표: 아, 뭐, 그냥요, 별거 아닙니다. 하하… (사이) 식사는 하셨어요?

미연: 네, 방금 막. 하셨어요?

동대표: 아, 네… 저도. (사이) 아, 저 와인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바로 열어도 괜찮은데-

미연: 여자 혼자 있는 집에서 술은 좀…

동대표:아, 이런, 그렇죠.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동대표가 휴대전화를 받는다.

동대표: 아 네. 보내셨다고요. 이따 확인하고 문자 드리겠습니다. (끊는다.) 아, 죄송합니다. 이번에 아이들 세 명 정도가 새로 고시원에 등록할 거라서요. 셋 다 106동 삽니다. 84평형이죠. 공부도 꽤 잘하는 놈들이라… 아! 다 기주랑 같은 학교일 겁니다.

미연: 거기 그렇게 들어가기 힘들다더니, 아닌가보네요.

동대표: 아하, 그건 아니고, 어떻게 그 어머니 중에 한 분이 영국에 계신 사장님하고 바로 연줄이 닿았나 봅니다. 원래는 신청서 써 놓고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데, 다른 어머니들한테 제 입장이 좀 난처하게 됐지 뭡니까. (너털웃음. 다소 시니컬해진다.) 하긴 뭐 그런 집들이야 넘치는 게 돈이니까요.

미연: 왜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하시죠?

동대표: 그냥,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사이)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 고시원은 관리감독이 철저하거든요. 일단 들어오면 친구는 물론 아무하고도 말을 못해요. 또, 자기가 짠 진도율을 못 끝내면 총무 승인 없이는 방에서도 못 나옵니다. 학원이든 학교든 시험 본 결과는 다 온라인 게시판에 공개되고, 세 번 연속 성적이 떨어지면 자동 퇴실조치 됩니다. 기를 쓰고 열심히 할 수밖에 없죠.

미연: 공부는 철저하게 자기주도 학습이 주가 되어야 하고,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효과가 크다고 봐요. 고시원 같은 곳은-

동대표: 네, 맞습니다! (사이) 그래서 말인데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어… 그러니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오해마세요. 사실… 그러니까…

미연: 그러니까?

동대표: 가… 가정이란 건 엄마, 아빠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연: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동대표: 그러니까, 기주는 특히 아버지의 엄격한 권위가 있는 곳에서 공부를 하는 편이 좀 더 발전적일 겁니다. 그 고시원은 그런 아버지의 권위가 집적된 공간입니다. 무… 물론, 그러니까 제가 기주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제가- (마음먹은 듯 양복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동대표가 놀라서 휴대전화를 받는다.

동대표: 네, 아 예! (사이) 제가 지금 회의중이라서요, 저녁이요? 한두 시간 정도 후에 전화 드리면 안 될까요? 네, 네. (끊고) 죄송합니다. 워낙 일이…

미연: 다 여자들한테만 전화가 오네요. 우린 회의중인데.

동대표: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미연: 그 애는 왜 자살을 했을까요?

동대표: 네?

미연: 그 고시원에서 죽었다는 애 말이요. 왜 자살을 했냐고요.

동대표: 글쎄요. 왕따를 당했기 때문 아닐까요? 이상한 소문도 돌았고-

미연: 아니. 공부를 못했으니까 죽은 거예요. 성적비관이죠. 그런 애들은 고시원이 아니라, 부모가 돌봐주는 집에서 공부를 했어야 해요. 충분히 대화도 나누고, 정서적인 교감이 친근하게 있을 때 아이들은 좋은 성적을 내거든요. 지금 대표님 말씀하신 고시원 교육방법에는 자유의지가 빠져 있어요. 애들 고문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실토할 때까지 때리는 거나, 좋은 학교 들어갈 때까지 죽도록 공부시키는 거나 뭐가 달라요?

동대표: 인간은 모름지기 맥락 속에서 성장합니다. 아무리 의지가 뛰어나더라도 누군가 끊임없이 방향을 잡아주지 않으면 표류하기 십상이라는 얘기죠.

미연: 맥락은 일관된 흐름이 있어야 생기는 거 아닌가요? 제가 보기엔 지금 고시원은 이도저도 아니에요.

동대표: 필드 나가려면 제대로 된 프로한테 골프 레슨부터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고시원도-

미연: 처음엔 고시원에서 귀신만 보면 서울대를 간다더니, 지금 하시는 말씀은-

동대표: 전에도 말했지만, 귀신이 나왔다는 건 분명 사실입니다! 그 해에 귀신을 봤다는 애들이 좋은 대학을 간 것도 그렇고요.

미연: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 비좁은 방에다가 애들 가둬놓고,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까지 다 감시한다면서요. 성적은 다 공개하고, 남들보다 더 잘할 때까지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등은 한 명 뿐인데. 그러니 멀쩡한 애들도 미쳐서 귀신보고, 아님 성적비관으로 자살-

동대표: 아까부터 성적비관, 성적비관 하시는데, 그때 그 자살한 아이는 성적 비관이 아니라, 왕따 때문에 죽은 겁니다.

미연: 참 독특하시네요.

동대표: (어이없다.) 네?

미연: 그 애가 왕따로 죽었다 쳐요. 그럼 뭐가 좀 달라지나요?

동대표: 성적이야 자기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지만, 왕따는 자기 의지랑 상관없이-

미연: 왕따 당하는 애들, 따지고 보면 약점을 노출한 스스로한테 더 잘못이 있는 거예요. 사춘기 아이들은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게 당연한데, 그런 표적을 제공한다는 건, 결국 남의 비행을 조장하는 거니까.

동대표: 말씀이 너무 잔인하시네요.

미연: … 대표님은 여름에 모기들이 윙윙거리면 어떻게 하세요?

동대표: 그야 당연히 죽여야죠. 안 그러면 전 잠을 못잡니다.

미연: 왕따 당하는 애들. 어쩌면 그런 존재 아니었을까요, 모기.

동대표: 모기, 모기요! (사이) 보기보다 참 냉정하시네요. 정말 의욉니다!

미연: (사이) 전, 대표님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게 더 이상해요. 그러니까 거기 애들이나 잘 가려 받으세요. 괜히 왕따 당할만한 애들이나, 성적비관 할 만한 애들 데려다 놓고 또 자살하게 만들지 말고.

동대표: ‘할 만한’ 애들이요?

미연: 평생 돌을 닦아 봐요, 그게 다이아몬드가 되나. 지금 대표님이 고시원에서 하시는 일, 그저 애들 죽이는 일 밖에 안 돼요.

동대표: 그만둡시다. 원래 이런 얘길 하자고 온 게 아니었는데-

미연: 그러면요?

동대표: 아니요, 오늘은…… 다음에 다시 말씀 드릴게요. (긴 사이, 분위기를 바꿔서) 아 참! 진태는 다음 달부터 고시원에 다니기로 했습니다. 기주랑 친해서 같이 다니면 서로 의지도 되고 좋을 텐데 참 아쉽네요.

미연: (어이없다.) 아! 그 얘기 하러 오신 거였어요? 101호 아줌마가 부탁하던가요? 됐네요. 저는 그렇게 몸이나 파는 여자처럼 하고 다니는 그 집 엄마랑은 달라요. 그 집이야 엄마가 매일 밖으로 나돌면서 술이나 마시고, 애 교육 하나 어쩌지 못하고 벌벌 떠니까 우리 기주까지 꼬여가면서 지 자식 고시원 보낸다고 발버둥 치겠지만, 기주는 이미 10년 전부터 제 힘으로 다 해오고 있고, 단 한 번도 어긋난 적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그 101호 애랑 우리 기주랑 엮지 말아주세-

동대표: 지금까지는! 어긋난 적… 없었겠죠… 지금까지는. (긴 사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가야겠습니다. (일어서며) 다음에 다시-

미연: (앉은 채로) 대표님,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동대표: 전공이요? 산업디자인입니다.

미연: 어디 나오셨어요?

동대표: 전에 말씀 드렸는데, 캠브릿지 나왔습니다.

미연: 캠브릿지 어디요?

동대표: … 그건 왜 갑자기-

미연: 킹스 컬리지? 지저스 컬리지?

동대표: ……

미연: 쉽게 지어낸 건 쉽게 들통 나죠. (사이) 캠브릿지에는 단과대학이 서른한 개나 있다던데. 지저스 컬리지는 미대가 유명하대요. 다음에 다시 뵐 일은 없을 것 같네요. 현관문은 나가시면 제가 알아서 닫을게요.

미연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간다. 동대표 그 자리에 서서 닫힌 안방을 바라보다 안주머니에 있는 선물을 꺼내 꽉 쥐어 찌그러뜨린다.

 

11장 놀이터

학원이 끝난 새벽. 기주와 진태가 가방을 메고 서 있다.

진태: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시험 망쳤어?

기주: 열다섯 개. 이러면 서울대도 못 가. (사이) 일등은 만점 받았고.

진태: 네가 웬일이냐! 괜찮아,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데, 기운내 인마!

기주: (휴대전화에서 문자 메시지 도착 알람이 연거푸 들린다. 기주 액정을 보고 있다.)

진태: 야, 뭐해! 누구야?

기주: 어? 아니, 엄, 엄마!

진태: 그러고 보니까 너 요 며칠 좀 이상해! 나랑 얘기도 잘 안 하고. (이상한 듯) 너… 설마, 깔 생겼어?

기주: 아니!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사이) 참, 넌 시험 잘 봤어?

진태: 일찍도 물어 본다. 어땠을 것 같냐? (사이) 놀라지 마라. 4등급 턱걸이 정도는 될 것 같아!

기주: (정말 기뻐한다) 4등급? 완전 축하해! 어떻게 그렇게 성적이 금방 올랐어! 잘됐다 잘됐어!

진태: 고마워. 다 네 특훈 덕분이야! 이제 실기가 문제지 뭐. 레슨도 받아야 하고.

기주: (불안하다.) 난 이제 어떡하지? 엄마가 물어볼 텐데.

진태: 그러니까 너도 나랑 같이 고시원 다니자. 난 다니기로 결정 했어!

기주: 고시원? 네가 웬일로?

진태: 사실 나…… 지난 주 토요일에 고시원 갔었거든!

기주: 고시원? 지난 주 토요일? 가만… 그날 너 나랑 생파…… 너 설마!

진태: 미안.

기주: 어떻게? 누가 데려갔는데!

진태: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기주: 야, 나만 혼자 남겨 두고, 네 엄마 오셔서 얼마나 당황했는데. 넌 그때 치사하게 거짓말 치고 혼자 고시원에 갔었단 말이야?

진태: (갑자기 무섭게) 너도 말 안 했잖아.

기주: … 내가 뭘! … 뭘!

진태: (기주에게 헤드락을 걸며) 소라 언니 보고 딸 잡은 거 이 새끼야! 편의점 갔다 왔더니 너는 온데간데없지, 엄마는 안방에서 뻗었지, 소파랑 카페트에… 너 씨발 내가 엄마한테 안 들키려고 밤새 좆나 닦았다. 너야말로 어떻게 그 얘기를 지금까지 안 할 수가 있냐.

기주: 미안하다. 쪽팔려서…… 난 흘린 줄도 몰랐어. 근데, 귀신 본 거야 그럼?

진태: 그건 아니고, 두 시간 동안 복도에 앉아서 벽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만 들리더라. 그런데 솔직히 뭐랄까, 시험 볼 때 그 자신감이나 집중력? 찍는데도 그게 정답이라는 확신이 팍팍 드는 거 있지? 완전 첫 경험이었다. 쌀 뻔 했어. 누구처럼.

기주: 아 미안하다니까! (한숨) 난 어떡하지.

진태: 어떡하긴, 나랑 같이 고시원 다니자, 응?

기주: …… 응.

진태: 진짜? 진짜지? 근데 어떻게?

미연이 놀이터로 들어온다.

미연: 스트레칭이 오래 걸린다 했더니 진태랑 얘기 하고 있었구나.

진태: 안녕하세요.

기주: 엄마, 그게…

미연: 그래, 무슨 재미난 얘기 길래 엄마 기다리는 걸 뻔히 아는 기주가 이러고 있었을까?

진태: 아줌마! 걱정 마세요. 이제 저, 기주 없어도 공부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기주 혼내지 마세요!

미연: 아줌마가 왜 우리 기주를 혼내? 그리고 그게 무슨 소리니?

기주의 휴대전화에서 문자메시지 도착 알람이 연거푸 들린다.

미연: 누가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내? 전화기 이리 줘-

진태: 지금까지! 기주가 많이 도와줘서 항상 고마웠어요. 오늘 기주 성적 많이 떨어진 것도 다 저 공부 가르쳐주느라고 그런 거니까 혼내지 말아주세요! 전, 지난주에 고시원 갔었거든요. 그랬더니 이번에 4등급 나왔어요! 제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인 서울로! 이제 기주 없이도 잘할 수 있어요! 저, 고시원도 곧 다닐 거예요.

미연: 축하 한다, 진태야. 운이 정말 좋았구나!

진태: 운이요? (기주를 슬쩍 보고) 다음 모의고사 때 알 수 있겠죠. 그게 그냥 운이었는지. 그럼 또 뵐게요. 간다, (기주에게만 슬쩍) 말씀 잘 드려! (진태 퇴장)

고양이 울음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린다. 기주, 움츠리며 미연을 붙잡는다.

미연: 이 새벽까지 쓸데없이…… 오늘 몇 개 틀렸니?

기주: 열다섯…… 개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미연: 열다섯! 열다섯 개라고 했어? 열다섯……개! (사이) 그럼 문제당 이십분이니까 삼백 분. 다섯 시간이네.

미연 앞서 가지만, 기주는 꼼짝하지 못한다.

미연: 거기서 뭐해?

기주: 엄마, 저 고양이가… 엄마, 엄마, 같이…

미연: 빨리 들어와. (기주의 애원을 뿌리치고 먼저 가버린다.)

기주: 엄마…… 엄마!

고양이 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12장 고시원

동대표가 램프를 켜자 방 안이 살짝 밝아진다. 의자에 앉아 있는 미연의 옷차림은 일부로 신경 써서 입은 듯 이전 장면에서와 달리 매우 섹시하다. 방에는 책상, 침대, 오디오 등이 있고, 오디오 옆에 작은 램프가 하나 놓여 있다.

동대표: 음악이나 들을까?

미연: ……

동대표가 오디오 버튼을 누른다. 빗소리가 들린다.

동대표: 그날 밤도 꼭 이렇게 비가 왔는데…….

동대표가 다시 버튼을 누르자, 빗소리 위에 프롤로그에 나왔던 빠른 템포의 가요가 흐른다. 동대표가 의자를 턱걸이 봉 아래에 놓고 올라선다.

동대표: 난 가끔 와서 이러고 서 있어. 그러면 그 귀신이 나타날까 싶어서. 한번은 하루 종일 서 있다가 바지에 오줌을 싼 적도 있어.

미연: ……

동대표: 나도 서울대 한번 가보게. (미연의 무반응에 혼잣말 하듯) 재미없어. 아! 뭐 하나 물어보자. 너 나랑 살래? 어?

미연: ……

동대표: 하, 하하! 농담을 하면 받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사이) 아침부터 다급하게 전화해서 여기 와보겠다고 한 사람은 너야. 그래, 이건 네 자유의지잖아? 응?

미연: 옷은 내가 벗어. 하지만 이건 강간이야.

동대표: 강간? 그럼 왕따는? 애가 왕따를 당하는 건 약점을 노출한 그 애한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그럼 강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창녀처럼 차려 입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너 같은 여자가 문제 아니냔 말이야!

미연: 그거랑 이건 달라.

동대표: 그래 달라. 넌 애초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왔으니까. 내 맥락 안에서 움직인 거지.

미연: 네 맥락은 하나 밖에 없어. 고시원을 미끼로 한 변태성욕.

동대표: 변태성욕? 변태성욕! 근데 어떡하나? 여기 대부분 다 돈만 많이 내면 들어오는데. 내가 고시원 미끼로 너한테 여기 와서 다리라도 벌리라고 했었나? 그 반대 아닌가? 언젠가 내가 누구 집에 와인까지 사들고 갔다가, 고시원이 애들을 죽이네 뭐네 하면서 내쫓긴 기억은 나는데. (사이) 겉으로 고상한 척 해도 결국 너도 똑같은 년이야. 근데 왜 마음이 바뀌었을까?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던 우리 기주가 성적이라도 떨어졌나? 어?

미연: ……

동대표: 문제 하나 낼까? 지금 넌 다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거야.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건너갈 수도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할래? (사이) 대답해.

미연: …… 고개 돌려.

미연, 옷을 벗는다. 조명 어두워진다.

서로 다른 고시원 방에 앉아 있는 기주와 진태에게 각각 탑 조명이 떨어진다. 두 사람은 방안의 물품들을 이것저것 만지거나 하며 휴대전화로 이야기 하고 있다. 기주가 고시원 방 안이 답답한 듯 천식 환자처럼 숨을 거칠게 쉬기 시작한다.

진태: 야, 쩐다! 모니터 좆나 크지 않냐? PC도 죽여!

기주: 그런 거 보자고 온 거 아니잖아. 귀신이나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진태: 니네 엄마 내일 아침에 온다며!

기주: 방이 너무 좁아. 답답해.

진태: 데려와 달라고 한 게 누군데! 귀신 볼 때까지 안 나간다며! 버텨 봐.

기주: 무, 무슨 이상한 소리 안 들려? (숨이 더 거칠어진다.)

진태: 쫄았냐? 난 아무 소리 안 들리는데? 아, 심심해. 오락이나 한판 할란다. 아, 그래! 넌 거기서 네가 좋아하는 ‘복기’나 해라.

기주: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복기?

진태 방의 조명 꺼진다. 기주의 방에만 조명이 남는다.

기주에게만 비추어져 있던 조명이 점점 더 좁아진다. 기주는 어린 시절 베란다 창고에서 틀린 문제를 외는 벌을 받고 있다. 문틈에서 새 들어온 실낱같은 빛이 기주의 얼굴 위를 세로로 가로지른다.

기주: (어린 목소리로) 엄마… 몇 시간 남았어? 엄마… 무서워! 나 나가면 안 돼? 엄마! 엄마! 엄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주가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여는 듯, 기주의 얼굴에 비친 조명이 서서히 커진다. 고양이 소리가 들려온다.

기주: (어린 목소리로) … 엄마?

갑자기 소름 돋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고양이 소리와 기주의 비명소리. 진태의 방에 조명 들어온다.

진태: 야! 여보세요! 너 씨발 야동 보냐? 거기서 이상한 소리 들려!

기주의 방에 여자의 울음 섞인 교성이 들린다. 기주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모니터를 향해 있고, 입술은 틀린 문제를 복기하듯 움직인다.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다.

진태: 그래, 거기서 G컵 탐정 호타루라도 찾아 봐라! 딸이라도 쳐라 쳐!

진태와 기주의 조명 어두워지고 동대표와 미연의 방이 밝아진다. 이후 조명은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정사를 끝낸 미연이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다. 방 저쪽의 화장실에서는 동대표의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미연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방 이곳저곳을 재빨리 뒤지기 시작하더니, 책상 서랍 속에서 사진 한 뭉치를 발견한다. 사진 첫 장부터 넘기기 시작하는 미연,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동대표가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나온다.

동대표: 내려놓아, 그 사진.

미연이 동대표를 본다.

다시 기주와 진태의 방. 진태가 기주에게 전화한다.

진태: 괜찮아?

기주: (숨이 거칠다. 계속 뭔가를 중얼거린다.)

진태: 괜찮냐고! 귀신 봤어? 귀신?

기주: 너 방금 모니터 보고 있었지…… 너도 봤어, 그거? 그거 귀신이었던 거지…

진태: 무슨 소리야, 난 아무것도 못 봤는-

기주: 귀신이었어…… 귀신이었다고……

진태: 야, 정신 좀 차려 봐! 아, 씨 너 왜 그래! 어? 여보세요! 야! 야! 아 나, 모니터에 뭐가 보였다는 거야 대체. 아 씨발 좆나 무섭네!

미연과 동대표의 방.

미연: 이 애, 누구야? 여긴 어디야? 이 애는 지금 어디 있어?

동대표: 뛰어내렸어.

미연: 어디서 뛰어내려! 다리에서?

동대표: 아니. 저기, 저 의자 위에서. (미연을 흉내 내며) “목은 어디다 매달고 죽었어요?”하, 하하!

미연: 너 뭐야! 다 사기야, 귀신도 다 가짜지! 비켜! 가서 사람들한테 다 말할 거야!

동대표: 아, 그 살인자들!

미연: 뭐?

동대표: 너 같이 잘난 년들, 그 애새끼들이, 내 아들 왕따시킨 거야. 왕따 당하는 애들을 모기라고 씨부리는 너 같은 년들 때문에, 그래서 내 아들이 자살한 거라고, 알아!

미연: 아니, 네가 죽인 거야. 그 애는 이 좁아터진 방 안에서 괴물로 자랐어.

동대표: 괴물? 기주처럼?

미연: 하? 우리 기주 같은 애가 세상에 또 어디 있어?

동대표: 아무렴, 없지! 기주처럼,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미니 버스에서도 덜덜 떨고, 천식환자마냥 켁켁 거리는 애, 없지!

미연: 너 그렇게 애 약점 잡아서 놀리는 유치한 인간이었어?

동대표: 아이구, 그게 약점이었구나. 약점은 그걸 노출한 사람이 잘못한건데, 가서 기주한테 그러고 다니지 말라고 해야겠네.

미연: 그건 병일뿐이야. 우리 기주한테는 아무 잘못 없어.

동대표: 그럼, 기주만한 애가 없지. 기주처럼 친구는 딱 한 명뿐이라, 걔한테만 평생 쌓을 우정 다 쏟아 붓는 애, 없지! 고양이 한 마리만 봐도 입에 거품 물고 쓰러지는 애, 없지! 아, 맞다! 기주처럼 반에서 2등하고도 1등 못했다고 엄마 무서워서 놀이터에서 떠는애, 없지. 눈 씻고 찾아 봐도 없어.

미연: 말도 안 돼는 소리 하지 마. 그거 다 네가 지어낸 거야.

동대표: 아, 그런가? 나한테 그런 상상력이 있었나? 나 중졸인데, 중졸!

미연: 중졸? 설마, 이 변태 새끼! 내 아들 기주 건드리면 넌 죽어! 알았어?

동대표: 변태? (큰 소리로 실소) 그래 변태! 내가 바로 그 옛날 고시원에서 아들 샤워 시켜준 아빠였어, 근데 그 다음날부터 난 변태가 됐어! 변태!

미연: (휴대전화를 찾는다.) 미쳤어! 신고할 거야!

동대표가 뭔가를 작동 시키자, 순간 무대의 조명이 객석을 눈부시게 비춘다. 무대에서 관객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인다.

동대표: 저 모니터 속의 애들 보여? 다 지금 이 고시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애들이야. 네가 신고하면 쟤네들은 다 보금자리를 잃어.

미연: 어? 기, 기주야! 기주야!

동대표: 그래, 자기 아들은 누구나 한눈에 알아보지. 그래서 핏줄은 못 속이는 거야.

미연: 기주가 왜 지금 저기 있어! 기주가 대체 왜 있냐고! (전화기를 든다.)

동대표가 다시 작동 시킨다. 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여자의 울음 섞인 교성이 들린다. 아까 기주의 방에서 들리던 소리와 같다.

동대표: 클릭 한번이면 고시원 전체로 공유 되거든. 애들은 늘 받아보는 EBS 특강 같은 건 줄 알고 바로 열어 보겠지. ‘올곧게 자라서 올곧은 교육만 시켜준 엄마도, 알고 보면 똑같은 인간이었다.’ 아주 좋은 교육이 될 텐데. 전인교육!

미연: 꺼.

동대표: 왜, 보기 좋잖아? 아, 각도 참 잘 잡았네. 내 등 참 멋있지 않아?

미연: 당장 꺼!

동대표: 왜, 흥분되고 좋은데. 아, 참! 그러고 보니까 엄마 피에 흐르는 DNA가 기주한테도 갔나 봐. 요즘 왜 그렇게 101호에 들락날락 하는지. 얼굴에 여드름도 싹 다 없어졌던데. 이제 다 컸나. 요즘은 진태가 없을 때만 그 집에 가거든. 근데 어쩌나, 물어볼 수나 있겠어? 엄마가 이 모양인데. 어차피 다 자유의지로 움직인 거잖아. 역시 충분히 대화도 나누고, 정서적인 교감이 친근한 집이야. 엄마랑 아들이랑 하는 짓이 똑 같아.

미연: 아니야!

동대표: 맞아!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사이) 더 웃긴 거 하나 알려줄까? 네가 어차피 여기 안 왔어도, 기주는 고시원에 들어올 거였어. 그래서 지금 여기 와 있는 거야. 이거 억울해서 어쩌나?

미연: 그게 무슨 소리야!

동대표: 글쎄, 누가 찾아와서 그러던데? 자기가 기주한테 부탁한 게 있는데, 기주가 그걸 해주면 자기도 기주 소원 들어주기로 했다고. 그 소원이 바로 이거였어, 고시원. 그 여잔 너랑 달라, 솔직하거든.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기주 고시원에 넣어만 달라고. 그게 자기 소원이래. 나한테, 나한테 소원을 빌었어! 변태 중졸한테! 내가 신이된 거야!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했지. 자비롭게. 어때, 나 쿨하지?

미연: 미친놈! 말도 안 돼! 우리 기주가 그런 얘기를 남한테 가서 할 리가 없어. 다 거짓말이야!

동대표: 오 그러셔? 그럼 너한테 가서 했나? 기주가 너한테 무슨 소원 같은 거 빌어본 적 있어? 아님 부탁이라도 한 거 있어? 뭐라도 하나 해달라고 한 거 있을 거 아냐…… 없어? 자기 엄만데? 설마 가짜 엄마였어?

미연: 아니야!

동대표: 그렇지?

미연: (정신 나간 듯 절규한다.) 아니야, 아니야!

기주의 방에 불이 들어오고 진태가 들이닥친다.

진태: 튀어!

무대 전체 암전.

 

13장 미연의 집

어둠속에서 망치질 하는 소리와 자물쇠 거는 소리 따위가 들리다 사라진다.

이상하리만큼 기분 나쁜 적막. 조명 들어오면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고, 기주가 현관 쪽에서 들어와 공구함을 내려놓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막 잠에서 깬 듯 피곤해 보이는 미연이 안방 문을 열고 나온다. 대화 내내 미연은 기주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기주: 밥하고 국 좀 더 주세요.

미연: 어디 갔다 온 거야? 그 공구함은 왜 들고 나갔어?

기주: 겨울이면 우리 동 지하실에 고양이 떼가 득실거린다 그래서요.

미연: … 그런데?

기주: 아침 운동 삼아 내려가서 지하실 문 잠그고 자물쇠로 다 걸어버렸어요. 몇 겹으로 아무도 못 열게. 테이프로 틈새도 다 막고.

미연: 그건 왜!

기주: … 다 굶겨 죽여 버리게요. (미연을 바라보고) 왜요?

미연: (현기증이 난다.)

기주: 참, 지난 주 금요일에…… 엄마 그때 녹음실 갔었잖아요.

미연: 어? 어……

기주: 그날 사실, 학원 끝나고 그 고시원 갔었어요. 진태가 고시원 비밀번호를 알더라고요. 방에도 들어가 봤었어요. 거기서 귀신을 본 것도 같고… 소리는, (고개를 미연 쪽으로 돌린다.) 확실하게 들었어요. (미연을 빤히 바라본다.)

미연이 거실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기주: 안 궁금해요. 나 고시원 들어갔다 왔는데.

미연: … 진짜 귀신을 봤단 말이야? 어떻게 생겼는데?

기주: 몰라요. 분명히 뭔가 봤는데, 신기하게 기억이 안 나요. 뭐 상관 없어요. 어제 모의고사 봤는데, (사이) 만점 받았어요. 진태도 점수 많이 오르고. (사이) 어디 아파요.

미연: 아, 아니 괜찮아…… 우리 아들 역시 최고! 엄마가 그럴 줄 알았어.

기주: 진태는 이제 고시원에 다닐 거래요. 그날 보니까 빈 방도 있는것 같고. 나도 가면 안돼요.

미연: 어, 근데 기주야, 엄마 생각에는 귀신 때문은 아닐 수도-

기주: 상관없다니까요. 그냥 거기 있으면 왠지 공부가 잘 될 것 같아요.

미연: … 그래. 엄마가 한번 알아볼게.

기주: 괜찮아요. 진태가 비밀이랬는데, 엄마가 허락만 해주면 저까지 그냥 다니게 해줄 수 있대요. 진태 엄마가 고시원에 특별히 부탁했대요. 돼요?

미연: 어…… 그래. (긴 사이) 그런데, 지금 나한테 물어보고 있는 거지?

기주: (긴 사이) 오늘 약속 있어서 늦어요.

미연: 무슨 약속? 누구랑?

기주: 토요일이잖아요, 방학 마지막 모의고사도 끝났고. 엄마도 좀 나가서 누구도 만나고 그래요. 집 지키는 귀신처럼 집에만 그러고 있지 말고.

기주 퇴장하고 미연 홀로 멍하니 앉아 있다.

미연: 어, 그… 그래. 귀신처럼…….

조명 미연에게로 모아진 뒤 서서히 어두워진다.

 

에필로그

빗소리. 수능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 고사장에서 학생들이 가방을 정리하며 웅성대는 소리, 환호성 소리 등이 들리면서 조명 들어온다.

놀이터. 101호가 우산을 쓰고 진태를 기다리고 있다. 진태가 우산 쓴 채 등장.

101호: 아들~~~~! 여기!

진태: (기분이 좋다) 엄마! 왜 나와 있어!

101호: 바로 어디 좀 가야 해서, 아들 보고 가려고. 시험은, 잘 봤어?

진태: 글쎄. (사이) 엄마, 아빠 안 보고 싶어?

101호: 뭐야, 뜬금없이 웬 아빠?

진태: 어? 아냐! 왠지 올해는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엄마, 나 용돈 좀!

101호: 우리 아들 시험 잘 봤구나? 그래, 오늘 뭐해? 신나게 놀아야지!

진태: 몰라. 기주랑 롯데월드 야간 개장이나 갈까 봐!

101호: 그 근처 요즘 구멍이 뽕 뽕 뚫린다던데-

진태: 아 괜찮아! 용돈이나 많이 줘!

101호: 안 그래도 식탁 위에 올려놓았어. 밥 챙겨 먹고 나가. 참, 잠은 절대로 집에 들어와서 자!

진태: 아, 당연하지! 갈게!

퇴장하는 진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101호의 휴대전화에서 문자 메시지 알람이 계속해서 울린다. 101호가 휴대전화를 보고 몸을 돌려 진태가 퇴장한 반대편을 바라본다. 누군가가 서 있는 모양이다. 미소를 지으며 살짝 아는 체를 한다.

조명 점차 어두워진다. 한밤중. 비가 쏟아진다. 조명 들어오면 고시원의 방 안. 방 안에는 빠른 템포의 가요가 흐른다. 교복을 입은 기주가 의자를 방 가운데에 놓고 올라선다. 벽 어딘가에 걸려있는 턱걸이 봉에 올가미가 묶여 있다. 진태가 기주의 방문 앞에 등장해서 벨을 누른다. 기주가 문을 바라본다. 기주가 올가미 안으로 보이는, 천정과 벽이 맞닿아 있는 모서리를 물끄러미 본다. 진태가 다시 벨을 몇 번 더 누른다.

음악소리가 커진다. 암전.

막.
 

 


송한샘 1974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경희사이버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전공 석사과정 수료. 뮤지컬 〈조로〉, 〈헤드윅〉, 〈벽을뚫는남자〉, 〈블러드브라더스〉, 〈이블데드〉, 〈기발한 자살여행〉, 〈엣지스〉, 〈치어걸을 찾아서〉, 연극 〈레인맨〉, 〈버자이너모놀로그〉 등 프로듀싱. 현재 (주)쇼노트 공연사업 총괄이사, 국제예술대학 공연기획학과 조교수, (주)쇼팩 대표이사, (사)한국뮤지컬협회 사무국장, 한국공연예술학교 주임.

 

 

* 《쿨투라》 2015년 봄호(통권 3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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