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어눌한 발화를 통해 매체로서의 영화를 증명하기: 〈헤어질 결심〉과 뉴진스의 〈OMG〉 M/V를 중심으로
[제17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어눌한 발화를 통해 매체로서의 영화를 증명하기: 〈헤어질 결심〉과 뉴진스의 〈OMG〉 M/V를 중심으로
  • 이우빈
  • 승인 2023.02.0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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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영토에 관한 시대착오적 발상

영화의 영토는 좁아지고 있다. 무엇도 아니고 영화 스스로가 자신을 그리 만들고 있다. 애초에 영화란 무엇인가? 상기 질문에는 무수한 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네마란 본디 도덕의 문제라거나 시간의 결정체라거나 세계에의 공산주의적 독해라거나 하는 거창한 영화 미학의 측면, 혹은 미디어 담론에 있어서 동시적 집단 관람의 대중문화라거나 하는 물리적 명명이 지난 130여 년간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어떤 대답도 지금의 ‘영화’를 적확히 규명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자기 존재론의 당위를 취득하지 못하는 영화, 그리고 영화 언저리의 사람들은 응당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를 고민해야 한다.

하나는 영화의 영토를 최대한 넓히는 방법이다. 이것은 영화의 운동이 곧 우주의 원리와 같다는 베르그송, 이어진 들뢰즈의 기치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협의에서 영화를 미디어 아트, OTT 시리즈, 각종 영상물과 면밀하게 결부하는 매체 분류의 차원에서다. 대중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시대를 펼치고 있다. 이제 대중들은 누구도 영화다운 것이나 영화만의 것을 경계 짓지 않는다. 일련의 창작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임흥순의 작업이나 홍진훤의 〈멜팅 아이스크림〉은 미술관과 영화관을 오가며 오로지 자기표현의 방식으로서 스스로를 가시화한다. 회화는 멈춤을 떠나 미술관이란 공간을 통해서 견자들의 운동성을 추동한다. 혹은 스스로를 영상화하여 영화의 운동을 탈취했다. 만약 영화 언저리의 사람들이 이러한 경향에 무조건 찬동한다면 영화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토를 넓히게 될 것이다. 아주 많은 영화란 무엇인가에의 답이 배태될 것이며 영화는 영생에 가까운 영예를 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러한 영화 경계의 흐려짐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부류가 흔히 영화를 말하는 이, 쓰는 이들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여전히 혹자는 ‘영화다운 것’, ‘시네마틱한 것’ 혹은 영화의 본령을 찾아서 과거의 유재에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본 글은 이러한 시대착오적 집착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영화의 영토를 확장하자는 주장의 중점에 분명하고 간결한 ‘영화다움’을 배치하고 싶은 욕심이기도 하다. 나아가 영화의 영토를 좁히려 하는 것(물론 이것이 두 번째 선택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영토를 넓히는 것과 진배없음을 말하고 싶다. 본 주창을 위해서 들고 싶은 예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과 신우석 감독이 연출한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OMG〉 뮤직비디오다. 아마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영화의 본령을 찾아 헤매고 싶다던 필자가 어째서 뮤직비디오로 통성명 되는 6분짜리 영상을 예시하는지일 테다. 단서는 말의 어눌함이다.

 

CJ ENM 제공

어눌한 발화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송서래(탕웨이)는 한국어 발음이 완벽하지 않다. 외국인으로서 불가피한 한국말의 어눌함과 부정확한 발음을 숨길 수 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왜 〈헤어질 결심〉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송서래는 외국인이며 어눌한 말씨를 견지해야 하는가? 그 답은 어눌한 말이어야만 혹은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말이어야만, 달리 말해 잡음이 생겨야만 특정한 매체를 통해 그것을 재-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정 매체란 당연히 번역기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스마트폰의 번역 기능이다. 스마트폰은 작금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타자다. 우리는 우리의 온갖 자아, 이를테면 소통의 활로와 사회적 정체성의 발현을 스마트폰에 의지한다. 또 전화번호와 소셜 미디어 계정에의 자아 의탁을 행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란 말 그대로 자아의 사회적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자면 서래는 자신의 진의를 타아에 의탁하는 셈이다. 타아에 의탁된 진의는 변질될 수밖에 없다. 가령 모든 필자가 으레 지시했듯 〈헤어질 결심〉에서의 ‘붕괴’란 서래라는 발신자, 번역기라는 매체, 해준(박해일)이라는 수신자 사이의 잡음을 통해 ‘사랑’으로 변모한다. 그러니 상기 언급한 ‘변질’이란 좋고 나쁨의 문제에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영화 매체의 속성과 유사하다. 좁히자면 〈헤어질 결심〉은 적확한 영화 ‘매체’로서의 소통 기능을 현시한다.

본디 영화를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판독하여 관객을 소통의 수신자로 자리매김했을 때 영화의 발신 내용이란 변하기 마련이다. 모든 숏과 몽타주는 관객의 보기와 읽기에 좌우된다. 일련의 영화 순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온전히 영화 만드는 주체에게 부여했다. 하지만 전술했듯 영화가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라면 그것은 온당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대한 증빙은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에서도 가시화된다. 서래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해변의 모래사장 밑은 〈헤어질 결심〉의 외화면이다. 프레임 외부의 좌우상하 혹은 전후면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프레임 내부에 은엄폐된 공간 역시 영화의 바깥임은 노엘 버치의 주장처럼 틀림없다. 그러니 영화는 서래의 죽음을 외화면이란 비가시적 공간에 가둔다. 서사를 명확한 시각적 발화가 아니라 일견 어눌한 방식의 시각화로 구성한 것이다. 즉 서사구덩이 안의 죽음을 가시화하지 않고 서사를 뭉갠다. 자연스럽게 이 죽음을 독해해야 하는 것은 응당 해준이며, 해준의 시선에 빙의해야 할 관객의 몫이다.

〈헤어질 결심〉이 〈현기증〉과 필시 다른 영화임을 증빙하는 주요인 역시 해준의 시선에 있다. 매들린의 죽음을 목격한 스코티와 달리 해준은 서래의 죽음을 시각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가 정한 서사 이후, 형사로서의 해준이 그녀의 시신을 확인했더라는 식의 상상의 장을 통해서 관객은 외화면의 가능성이 영화 이후에도 연장될 수 있음을 열어 놓는다. 이것은 무척이나 고전적인 외화면 이론으로서 관객이 영화 내외 프레임에 가지는 권능의 일종이다. 결론적으로 〈헤어질 결심〉은 서래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사유의 장을 주지한다. 이처럼 영화라는 매체는 끝없는 소통과 잡음의 장이다. 〈헤어질 결심〉의 내부는 서래가 붕괴란 단어를 사랑으로 수신했고, 사랑을 다시 죽음으로 변환하여 수용했음을 말하며 이러한 명제를 증빙한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서래의 죽음을 비가시적 상상의 장으로 이동시키면서 영화의 의미, 숏의 의미란 관객의 것임을 말한다. 그렇게 영화는 발신자의 어눌함과 그에 대응하는 관객의 무수한 사유만큼이나 무수한 가능성을 배태하게 된다.

〈헤어질 결심〉이 어눌함의 소통을 이용하는 것은 이뿐 아니다. 서래가 자신의 자아를 의탁한 매체는 한 가지 더 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계봉석의 뿌리를 산해경이란 활자 매체로 보존하고 있다. 본래 산해경이란 뚜렷한 저자가 없는 서적이며 온갖 신화와 민담을 담아낸다. 그러나 서래의 산해경은 서래라는 특정 작자가 존재한다. 다만 이것은 중요치 않다. 가령 파솔리니의 〈아라비안 나이트〉 등 인생 3부작에서 작자 미상의 천일야화 원전은 온전히 파솔리니라는 작자의 존재성을 명시하게 된다. 그러나 파솔리니는 영화 속 무수한 이야기의 편집점을 의도적으로 비가시적으로 지정한다. 그렇게 이야기 사이의 차등을 삭제함을 통해서 영화 혹은 이야기를 편집하여 발화하는 작가의 존재감을 무화한다. 이를테면 저자의 쓰기 혹은 말하기를 의도적으로 뭉개는 행위다. 서래 역시 마찬가지다. 서래가 택한 방식은 해준에게 자신의 산해경을 읽게 하는 것이다. 해준이 산해경을 똑바로 발화함을 통해서 기존의 어눌했던 서래의 발화는 덮어 쓰인다. 수신자의 재-발화로 발신자의 어눌함 혹은 소통 간극의 불명확성을 타개한다.

지금껏 〈헤어질 결심〉이 영화 매체의 소통 과정을 인물 설정, 프레임과 외화면, 소재로서 메타적으로 풀어냈다면 다음은 편집 측면에서의 증빙이다. 전술한 파솔리니의 편집 기술은 응당 〈헤어질 결심〉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니까 완연히 다른 천일야화 속 이야기들의 시공간 차이를 무화한 것처럼 〈헤어질 결심〉은 해준의 현실과 상상 사이를 줄타기하며 그것들의 존재적 차이를 무화한다. 해준이 서래를 감시한다. 그녀를 망원경이란 매체로 탐닉하더니 이윽고 해준은 서래의 옆에 당도해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소파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이것은 필시 해준의 상상임이 틀림없지만 〈헤어질 결심〉의 편집은 상상으로의 진입과 탈출을 최대한으로 가려낸다. 이는 숏 연결의 한계를 경계 짓지 않는 〈헤어질 결심〉과 영화 본령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비가시적 편집이란 것은 항시 영화의 모든 것이 될 순 없다. 가령 누벨바그를 위시한 점프 컷과 가시적 편집의 일대기를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영화의 모든 것은 결국 만듦에의 태도에 기인한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영화 속성을 어떤 준거로 명확히 나누려는 시도에 반동하는 행위라면, 이제껏 써온 용어대로 온갖 경계를 뭉개고 작가의 발화를 어눌하게 하려는 행위라면 온당하다. 다시 돌아가서, 해준의 상상 시퀀스에서 박찬욱이란 영화감독이 발신자라면 해준의 상상 시퀀스는 메시지이며 관객은 그것을 읽는다. 즉 발신자는 메시지의 내용과 계층을 일부러 짓이기면서 일련의 흐물흐물한 이미지로 전달한다. 자신의 발화를 어눌하게 만든다. 소통 과정에서의 경계란 없으며 모든 상호작용은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헤어질 결심〉이 예증한 이미지와 영화 편집은 소통 기능은 이 동시성을 담보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헤어질 결심〉은 무척이나 영화적인 영화다. 여기서 산정한 영화다움이란 영화를 진정한 하나의 독자적 매체(매개)로 여겼을 때 영화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 하는 지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애초의 질문이 찾아온다. 이러한 예증이 어떻게 영화의 영토를 좁히는 동시에 넓히는지에 관한 의문이다. 기실 이에 대한 답은 사전의 서술에도 모두 깃들어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매체다. 그리고 매체란 적확히 영화다. 매체란 무한하다. 매체가 주관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즉, 전달 채널(프레임과 외화면, 편집 등)이나 수신자 오류(관객의 각기 다른 사유)에 의한 잡음이 메시지를 무한하게 변주한다. 그만큼 영화의 역량과 생명력은 넓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를 혹은 숏을 특정한 해석에의 틀이나 미학적 방법론으로서, 혹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관람 태도의 사회적인 접근으로서 규명한다면 다소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영화를 모든 커뮤니케이션 형태에 관한 매체로 명명한다면 흥미로운 활로가 열린다. 최근의 화두인 아주 고답한 질문, 영화와 각종 영상물(시리즈, 뮤직비디오, 광고 등)을 어떻게 규합해낼 것인지에 대한 단서다. 그리고 신우석 감독이 연출한 ‘걸그룹 뉴진스의 〈OMG〉 뮤직비디오’(이하 〈OMG〉)는 놀랍게도 〈헤어질 결심〉과 같은 맥락의 방법을 통해서 위와 같은 매체로서의 영화 여기기를 찬동한다.

 

어도어 제공

어눌한 발화의 뮤직비디오

〈OMG〉의 시작은 베트남계 호주인인 외국인 멤버 하니의 내레이션이다. 다소 어눌한 말씨의 한국말로 발화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어요. 남들이 이야기하는 나와 진짜 내가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겨우 그 답을 찾았어요. 사실 저는 아이폰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당신이 부르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갈 거예요. (중략) 당신이 제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 머릿속은 항상 이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중략)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실 저는 아이폰이었습니다.’ 앞선 〈헤어질 결심〉의 논의를 연결하자면 〈OMG〉의 화자는 자신을 스마트폰으로, 현대 사회 속 대표적인 자아의 위탁 매개로 자칭하며 작품의 포문을 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의 발화자를 굳이 외국인 멤버 하니로 설정했단 것이다. 자막까지 사용하면서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필시 분명한 의도의 드러냄이다. 그러니까 〈OMG〉는 분명하게 하나의 기치를 천명하고 시작한다. 〈헤어질 결심〉과 같이 어눌한 발화를 통해서 작품의 모호한 틈새들을 드러내며 매체로서의 자신을 증빙하겠단 것이다.

여기서 잠시 선회하자면 〈OMG〉를 둘러싼 몇 가지 레이어는 과감하게 축약함을 밝힌다. 예컨대 〈헤어질 결심〉에서 논의한 편집 기술, 혹은 메타 영화의 속성 등이 그렇다. 〈OMG〉는 뉴진스의 과거 무대 영상 푸티지와 이전 뮤직비디오 클립 등을 이용하여 제4의 벽을 깨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OMG〉를 단순히 메타 영화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은 〈OMG〉란 사유의 중 핵이라기엔 모자란 감이 없지 않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뉴진스의 멤버들은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환자들로 분한다. 그들은 다른 시공간의 인물로 변하거나 종종 이것이 뮤직비디오 촬영임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즉 〈OMG〉는 편집으로 그들이 하나의 인물이자 여러 속성을 지닌 다면체임을 수신자에게 현시한다. 결론짓자면 〈OMG〉의 만듦새는 뉴진스라는 하나의 역사를 갈무리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의 여러 요소를 확보하는 전형적인 메타 영화의 방식이다. 이것은 영화 매체에서 자주 쓰이는 방법론이며 이것만으로도 시청자는 충분히 〈OMG〉가 다소간에 영화적이라고 인식할 법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전술했듯 자신을 매체로 대하는 뮤직비디오의 태도다.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겠다. 구체적인 기술론을 떠나서 〈OMG〉의 시작을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치 〈헤어질 결심〉의 서래처럼 어눌한 한국말을 통해 서사를 이끄는 하니의 내레이션이다. 달리 말해 하니는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신우석 감독의 소통 채널 혹은 직접적인 뮤직비디오의 발신자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의 역할은 꼭 놀이와 같이 수시로 전환된다. 자신을 매체로 이미 자칭하면서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밝히는 하니와 연출자의 직접적인 메시지 내용은 말의 어눌함이란 형식미와 적절히 결부하는 것이다. 즉 자기 정체성, 정확하게 말하자면 발신자와 채널, 메시지로서의 정체성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는 매체로서의 〈OMG〉를 규명한다.

대신 〈OMG〉가 〈헤어질 결심〉과 같은 영화가 아니라 뮤직비디오로서만 독자적인 기능을 지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체 외부의 역사적 담론이다. 전술했듯 〈OMG〉는 메타 영화의 기법을 통해서 뉴진스라는 매체의 작품 외부의 시간을 끌고 온다. 이것은 본디 뉴진스라는 개념이 일종의 시리즈 영화처럼 쓰이는 것에 근거를 둔다. 〈OMG〉라는 단일 작품뿐 아니라 뉴진스에 얽힌 온갖 문화적 지층과 팬덤의 연속적인 활동은 〈OMG〉의 해석에 외부적인 요소의 뉘앙스를 가미하기 때문이다. 즉 불특정 관객과의 단발적이고 우연적인 만남으로 매개되는 영화의 범주보단 지속적이고 필연적인 연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시계열의 매체로 여겨지는 것이다. 풀어 말하자면 〈OMG〉가 표면적인 메시지로 강조했듯 뮤지션, 특히 작금의 아이돌 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편협한 시각이나 성급한 재단을 비판하는 것은 과거 뉴진스에 얽힌 비판의 시각 덕에 가능한 기능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다시 한번 증빙되는 것은 역시 〈OMG〉가 지니는 매체성이다. 현재 아이돌 문화에서 수용자 혹은 팬덤은 단순히 수신자의 위치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신한 메시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역으로 발신자에게 전달하면서 더욱더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이뤄낸다. 아이돌 프로듀서나 아티스트들은 이러한 팬덤의 피드백을 통해서 이전 소통의 잡음을 제거하고 다시 소통의 물꼬를 트는 식으로 작업한다. 그러니 〈OMG〉는 뮤직비디오로서의 역할을 통해서 더 강력한 매체의 기능을 증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자신이 영화의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음을 설득한 것이다.

그러니까 전술한 대로 영화가 매체라면, 그리고 매체가 영화라면 〈OMG〉를 영화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와 뮤직비디오, 〈헤어질 결심〉과 〈OMG〉가 직접 주장하듯 영화의 경계란 언제든 어눌해질 수 있는 흐릿한 매체성의 총체인 것이다. 이런 어눌함을 두 작품은 아주 가시적으로 발화자의 어눌함(외국인 배우, 가수 기용을 통한)으로 감각화한 것이다. 말 그대로 감각이다. 만약 미디어를 맥루한의 논의처럼 신체 감각의 연장으로 확대한다면 매체로서의 영화다움을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감각의 수용과 공유다. 그러니 〈OMG〉가 뮤직비디오로 통용되면서 영화와 달라지는 것은 매체의 범용성을 한없이 좁히는 언어의 놀음뿐이다. 관객은 팬으로, 배우는 가수로 변모한 것일 뿐 〈헤어질 결심〉과 〈OMG〉의 존재론적 차이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매체로서의 영화, 영화로서의 매체

미처 언급하지 못한 영화가 많다. 짧게 나열해보자. 이를테면 〈탑건: 매버릭〉이다. 〈탑건: 매버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눌한 발화가 등장한다. 작중 초반 매버릭은 마하 10의 시험 주행을 감행한다. 그것을 말리는 제독에게 통신 장애가 생긴 것처럼 일부러 띄엄띄엄 답한다. 그 후에 매버릭은 추락하지만,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앞선 방정식에 그대로 대입이 가능하다. 매버릭은 서래와 하니처럼 스스로를 매체화했고 이것은 곧 인물의 영화화이며 매버릭이 살아난 것은 매체성을 획득한 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시화한 것과 같다. 또 예시를 들자면 〈드라이브 마이 카〉다. 여기엔 어눌함은 없지만 아예 말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그리고 다양한 언어의 차이, 아내의 목소리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통한 발화의 시차가 있다. 말하자면 신체-미디어로서의 가능성을 말하지 못하는 이에 투영하고, 언어와 카세트테이프라는 매체의 반복적인 이용을 통해 〈헤어질 결심〉과 같이 영화의 매체성을 내외적으로 키우려는 목적이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상기의 영화들, 가령 더 통상적인 영화를 본문의 중점으로 삼지 않은 것은 당연히 글의 초입에서 언급한 본문의 목적 때문이다. 그 목적으로의 이행 과정은 영화 각각의 어떠한 속성을 치밀하게 파고들어서 하나의 이론을 예증하려는 귀납과는 거리가 멀다. 어찌 보면 이것은 다소간 우격다짐의 연역적 추론이다. 몇몇 작품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어눌한 발화에의 독해를 통해서 매체로서의 영화, 영화로서의 매체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빙하려는 시도다. 응당 이러한 과정의 최종 목표는 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본 연역에 필요한 예증의 요소는 흔히 영화로 말해지는 것들이 아닌 뉴진스의 〈OMG〉가 되어야만 했다.

다분히 개인적인 욕심이자 무모한 자구책이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만의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다. 욕심과 무모함 없이는 2023년 영화의 존재론을 명징하게 갈구할 순 없다. 이것을 앞서 언급한 작품과 작가들은 짐짓 알고 있다. 만약 영화와 매체가 같은 것으로 읽힐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미디어 아트, OTT 시리즈, 각종 영상물은 영화가 된다. 더하여 〈OMG〉로 언급한 뮤직비디오 혹은 뮤직비디오로 확인한 매체로서의 아이돌 그룹까지 영화의 자장에 포함된다. 발신자, 메시지, 채널, 발신자의 요소를 확립한 모든 소통과 활동, 매개에의 작용은 모두 영화가 된다. 영화를 일견 좁아 보이는 매체라는 개념적 틀에 가둠으로써 외려 영화의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멸하지 않는다. 영생할 수 있다.

 

 


이우빈 부산대학교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예술문화영상학과 수료. 영화·영상 주간지 《씨네21》 객원 기자, 독립 영화잡지 《섭씨 233》 편집장으로 활동 중.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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